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문가 해주 정씨 정운희, 아내 영전에 올린 제문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오호라! 생각건대 당신 평생 23년 동안 나를 도운 것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깍듯한 효도와 공경, 그리고 삼가는 말과 행동이며 때로 서로 권면(勸勉)하여 허다하게 적중했고, 비록 도의를 가지고 절차탁마하더라도 얼마나 나를 능가했습니까? 이름만 부부이지 의(義)로는 실제 두터운 벗입니다."
조선 중기 문신 정중휘(1631-1697)의 손자 정운희(1680-1745)가 1717년(숙종 43년) 그의 처 의령 남씨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전에 올린 제문(祭文)이다.
유교 윤리를 강조하고 근엄했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운희였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는 슬픔에 잠긴 남편일 뿐이었다. 정운희의 집안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명문가인 해주 정씨 가문. 문종의 딸이자 '비운의 왕'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1436-1473)의 시댁이기도 하다.
정운희의 부인 의령 남씨는 호조참판을 지낸 남익훈의 딸로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운희의 할아버지인 정중휘가 일찍이 이웃에 살던 의령 남씨를 손자의 배필로 낙점했으며 둘은 함께 자라 정을 나누면서 23년 동안 해로했다.
정운희는 제문에서 죽은 아내를 "두터운 벗"이라고 부르며 아내의 죽음을 가슴 아파했다. 또 "마땅히 나의 처로 삼을 사람은 다만 당신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며 새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나는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공경하고 몸을 갈고 닦아 예로써 제향(祭享)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지금 떠났으니 누구와 제사를 받들겠습니까? 배필을 잃으면 재취하는 것은 진실로 세상 정세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람한테서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마땅히 나의 처로 삼을 사람은 다만 당신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명으로 나의 내조를 삼았는데 어떻게 부인을 바꿔서 우리 선배의 제사를 받들겠습니까?"
그러면서 "오늘 이후로 집안의 화락함도 없을 것이고 또 이 세상에서의 남은 삶도 슬프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라며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수환 선임연구원은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제문인데 내용이 가슴 찡하다"면서 "조선 시대 남녀관계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상보(相補)적인 관계였다"고 말했다.
해주 정씨 집안의 정미수(1455-1512)는 나이 60세가 넘고 몸이 불편해지자 부인에게 재산 관리는 물론 평소 자신의 시중을 들던 기녀와 기녀의 자녀를 돌봐달라는 당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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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간 해로한 부인을 잃고 어찌 새장가를 가겠소?"
- "23년간 해로한 부인을 잃고 어찌 새장가를 가겠소?"
- (서울=연합뉴스) 조선 중기 문신 정중휘의 손자 정운희가 1717년 그의 처 의령남씨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올린 제문. 2012.12.26 << 문화부 기사 참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email protected]
조선 전기만 해도 부부간에 재산을 별도로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도 나왔다.
정충경(?-1443)의 부인 여흥민이 1450년(세종 32년) 작은딸에게 노비를 나눠 주면서 작성한 문서 '춘성부부인 별급문기'에 따르면 여흥민은 남편이 남긴 재산은 가옹변(家翁邊), 자신의 재산은 의변(矣邊)으로 구분해 기재했다.
정운희는 제문에 쓴 것처럼 새장가를 가지 않았을까.
정 연구원은 "정운희는 제문에 '일처종사'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재혼했다"고 소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해주 정씨 집안의 고문서를 모아 '충(忠)을 다하고 덕(德)을 쌓다'를 펴냈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2/12/26/0901000000AKR2012122605990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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