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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변호인' 노무현과 부림사건의 모든 것|작성자 이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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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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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뜻하지 않은 연행 30~60일간의 불법 감금 후의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후에야 우리 16명의 피의자 가족들은 뚜렷한 이유와 내용을 모른 채 제한된 접견에만 만족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서를 들먹이며 우리의 가족이 빨갱이짓을 했다는 수사관들의 외침속에 반신반의하며 사실을 알고자 애태우고만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든것이 공정하게 밝혀지는 공판이 다가왔고 우리 가족들로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피의자 1인당 4장의 방청권 발부로 방청이 제한되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말하는 빨간줄로 칭칭 묶을 만큼 엄청난 죄인들의 공판이라면 크게 보도되어 많은 사람이 와서 보고 교훈삼아야 할것인데 왜 방청을 제한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심리를 하는 검사님들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법 앞에 공정한 태도로 임해야 할텐데도 언성을 높여 소리를 치고 반말을 하며 눈을 치켜뜨고 공소사실의 부인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 책을 구입(대부분은 일반 시중서점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구입)하여 소지하거나 읽은 것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보고 책을 소지하거나 읽은 것 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것이며 우연한 선후배의 만남이나 졸업축하파티, 망년회 심지어는 이사간 친구 집에 놀러간 것까지도 사회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집회로 규정하고 전공분야 외의 공부를 한것과 혼자 책을 읽지 않고 같이 모여 공부한 것 그 자체가 수상하다는 식의 공소사실 또한 기막힌 것이었습니다. 어떻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부합되도록 억지씀이 역력했고 조사당시 고문한 사실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변호사의 반대심리 중 고문사실에 대해 진술할 때는 검사님은 눈을 감고 졸고 계셨고 인권적 차원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처사들이 저희 가족들의 마음을 어둡게만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현실임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서운 통닭구이와 비명, 자포자기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또 방청권과 윽박지름, 엄청나고 기막힌 공소사실은 무엇이구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 부림사건 관련 부산양심수인 가족일동 - 호소문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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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의 주요 인물들 |
| 최병국 | 부림사건 주임 검사 (극중 : 강검사)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로, 부림사건 기소를 주도. 이후 김영삼 정부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며 한보사태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전주지검장으로 재직하다 99년 대전 법조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제출하고 울산 남구에서 국회의원 당선 및 한나라당에서 3선을 한 전 국회의원이다. 부림사건에 대해 "전반적인 수사가 대공수사대에서 진행해 송치되어 왔고, 관대하게 처분했으며 지금도 당시의 결정에 소신있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 고영주 | 부림사건 수사 검사 80~90년대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부림사건은 물론 삼민투위사건, 민중교육사건, 한총련사건 등 굵직한 공안사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까지도 부림사건 및 관련 변호인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라 주장(월간조선 2006년 12월호)하는 등 참여정부 당시 핍박을 받았다며 노무현의 복수라고 연설.(동영상 :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참여정부 당시 대검찰청 감찰부장, 서울남부지검장을 역임하다 현재 변호사로 재직하며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보수단체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
| 서석구 | 부림사건 주임 판사 부림사건 주임판사중 한명으로 3차 구속된 이호철(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등에게 국가보안법 관련 무죄를 선고2했다 좌천되었고 이후 옷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민운동에 몸담았으나 근래 엔 과거 자신의 시민운동 사실을 참회하며 보수성향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근 TV조선 등의 종편 단골 패널로 참여중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부림사건이 아닌 서울 학림사건 배석판사임) ( 서석구 블로그 :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과 유서가 주는 교훈 ) |
| 노무현 | 담당 변호인 (극중 : 송우석) 당시 부산상고라는 출신 덕분에 세무회계쪽으로 부산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변호사.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기득권층에 속했다. 실제로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씨의 (주)삼화나, 조선견직 등 부산의 대표 향토기업 상속세 등 1백억원대 이상의 사건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며 이후 송기인 신부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
| 김광일 | 당시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 (극중 : 김상필) 유신때부터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이자 부산 학생운동의 실제 자금줄이었으나 부림사건 당시 최병국의 공범 협박으로 실제 변호는 맡지 못하고 자신에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은 노무현을 추천하게 된다. 훗날 노무현과 정치입문을 함께 하는 등 협력하지만 노무현이 3당야합의 YS와 결별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김광일은 문민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2년 대선 당시엔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고 이후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2010년 별세. |
