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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는 이미지의 정치
게시물ID : sisa_4616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데
추천 : 6
조회수 : 61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14 02:31:24
<대한민국 정치는 이미지 정치다>
-개념사를 통해 바라본 한국 정치의 현주소-


 본디 민주주의(democracy)란 국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 권력을 형성하여 대표를 뽑는 공화정의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말은 익히 잘 알려져있듯이, 그리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디 민중(demos)와 정치(Kratia)가 합쳐진 것이다. 이 민주주의 국가를 가르키는 말인 공화정(Republic)은 라틴어의 '인민의 것'(Res publica)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당대, 즉 고대에 쓰여졌을 때에는 오늘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 함은 아테네 시민권을 지닌 재산을 지닌 그리스적 의미에서 '시민'들에 한하고, 여성과 외국인 노예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또 로마에서의 '인민의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모두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 의미의 '시민'인 로마 지도계층이 향유하는 체제를 빗댄 말이었으며 '민주주의' 자체는 멋모르는 평민들이 참여하는 뒤떨어진 정치체제로 보았고 로마 지배층은 로마 공화국은 절대로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못박았다. 오히려 왕정과 과두정과 민주정으로 구성되는 제 4의 정부형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현대의 개념과 당대의 개념은 다르듯이, 동시대의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단어로,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다른 문화적 배경, 사회적 배경, 경제적 배경, 등등에서 파생되는 의미들로 짜여진 의미의 그물망(network of meaning)에 의해서 인식되고, 분석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구성된 기존의 담론들에 의해서 배척되거나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본래 단어의 개념이라는 것은 해당 문화권에 축적된 의미를 통해 분석되고 이해된다. 예를들어 위에서 예를 든 고대의 '민주주의' 개념은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당대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들 개념이 낯선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가진 의미구조(network of meaning)의 배경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과 같이 한반도에는 서유럽과 다른 문화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당연히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들어왔지만 그것이 기존에 내포하는 함의까지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는 서구의 민주주의와는 또 다른 개념을 내포하는 다른 의미의 '민주주의'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당대의 시대 상황을 비롯하여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다방면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러한 개념을 통해 담론이 구성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와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상과 문화가 축적되어 있었기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의미구조를 통해 재구성되고 또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새로운 개념을 담은 단어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로 구성된 또다른 정치 담론이 생겨나게 된다.

 실제로, '우리식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박대통령의 민주주의 개념은 서구의 민주주의와는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합리적'으로 당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지금도 쓰이고 있을만큼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말인 즉슨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내제된 의미 구조에 부합하는 식으로 개념이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서구적 민주주의 정착에 애를 먹고 있는 이유가 이런 것에 있다. 즉, 서구의 민주주의 담론이 내포하는 의미의 장을 우리네 문화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래 한반도 땅에 내려오던 정치적 담론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첫째로, 불교의 정치 담론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교란 산에 있는 암자의 이미지로 연상될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가진 '단어'가 가진 '개념'을 파악하는 문화적 배경이다. 그러나 당대인에게, 고려나 통일 신라시대의 불교는 현실의 종교였고 나라의 종교였으며 집권 세력과 종교의 결탁은 당연하기보다 오히려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불교의 담론으로는 왕은 '전륜성왕'으로써 이 땅에서 부처의 법으로써 지배하며 세계를 아우르는 존재로 인식했으며 절은 시내에 곳곳에서 부처(혹은 미륵신앙)의 힘을 통해 나라의 부흥을 기원하는 행사(팔만 대장경도 한 예다.)를 지내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에 초연한 불교는 조선시대 이후에 형성된 개념이며 오히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나라'는 '부처의 나라'로 인식되었고, '왕'은 무력이 아닌 부처의 법으로써 나라를 이끄는, 즉 부처의 법을 실현시키는 평민들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시켰다. 

