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베란다의 동백나무 화분에 빠알간 동백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이제 겨울이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원래 얼마 전에 다녀온 시드니 북쪽의 혼스비(Hornsby)에 위치한, 리스가 동백꽃 정원 (Lisgar Gardens)을 소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동백이라면 聯想(연상)되는 베르디의 가극 La Traviata였다. 그래서 오늘은, 이 가극의 우리말 제목인 椿姬(춘희)라는 말이 우리의 생활 속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은, 나라의 망신이며, 우리 말에 대한 심각한 모독행위라는 나의 주장을 피력 하려고 한다. 나의 은거한담(隱居閒談)의 원칙에는 위반되는 激談(격담)이 되고 말겠지만 꼭 한 마디 해야할 것 같다. 나는 베르디의 가극 La Traviata를 아주 좋아한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알게 모르게 이 음악에 접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가 대학 입시준비를 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시골 집 온돌방의 낮은 책상 옆 등잔불 근처에 놓아두었던, 광석 라디오에 연결한, 공책 겉장의 두꺼운 종이를 말아서 만든 스피커를 통해 들은, 아리아나 합창곡이 었을 것이다. 하기는 대학교 시절 기숙사에도 몇 장의 클래식 레코드가 있긴 했지만, 나의 대학생활이란 매일 먹을 걸이를 벌기 위한 투쟁의 나날이었으므로, 음악이나 영화 등의 문화적인 생활을 즐기는 여유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런 가극, 교향곡, 협주곡 등 클래식 음악이나 영화 등에 접하게 된 것은, 시드니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뒤의 일이다. 따라서 내가 이곳에서 새로 배우게 된 것들이 한국어로는 어떻게 불리는지 별로 잘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성도 그리 느끼지 않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이 블로그를 시작해서 한글로 다시 글을 써보기 시작하면서, 이런 가극의 이름들을 새롭게 우리말로는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베르디의 가극, La Traviata의 한국어 이름이 되어버린 춘희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동백 아가씨"란 의미의 100퍼센트 일본말의 椿姬(츠바키 히메)의 우리말 식 발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것은 일본 말을 소화할 생각도 없이, 완전히 눈감고 통째로 삼킨 뒤, 우리말이라고 뱉어 낸, 단지 두 개의 아무 뜻도 없는 음절(Two Syllables)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르디는, 알렉산드르 듀마(Alexandre Dumas)의 소설 La Dame aux Camélias (동백 여인, 동백 부인, 동백 아가씨)를 정부의 검열에 걸리지 않게 각색된 내용을 가극으로 만들어 "길 잃은 여인", "흩트러 진 여인" 등의 뜻을 가진 La Traviata란 제목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듀마의 원작 소설에는 주인공 (가극에서는 Violetta)이 사람들 앞에 나갈 때는 항상 동백꽃을 한 다발 손에 들거나 가슴에 동백꽃을 꼽았다고 한다. 이 가극을 받아들일 때, 일본 사람들은 베르디의 가극 이름 대신, 듀마의 원작 소설의 제목을 따서 “동백 아가씨”라고 불렀던 것같다. 그런데 椿이라는 글자는 일본어에서는 つばき(츠바키), 즉 동백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글자는 우리나라 말에서는 참죽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지만, 보통 이름에 돌림 자를 맞추기 위해 쓰는 글자이고, 일반적으로는 전혀 쓰임새가 없는 글자라고 생각한다. 굳이 한자의 뜻을 새긴다고 해도 참죽나무 꽃 아가씨가, 이 가극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건 지금은 멀리 이국에서 사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놀랍도록 챙피한 일이다.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된지 벌써 64년이나 되었다. 이러한 우리말로는 무의미한, 굴욕적 식민지 시대의 유물이 아직도 뻔뻔하게 공용되고 있다니, 그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특히 내가 한국을 떠나서 살아온 지난 30여 년 간, 한국에서는 과거청산이니 잔존 일본문화 박멸 등의 명목으로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였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맛도 뜻도 모르고 통째로 삼켜버린 일본문화의 잔재가, 전혀 소화되지 않고 우리들의 뱃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으니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수치스런 일이다. 90년대 초반이었던가? 어쩌다 출장길에 잠시 서울에 들렀을 때, 나는 세종로에 우아하게 서있던 건물, 중앙청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을 목격하고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허무감이 압도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다니게 된 직장이 바로 효자동에 있어서, 중앙청 앞을 거의 매일 지나다녔고, 1973년 군에서 제대해서 돌아간 곳이 그 직장이었고, 다음해 호주에 오기 위한 여권 및 출국관계 서류를 들고 그곳 중앙청에 한 두 번 드나든 적이있다. 나에게는, 이 중앙청 건물은 일본의 현재의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훨씬 잘 된 건물로서, 일본강점기의 殘在(잔재)라기 보다는, 인류의 유산으로 보전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 것은 20세기에 우리나라에 세워졌던 가장 훌륭한 건축물 중의 하나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헐어버림 으로써, 우리는 역사에서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삭제라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겪은 타이완, 싱가포르, 인도, 폴란드 등 수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우리나라 사람들 보다 자존심도 없고 후진 문명의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의 식민지 시대의 건물을 아직도 보존하는 것일까? 그뿐이 아니다. 내가 국민학교엘 다니던 시절엔, 국민이면 모두 다녀야 할 의무교육을 수행하는 곳이라서 국민학교라고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들를 때나 한국의 문건을 볼 때 나타나는, 초등학교라는 단어가 무언지 모르게 눈에도 거슬리고 귀에도 거슬리는 건 나뿐일까? 아무래도 억지로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는 얕은 수단이지 않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학교라 하기엔 지금의 일본을 따라가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을 것도 같은 생각이 들어, 더욱 께름찍하다. 그냥 놔 두었어도 국가 위신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지 않았을까. 이런 무의미한 변화를 국시로 생각하던 이들이 춘희는 그대로 남겨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볼 만한 과제이다. 이렇게 겉 핥 기의 과거청산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동백 아가씨를 춘희라 부르며 부끄러운 줄 모르니 정말 한심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제 생각해 볼 때 더욱 아이러니칼 한 것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왜색 가요라고, 정부 당국으로부터 금지 당하는 동안에도, La Traviata는 춘희라는 당당한 왜색 이름으로, 당시 돈 있고 권력 있던 사람들의 문화의 전당에서 몇 번이나 공연되었을까? 당시의 문화계의 지도자들이나 정부 고관들 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얼굴을 붉혀야 할 일일 것 같다. 그것 뿐 아니다, 듀마의 원작 La Dame aux Camélias (동백 여인, 동백 부인, 동백 아가씨)에서 나온 번역 소설, 뮤지컬, 그리고 심지어는 이 소설에 직접, 간접으로 연계된 Camille이라는 영화제목까지 모두가 우리 나라에선 지금도 빠짐없이 "춘희"라는 제목을 계속 붙여주고 있는 것 같으니, 정말 멀리서라도 맨주먹으로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문화인들이여,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들을 “춘희”라고 부르지 말고 적어도 “동백 아가씨”라고 라도 불러주었으면 한다. 정말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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