| 이흥록 |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 (극중 : 이흥구) 1978년 창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재정적 도움을 주며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만든 인물 중 하나. 부산양협은 79년 '부마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당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최대 조직으로 '부림사건'의 표적이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당시 김광일을 대신해 변호인단(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의 중심에 섰었다 . 참여정부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을 지냈고 현재 변호사와 김치건강법 알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
| 문재인 | 82년부터 노무현 변호사와 길을 함께 한다. 경희대 총학생회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이끌었던 그는 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였으나 유신시위 경력으로 판사임용에서 떨어진다. 이후 부산에서 개업 준비중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전 참여정부 민정수석)로부터 노무현 변호사를 소개 받는다. 그해 노무현과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한 뒤 평생을 동지로 함께 한다. 2009년 부림사건 재심의 변호를 맡았으며 최근 부림사건 변호 사실을 구실로 여권에서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하자 81년 당시의 부림사건은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수료 이전사건이므로 재판과 무관하다고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가 증언한 바 있다. ( 미디어오늘 2013.1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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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의 피해자들 |
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7월4일~8월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설동일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현 노무현재단 근무), 송병곤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노무현이 주례를 서준다) 노재열 (24세, 부산대 공대 4년휴학 : 이후 민노총 간부 역임), 고호석 (26세, 부산대 문리대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교사) 이상록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97년 사망) *부산일보 2013.03.07 기사에서 고호석씨의 증언 (그러나 덧글의 부림사건 피해자 가족께서 제보하신 내용은 "정신병과는 무관한 사고로 2006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송세경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아우성 구성애씨의 남편, 이후 김광일 변호사 사무장으로 활동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김희욱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이상경 (부산대 문리대 1년퇴학) |
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9월11일~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장상훈 (24세, 부산대 약대졸 : 이후 노무현이 39세의 나이로 장상훈의 결혼식에 첫 주례를 선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안검사 출신 한나라당 김기춘(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거제에서 맞붙었으나 패한다) 김재규 (33세, 부산대 상대졸, 당시 탁구장 운영 : 이후 노무현 후보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본부장 및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최준영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주정민 (24세, 부산대 법대졸), 이진걸 (23세, 부산대) 전중근 (25세, 공장근무), 박욱영 (25세, 부산공전졸), 윤연희 (24세, 교사) |
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도피중 체포) 이호철 (24세, 부산대졸 :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설경혜 (23세, 교사 :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정귀순 (22세, 부산대졸 :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김진모 (부산대 4년), 최병철 (부산대 4년), 유장현 (부산대 4년), 김영 (23, 부산대, 당시 탈영군인 - 소설집 '완전한 만남'의 김하기 작가) |
그 무렵 김형기, 송세경 , 최준영 , 김희욱 , 소준열, 설동일 등 서울 지역으로부터 저마다의 각자 사정에 따라 부산에 오게 된 몇몇 운동권 출신 인자들이 중부교회나 양서조합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과 지도력을 부산의 운동세력에게 제공, 접맥시킴으로써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송세경, 설동일 등은 서울지역에서 흔히 학습하고 있던 스터디 커리큘럼을 도입하여 양서조합내 학습단에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학내에서의 조직 확산을 꾀하는 데 실질적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송세경, 설동일 등과 당시 학습에 함께 참여하였던 이상록 , 고호석 , 이호철 , 노재열 , 송병곤 , 윤연희 , 주정미 , 설경혜 등은 그들이 80년대 초 '부림사건'에 그대로 연루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세력의 중요한 일각을 담당할 만큼 성장해 가게 된다. 그러한 노력들의 결과, '78년 말 쯤에는 부산대학 내에 저항적 학생운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분명한 학내 지하 써클이 태동하고 이를 토대로 '79년 봄 쯤에는 각 학년별 조직체계와 그 후의 재생산구조까지 갖춘 비공개 운동조직(이른바 패밀리 구조)이 생겨나게 된다. 즉 이상록(74학번), 고호석(76학번), 등이 이호철, 노재열 등의 77 학번과 김진모, 최병철, 정귀순 ,유장현 , 유동현, 김영 (현재소설가 김하기), 남경희 등 78학번을 규합하고, 정귀순, 이정애, 부경란, 최민성, 김정현, 손동준 등 79학번 신입 생들까지 조직화시켜 냄으로써 학번간의 재생산 라인이 구축된 조직체계가 상당수의 인원을 포괄하며 확립되게 된 것이다. 