 둘째, 유교의 정치 담론이 있다. 유교는 상고(上古)사상을 기반으로 하는데, 과거에는 '인'과 '의'가 유지되어 사람들이 평화롭게 대동사회를 이루며 살았지만, 당대에 이르러선 '인'과 '의'를 잃고 아래위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이름에 맞는 역활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 개요이다. 이는 유교가 정명(正名)사상이라고 불릴만큼 그 골자를 이루는 담론으로 '인간'에 대한 분석보다는 '사회 체제'와 '사회'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 서구가 개인주의고 동구가 공동체적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유교의 사상은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체제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 최적화 되어있었기에 후대 동아시아 위정자들은 유교를 활용하여 백성이 스스로 그 자리에 대해 합리화하고 그것을 도덕 규범화하여 체제에 대한 반대를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규정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 하였다.
 
 셋째로, 성리학 정치 담론이 있다. 성리학은 성선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고 4단(네가지 단서)를 통해 인을 확충해나가며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이는 '도덕성'은 타고나는 본연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유교에서의 도덕 규범은 오로지 규범에 불과했다면, 성리학에서 도덕 규범은 하늘이 내려준 인간의 타고나는 본성이 드러난 것으로 절대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처럼 절대화된 유교의 규범은 정치 담론에 있어서 왕의 중앙 집권화에 도움이 된다. 왕은 왕대로, 신하는 신하대로라는 '규범'이 어겨선 안될 '천리(天理)'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이러한 개념을 확립하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또 이러한 성리학적 담론에서 국가라는 공동체는 천리를 구현하는 왕도 정치의 세계였고, 이 밖의 세계는 '인간의 본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야만, 즉 오랑캐의 것으로 배척하게 되는 소중화 개념으로 발전한다.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 개념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외국과는 다른 형태로 재구성되며, 우리에게 이해되는, 우리에게만 이해되는 식으로 새롭게 읽히고 쓰이고 있다. 전통적 정치 담론이 여전히 실존하여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의 힘을 그람시는 헤게모니(Hegemony)라고 규정한다. 우리의 정치 담론에 있어서 헤게모니는 우리나라의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란 부처의 도를 실현하는 장소로, 이상적인 것을 의미하여 배반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고 국가가 곧 왕이라는 도식에 의해서 국가가 곧 정부라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또 유교의 정명사상과 그것이 절대화된 성리학 담론에 의해서 인간 평등 사상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최선으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말인 즉슨 사회 지배층은 '구름 위의 존재'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일반 시민들에게 "평등"은, 사회 지배층도, 일반 시민도 "평등하게" "각자의 일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또 우리의 공동체는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지며 흔히 '이상적인 의미'을 함의한다. 즉 군대의 경우에 있어서 '군대를 가지 않는 것은 나라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면서 군대에 가서 복무하는 것이 '인간으로써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고  그에 대한 보상에도 인색하게 된다. 하물며 보상이 논의한다 할 지라도 어느정도 마음속에 도덕적 가책을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유교와 성리학적 담론이 결합된 "절대적인 하늘의 도"가 실현되고 있는 공동체인 국가에 대한 반대는 오랑캐적인, 현대의 단어로는 '빨갱이'같은 것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적 지도자들에게도 '완전 무결'한 도덕성을 요구하곤 한다.(티끌만한 티라도 있을 수 없다.) 마치 불교의 도를 행하는 전륜성왕과, '성인'의 도를 갈고 닦은, '본디 지고한' 유교의 왕도처럼 지도자들에게는 추상적인 '리더쉽'과 '카리스마'의 위광과 더불어 도덕적인 완벽함도 요구된다. 당연하다. 천리를 행하고 있는 국가의 지도자는 일체의 부정을 저지를 '수' 조차 없어야 한다. 흔히 자신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은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박근혜부터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떠한 정치인도 결백한 성인 군자일 리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기도 하거니와, 모든 국민의 수준이 성인 군자에 근접하지 않으면 그러한 인물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머릿속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헤게모니에 지배되고 있으며,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헤게모니에 지배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반대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언제든지 정부라는 것은 국민의 합인 국가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다원주의에 입각한 다른 사상을 포용하는 서구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정치 담론은 위정자들에 의해서 규정되어 도덕 규범이 되어서 헤게모니로써 피지배자인 민들에게 주입되었으며, 이것이 현대에 까지 답습되고 있는 정치적 구조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위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들어서는 데 있어서 민중 운동이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4.19나 5.16은 민국이 성립한 이후의 일이므로 제외한다) 일제의 강점이 없었다면 향후  조선 왕조의 장기집권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이나 근대의 들끓는 역사를 거치면서 위에서부터 이미 규정된 '민주주의'가 도입되었고 대한'민'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의 선글라스를 통해 정치를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에게 위에서 내려온 재정의된 '민주주의'는 또다시 민중 문화의 헤게모니(유교적, 불교적, 토속 도덕 관념 등이 융합된 것) 속에서 또다른 의미로 재구성되고 정의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정치는 제시되는 '이미지'를 내세우게 된다. 모두가 공감하는 문화적 배경에, 소위 말하는 국민 정서에 걸맞는 이미지를 제시해야 헤게모니에 들어맞게되어 정권을 획득하고 이 헤게모니를 집권 세력의 헤게모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미지는 과거와는 세월이 지난 만큼 다르게 변하였고, 건국 당시 만큼 전통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로 작용하는 점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큰 틀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에, 여전히 현대의 정치 담론이 과거 개념들도 포함되어 형성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제시되는 이미지이다. 예를들어, 현재 화두가 되고 있는 종북 몰이에 담긴 이미지는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종북'이 내재하고 있는 개념의 '자동적인 분석'(우리는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모든 분석이 끝나있다)이 잇따른다. 1960년대부터 줄창 주입되어 당연한 구조로 굳혀진 빨갱이는 나쁘다는 구조가 확장 적용되어 '북한을 따르는' 놈들은 '빨갱이'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도식으로 변하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일원이 아닌 외부의 적(오랑캐)로 인식하게 된다. 흔히 극우주의자들이 진보진영 인사에게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지는 극우주의자들의 논지로,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내국민을 '외부의 오랑캐'로 인식하게 되는 논리를 전개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야 한다.(ex. '독일인'이었던 '유대인'들을 박해한 나치)

