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처럼 막 피겨의 재미를 알게 된 사람에게
김연아는 최고이자 완벽한 가이드입니다.
기술 같은 거 잘 몰라도
아, 피겨란 게 이렇게 멋지구나, 아름다구나
김연아 선수를 보면 그건 알 수 있습니다.
저를 완전히 감동시켰던
올 3월의 월드 챔피언십에서
제 등에 소름이 확 끼치던 장면이 있습니다.
둘 다 손 동작이었는데요,
하나는 가볍게 뭔가를 잡아당기는 듯한 동작이었습니다.
어디론가 사라지려는 희망을 붙잡는 듯한 아련함이 느껴졌죠.
다른 하나는 닫혔던 문을 가볍게 여는 듯한 동작이었습니다.
절망의 밤이 지나고 동트는 새벽빛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 같았습니다.
레미제라블, 그러니까 장발장이니 코제트니 하는 건 어릴 적 세계 명작으로 읽었던 기억밖에 없고
영화는 예고편 잠깐 구경한 게 전부였는데,
연아 선수의 손짓을 보니까 막 소설의 장면들이 막 떠오르는 겁니다.
동작 자체에 메시지를 담지는 못했지만
세헤라자데의 팔 사용도 정말 대단했죠.
거쉰 때도 그랬지만 물결처럼 흐르는 팔의 움직임으로
음악을 보여줍니다.
세헤라자데에선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여성 조각상의 팔 모양을 완벽하게 재현했어요.
부드러운 호를 그리거나, 강렬하게 돌리며 원을 그리거나
그 모든 것들이 황홀하게 조각된 불상 그 자체였지요.
세헤라자데의 배경은 아라비아-페르시아이지만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인도-동남아의 조각상을 선택한 건 정말 탁월했다고 봐요.
그것 말고 <피버>도 사람 잡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복잡한 기술적 요소가 거의 빠졌지만
김연아가 한 번 작심하고 표현을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변변한 점프 하나 없는데 격렬한 허리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브먼트 전체가
'얘야, 관능적인 여자가 궁금하니? 보여줄까?' 하는 것 같았어요.
사춘기 때 이거 봤다면 정말 대형 사고 쳤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
물론 이 모든 건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만큼
스스로를 갈고 닦았기 때문이겠죠.
언제 미끄러지고 넘어질지 모르는 판에
손 동작, 팔 동작을 저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겐,
심지어 보통 선수들에게조차
뭔가를 표현하는 데 장애가 되는 빙판이
김연아 선수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