이 것이 일면 '도깨비 집'혹은 '사랑 공화국'으로 불리우며 후일 '80년대 초 '부림사건'을 계기로 세간에 알려진 부산대 지하 써클의 실체였다 . '도깨비 집'의 경우 명확한 실체는 보이지 않으나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 음을 감지한 바깥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사랑 공화국'은 79년초 술자리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오고 간 제의가 이후에도 조직의 이름 처럼 계속 통용되어 버린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 부산 민주운동사 - 제3절 부마민주항쟁 발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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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주요 피해자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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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록 (당시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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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경 (당시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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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욱 (당시 32세, 대연여중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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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당시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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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에 대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 |
노무현의 '운명이다', '여보 나좀 도와줘' 중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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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당시 행해졌던 고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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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수도공사'라고 불리던 물고문은 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칠성판 위에 누운채로 얼굴에 수건을 씌운채 겨자를 섞은 물을 주전자로 끝도 없이 붓거나 욕조에 물을 받아 담그는 방법이 주를 이뤘다. 이후 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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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끈으로 손, 발을 묶고 손과 종아리 사이로 굵고 긴 몽둥이를 가로질러 넣고는 책상사이에 걸쳐놓고 난타하는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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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고문은 고문을 받던 칠성판 위에 누운채 그대로 시행됐다.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 등은 전기고문으로 인해 발톱이 빠지는 고통을 받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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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피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금된 상태에서 몇날 몇일이고 반복적으로 경찰봉, 곡괭이자루 등으로 마구잡이 난타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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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부림사건 |
1982년 2월 23일 : 부림사건 관련 1심 판결 최고 징역 3~7년 선고 1~2차 구속자 16명은 81고단 7929, 8628(병합) 사건번호의 판결로 징역 3~7년이 선고되었다. (부림사건과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성 - 문재인) |
1982년 6월 26일 : 부림사건 항소심 16명(1~2차 구속자) 최고 징역 10년 구형 부산지법 제1형사항소부(재판장 안상돈 부장판사)는 26일 부림사건 1차 기소자인 이상록 피고인(26,부산)에게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하는 등 16명의 피고인(14명 구속, 2명 불구속)에게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각각 선고했다. ( 동아일보 : 1982.06.26 ) |
1982년 7월 6일 : 부림사건 3차 구속자 3명 1심 최고 징역 1년 구형 부산지법 제3형사단독 서석구 판사는 국가보안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호철 피고인에 대해 "정부시책을 비판했다고 하여 이를 확대 해석, 국가보안법으로 다룰 수는 없다"고 판시, 계엄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 부분만 유죄로 적용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경향신문 : 1982.07.06) |
1982년 10월 27일 : 부림사건 상고 기각, 대법원 16명(1~2차 구속자) 원심 확정 대법원 형사부는 27일 부림사건 관련자 16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과 검찰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 등이 적용돼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집행유예 2년까지 선고된 원심형량이 그대로 확정됐다. ( 경향신문 : 1982.10.27 ) |
1983년 8월 15일 : 광복절특사로 관련자 석방 정부는 광복절 제 38주년을 즈음하여 형확정자 1천9백44명에게 특별사면, 감형, 복권, 형집행정지, 특별가석방 및 특별가퇴원의 은전을 베풀기로 결정했다고 11일 발표했다. 이 광복절특사를 통해 송세경을 비롯해 송병근, 설동일, 노재열, 김희욱, 최준영, 주정민 등 총 7명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경향신문 : 1983.08.11) |
1983년 12월 26일 : 성탄절특사로 형 집행정지 전원 석방 마지막까지 남아 옥고를 치르던 이호철을 비롯해 김재규, 이상록, 고호석은 1983년 12월 대특사때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이로써 부림사건 1~3차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 성탄절 석방 복권자 명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1988년 12월 21일 : 부림사건 4차 구속자 '김영' 마지막으로 석방 지난 21일 이른바 '부림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김영(당시, 부산대 재학, 징역10년)씨가 7년 2개월 만에 석방됨으로써 외견상 부림사건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 대부분은 한결같이 "부림사건은 끝난게 아니고 이제 시작"이라면서... ( 한겨레 : 1988.12.25 ) |