 이렇듯 대한민국의 정치는 이미지 정치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담론에서,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술자리나 토론, 친구들과의 대담 등에서 민주당의 정략이나, 새누리당의 정략에 대해서 논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거론되는 것은 그러한 정책 등을 내포하고 사상이 가진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후보나 인물에게 집약되어서 그 인물의 이미지로써 대변되고 있다. 오유에서도 다를 바는 없다. 노무현으로 집중되는 이미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층이 있다. 그의 사진 한 장으로 자신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지화되어 정립되는 것이다. 박정희와 같은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가 내포하는 이미지는 '근대화'와 '경제력'이다.'독재'의 이미지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하위 의미에 속한다. '독재'는 '경제력'과 '근대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되고 절대화된 이러한 개념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느끼는 만큼 실제로 박정희가 했던 일과는 상관없이, 그의 이미지가 가진 함의만이 작용하여 그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낳는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이미지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빼먹을 수 없다. 또한 대중을 대상으로하는 정치 구조에서 이미지 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위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대한민국의 이미지 정치는 이미지가 내표한 함의가 이미지와 하나가 되어 절대화되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이렇게 절대화된 이미지는 의식적 도식으로써 정치적 공식으로 사용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결 문제, '좌파'라는 말이 가지는 이미지의 부정성, '애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식, 산업화와 민주주의, 등등... 어느 세력이건 사상을 내포하는 이미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절대화된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세력에 대한 적개심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오랑캐'는 아니다. 모두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있지 않은가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 성립을 위해서는 비단 절대화된 하나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한 함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미지를 제쳐두고서라도 정책이나 당이 내세우는 정책은 무엇인가에 대한 시민 개개인의 고찰이 필요하다. 서구에서 들여온 민주주의가 어떠한 함의를 가지는 지를 스스로 분석하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려는 노력 없이는 꿈꾸는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는 오유인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대들의 정치는 이미지 정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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