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부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한번 해보겠습니다.
우선 부여라는 이름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기>>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참고로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59년에 부여가 건국되었다는 전설이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1세기 경에 연맹왕국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를 보자면 AD9년 중국에서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 후에 주변국가에 사신을 보내서 왕(王)을 후(侯)로 강제로 낮추게 하고 새로운 인수를 수여할 떄 부여도 고구려와 함께 그 대상에 포함된 사실이 나타나는데, 이를 보자면 이 당시 부여는 초기국가의 단계로 발전하여 '왕'을 칭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시기 부여의 국력이 강력하다고 할 만한 모습이 보이는데 AD49년에 부여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자 후한의 광무제가 두터이 보답하여 이후 매년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때도 부여가 여전히 왕을 칭하였고, 중국과 교섭할 정도로 성장하여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AD111년에 부여왕이 낙랑군을 공략할 만큼 국력이 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입니다.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치형태는 세습적인 국왕이 존재하며, 국왕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을 쓰고 많을 때는 100여 명이나 순장할만큼 왕권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들의 세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3세기 초 '간위거'라는 왕의 얼자인 마여의 즉위과정이 나와있는데, 이것을 보면 왕위의 세습은 적자에게 한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제가들이 합의하여 국왕을 추대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뭄이 들어서 5곡이 잘 영글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국왕에게 물어 대가들이 왕을 바꾸거나 죽이는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도 제가의 힘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구성을 보면 우선 국왕밑에 제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관리(대사자, 사자)등의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호민이 있고, 여기까지가 지배층입니다. 그리고 호민이 가장 아래 위치하는데 이들은 읍락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으로 조세와 부역을 담당하였고 전쟁이 일어나면 제가들이 인솔되어 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름 강성했던 부여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북쪽의 유목민족과 남쪽의 고구려 사이에 끼어서 압박을 받아서 중국가와 연결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했으나, 결국 3세기 선비적의 침략을 받아서 국왕이 자살하고, 다시 국왕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의 비운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약해진 부여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국맥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결국 494년 고구려에게 항복하여 멸망하게 되고, 일설에 의하면 북부여지방에 두모루국이 세워져 그를 계승하였다가 8세기에 멸망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대충 이정돈데.... 뭐 너무 교과서(??)적인 얘기만 한 거 같긴 하지만... 이게 역사학계에서 보는 통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