2003년 9월 18일 : 부산지방법원 '부림사건' 재심 결정 부산지법 형사1부(재판장 권오봉 부장판사)는 18일 80년대초 군사정권의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의 하나인 '부림사건'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아무개(42·여)씨 등 2명이 1999년에 낸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을 받아들여 재심하기로 결정했다. ( 한겨레 : 2003.09.18 ) |
2009년 8월 14일 : 계엄법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 일부 무죄 선고 부산지법 형사항소3부(홍성주 부장판사)는 14일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3~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김재규(61.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씨 등 재심청구인 7명에 대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법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 법 개정에 따라 면소 판결했다.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집행유예 2년~징역 1년6개월과 함께 자격정지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 연합뉴스 2009.08.14 ) |
2011년 4월 5일 : 부림사건 당시 고문, 폭행,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 고소 5.18 민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한 용공(容共) 조작사건 가운데 하나인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당시 고문, 폭행 등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들을 사건발생 30년만에 고소해 결과가 주목된다. 고호석 전 전교조 부산지부장 등 부림사건 피해자 14명은 5일 오전 부산지검에 불법으로 체포, 감금, 폭행한 전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장 이모씨 등 경찰관 2명을 불법감금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당초 경찰관 3명을 고소할 계획이었으나 최근 숨진 것으로 확인된 1명은 제외했다. ( 연합뉴스 2011.04,05 ) |
2013년 3월 6일 : 부산지법 '신군부 용공조작 부림사건 혐의 전체'에 대한 재심 결정 부산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한영표)는 고호석씨(57) 등 5명이 제기한 부림사건 재심 청구에 대해 "재심 대상 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부분에 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 경향신문 : 2013.03.06 ) |
부림사건에서 문제되었던 불온서적들!! |
'전환시대의 논리' / 저자 : 리영희 (1974) 현대사와 국제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고전적 사회계몽서로서, 1977년에 출판된 저자의 또다른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한때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유신체제시절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혔다. 1999년 서평전문지 《출판저널》에 의해 '20세기 한국고전'으로 선정되었다. ( 두산백과 )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저자 : 조세희 주 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조세희의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8년 6월 5일에 책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위키백과 ) |
| '우상과 이성' / 저자 : 리영희 (1977) 리영희저작집 제2권 <우상과 이성>. 현대 중국에 관한 몇 편의 논문, 종합잡지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발표했던 논문, 평론, 에세이 및 수필에 새롭게 몇 편을 보태어 엮은 책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을 이룬다. 행동하는 지식인 리영희의 저작들을 한자리에 정리한 책. ( 인터넷교보문고 ) |
| '역사란 무엇인가' / 저자 : 에드워드 카 영국의 대표적 역사가 E. H. 카의 역사 입문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라는 근본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역사 철학서로, E. H. 카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속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E. H. 카의 오랜 역사적 연구 및 서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의 결정을 담고 있다. 역사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역사 인식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저자 : 슘페터 조지프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창조적 파괴 개념을 서술하였다. 초판은 1942년에 발행되었으며, 2판은 2차대전 이후인 1947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귀결'을 덧붙여 출간되었고, 2년 후에 '전후 전개에의 주석'을 덧붙인 제3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경제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과 달리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태적 모형분석이 아닌, 역동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려냈다. ( 위키백과 ) |
| '경제사관의 제문제' / 저자 : 셀리그만 (1979) 사회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진보의 조건이 되는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본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에 관해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접근한 책으로서, 경제사관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입문서. |
| '제3세계의 이해' / 저자 : 사무엘 팔머 |
| '민족경제론' / 저자 : 박현채 (1978) 우리의 경제현실과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열정적 참여를 주장하는 이 비평속에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경제의 논리와 자립적 민족경제에 대한 전망이 논리적으로 펼쳐진다. |
|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 / 저자 : 유인호 (1978) 비판경제학의 골자들을 추려담은 책. 71년부터 73년까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에 실렸던 경제평론들을 책으로 묶었다. '경제성장의 허와 실'등 이 책에 실린 다섯편의 글들은 책의 제목이 정확히 지시하듯 10년간 성장경제의 뒷면, 그 만만치 않은 반대급부에 주목했다. |
