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처럼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누가 시끄럽게 떠들더라. 팀플 하는 아무개가 무임승차해서 완전 화가 난다.' 페이스북을 보면 이런 ‘분노글’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이나 올라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진정으로 분노해야할 일에 분노하고 있나요?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과세기반 확대 방안으로 고물상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합니다. 고물상의 부담은 한 달에 30~40만원 버는 폐지 수집하는 노인 분들에게로 전가됩니다. 한편에서는 부자감세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는 모순적입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스물 네 분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분들을 추모하는 분향소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색하게 공권력에 짓밟혔고, 그 위에 화단이 세워졌습니다. 피를 먹고 자란 꽃이 과연 아름다울까요?
밀양에서는 어르신들이 ‘여기가 바로 내 묏자리’라고 하시면서 ‘사람 죽이는 송전탑’ 건설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계십니다. “이제는 송전탑이 우리 마을 피해 딴 데로 간다케도 싫다”고 하시던 유한숙 어르신께서는 농약을 마시고 자결하셨습니다. 대통령은 적조 피해로 물고기가 죽은 통영시의 어민들을 방문해 위로했지만 사람이 죽고 있는 밀양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조차 없습니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 ‘나라 먹여 살리는 기업’ 삼성은 ‘노동자 죽이는 기업’이었습니다. 수많은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안전장비도 없이 유해한 화학약품을 다루다가 생긴 직업병으로 죽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삼성은 피해자-정부 소송에 직접 참가해 자기 직원이 산재로 보상 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의 노동자는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자살을 택했고, 열사의 아내 분은 폭설을 맞으며 삼성의 사과를 바라셨지만 그 누구도 이분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SNS에서 주위의 ‘분노글’들을 보면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분노는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온’ 것으로만 향할까요. 우리의 ‘분노의 감수성은 왜 점점 영토를 잃어만 갈까요. 우리의 분노가 필요한 일들이 너무도 많은데 왜 우리의 분노는 모두 ‘옹졸한 욕’이 되어갈까요.
너무 각박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밖을 상상하면 ‘종북’이 되고, 기득권에 조금만 밉보여도 생활길이 막힙니다. ‘시험, 입시, 취업, 결혼’ 점점 힘에 부치기만 하는데, 이것들을 해내지 못하면 ‘잉여’, ‘낙오자’라고 손가락질 당합니다. 기득권과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억압 받고,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현실에 대충 맞춰 살아가는 게 ‘지혜로워’보이기도 합니다.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에 계란을 치렵니다. ‘깨끗해보이던’ 바위가 수많은 계란으로 더러워지면 ‘이 바위에 뭔가 문제가 있나?’ 생각하는 분들이 하나 둘 늘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실패는 두렵지만 실패 그 뒤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렵니다. 동시대를 공유하며 이 공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서울 어느 곳에서 불어온 나비의 날개짓을 태풍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