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와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5348) 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훑어 보다보니,
한음 이덕형은 공신 삭제를 주청한 본인의 상소문도 있네요......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선무공신 2등 이구요.... 의병장들 대부분은 안보이더군요.....
공신녹훈에 관해 그때 당시에도 여러 논란이 많았던 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