| '제3세계와 종속이론' / 저자 : 염홍철 (1980) '종속이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A.G.프랑크'를 비롯해 'I.월러스타인', '샤미르아민'등 종속이론의 주도적 이론가들의 논문을 실은 책. 종속이론은 심각한 대미무역적자, 막대한 대미 외채, 저개발경제의 악순환을 겪고 있던 40~50년대 남미를 해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4년 유엔 남미경제위원회(ECLA)의 보고서는 종속이론의 태동에 중요한 문건이 되었다. |
| '해방 전후사의 인식' / 저자 : 송건호, 백기완 외 다수 (1979) 첫 권이 1979년 10월에 출간됐으며, 이후 10년에 걸쳐 전6권으로 완결됐다. 지금까지 모두 50여만부가 판매되었을 만큼 '명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근현대사 분야 논문을 쓸 때 자주 참고서적으로 활용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발간 겨우 11일만인 79년 10.26 사건으로 판금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해금되었다. 하지만 그해 5.17 군사 쿠데타 이후 저자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조사받았으며 대학으로부터 쫓겨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하지만 판금에도 불구하고 80년대 군부독재정권시기 큰 인기를 얻었다. ( 엔하위키 ) |
그 밖의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서적으로는 경제학(이영협 저), 서양경제사론(최종식 저), 한국현대사론(송건호 저), 분단시대의 역사 인식(강만길 저), 민중과 경제(박현채 저), 전후 30년의 세계경제사조, 한국농업문제의 인식(공저), 교육과 의식화(파울로 프레이리), 현대의 휴머니즘(무대리작), 자본주의의 어제와 오늘(모리스 돕), 인간의 재산(레오 휴버만), 스위지 경제학(폴 엠 스위지), 자본주의 발달이론, 경제 계획의 실제(베들레헴), 대중 조직의 이론과 역사(미우라 쓰도무), 자본주의 경제와 구조(일본 세무 경리 협회간) 등이 있었다. (문재인 - 부림사건과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성) |
부림사건 수사 검사 고영주 변호사 최근 인터뷰 (2013.12.13) |
New Daily |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사건" (기사 본문 보기) "공산주의 세상 되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기사 본문 보기) 고영주 변호사 "부림사건은 절대 용공조작사건 아니다!" "그들은 절대 허위자백한 게 아닙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말했어요" |
본 블로거의 기사 반박 |
부림사건과 영화 '변호인'에 대해 비판적 내용을 다루는 글들에는 주요 증거자료로 당시 검사 '고영주 변호사'의 증언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최근까지 부림사건 등의 용공조작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는 월간조선 2006년 12월호에 '공안검찰의 대부'로 소개되며 인터뷰를 하는데 당시 "부림사건 관련자들은 명백한 공산주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조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는 '검사가 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당신은 역사의 발전법칙도 모르느냐?'면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당신은 심판을 받게 될것이다'라고 하더군요"라고 발언했습니다. 지금껏 알려진 바로는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엄청난 고문을 받으며 읽지 않은 책도 읽게 만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생각하게 만들며,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게 만들어 허위 진술을 하게 했고 그 허위 진술을 근거로 법정에서 유죄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사건이 부림사건인데 왜 저토록 중요한 진술이 공소장에 포함되지 않았느냐 하는게 궁금합니다. 실제 저런 진술이 존재했다면 왜 당시 공안검찰은 피의자 진술내용으로 공소장에 추가하지 않았을까요? 위 내용과는 별도로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2013.01.04)'에서 보면 "부림사건 당시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다. 변호사가 자신이 변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몰랐을 수가 없으므로 문재인도 공산주의자고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대한민국이 적화되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문재인은 당시 부림사건 변호인 명단에 포함되지도 법정에 나선 적도 없습니다. 고영주는 이후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 후보가 부림사건의 변호인이었다고 발언을 합니다. (주간조선 2013.09.09) 당시 공소장에도 없던 피의자 진술내용이 15년이나 지나서 생각이 났을리도 없고 부림사건 담당 검사였던 사람이 당시 변호인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의 최근 진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게 사실입니다. 고영주의 수차례 발언에 대해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였던 고호석씨의 최근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미디어오늘 - 영화 '변호인' 배경 부림사건까지 '난도질' : 2013.11.20) "대공분실에서 구속영장 청구해 유치장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소리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협박해 고도로 위축된 상태였고 유치장에서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런 정신 상태에서 검사를 위협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경찰 조서와 검찰 조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검찰에 유리한 진술인데, 그럼 진술을 적은 조서를 공개하면 되는 일 아니냐" "부림사건은 81년도에 일어났고 문재인 의원은 82년에 막 부산지역 변호사로 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사건의 변호인 명단에 문재인 의원은 없었고, 단 한번도 법정에 나온 적이 없는데 이를 알고 있는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완전한 왜곡, 날조" 마지막으로 송병곤씨의 회고문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시사인 2013.12.09) 중 일부를 소개하며 끝맺음합니다. "나와 당신이 겪었던 부림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유공자로까지 인정받았던 우리를 용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부림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다시 차오를 무렵 당신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의 억울함을 잘 대변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깁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