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 프로야구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최종 5차전에서는 믿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졌다. 당시 텍사스는 토론토와 6회까지 2-2의 치열한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7회 들어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먼저 7회초 공격에서 텍사스는 2사 3루 추신수 타석에서 행운의 득점을 올렸다. 토론토 포수 러셀 마틴이 공을 투수에게 던져주는 과정에서 공이 타석에 있던 추신수의 손등에 맞아 굴절됐고 이틈에 3루 주자가 득점에 성공했던 것이다.
심판들은 오랜 논의 끝에 텍사스의 득점을 선언했다. 토론토 측이 볼데드를 주장하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경기 후반부 토론토의 어이없는 실수로 텍사스가 승기를 잡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7회말에 펼쳐졌다. 7회말 텍사스 선발투수였던 콜 헤멀스는 선두타자를 평범한 유격수 땅볼로 유도했다. 그러나 엔드러스가 에러를 기록하며 출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헤멀스는 다음 타자를 더블플레이를 할 수 있는 1루 땅볼로 유도했으나 1루수 모어랜드의 악송구가 나오면서 주자와 타자가 모두 살게 됐다. 이어진 고인스의 희생번트에서는 수비의 귀재인 벨트레까지 에러를 범하며 무사 만루의 위기에 처해졌다.
당황한 텍사스 선수들은 이후 자멸했다. 평범한 뜬공도 처리하지 못하며 허둥지둥 실수를 연발한 끝에 바티스타에게 3점 홈런을 맞고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히 텍사스에게도 승리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과 기회를 승리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추신수 선수의 디비전시리즈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필리버스터 이후, 더민주의 잇따른 실책 |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6일 오후 국회의사당앞에서 열린 총선로고송 '더더더' 뮤직비디오 촬영에 참여한 뒤 현안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 권우성 |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필리버스터 중단부터 시작해서 컷오프 작업이 마무리된 14일에 이르기까지 지난 10여 일 동안 더불어민주당(아래 더민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던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민주의 모습은 잇따른 실책으로 자멸했던 지난해 디비전시리즈 텍사스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변치않는 지역정서, 이념 및 계층 갈등, 정치불신에 따른 낮은 투표율, 언론의 편향성, 관권선거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가운데 극심한 계파 갈등과 내홍사태마저 겪고 있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총선 전망은 암울한 상태였다. 안철수의 탈당에 이은 주류와 비주류의 치열한 패권싸움이 분당으로 치닫는 장면에서 절망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당명 개정과 함께 문재인 전 대표의 감동있는 인재영입이 이어지며 더민주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 전 대표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당을 수습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10만이 넘는 온라인 당원이 모집되었고 곤두박질치던 지지율도 마침내 반등에 성공했다. 국민의당의 창당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 전 대표에 이어 전권을 잡은 김종인 대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당을 연착륙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필리버스터 정국 이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전략적 판단을 잇따라 내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우뚝 서고 있다. 필리버스터를 용두사미로 허무하게 끝내더니 느닷없이 국민의당과의 통합 제의로 다시 한번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가 하면, 급기야 받아들이기 힘든 컷오프 결과로 당원들과 지지자들을 '멘붕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흐름들을 선의로 생각하자면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김종인 대표의 육참골단(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정의 문제는 곧 결과의 문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상기해 본다면, 아무리 선의로 생각한다 한들 그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다.
김종인 대표가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삼연타'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에 중도보수층을 끌어안기 위한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킨 것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던 국민의당과의 통합을 제의한 것도, 정청래·강동원·김현·이해찬을 컷오프시킨 것도 모두 중도보수층을 겨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종인의 독단과 독선 |
▲ 총선 필승 외치는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제20대 총선을 30일 앞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열린 비대위원회의에서 김종인 비대위 대표를 비롯한 비대위원들이 총선 필승을 다짐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 유성호 | |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전략으로는 더민주가 총선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이 전략의 오류는 더민주의 전신이었던 새정치연합의 실패로 명확하게 입증이 됐다. 무당파와 중도보수층을 겨냥한 외연확대가 오히려 당원들과 전통적인 지지층마저 외면하게 만들었을 뿐 그 어떠한 실효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누리 2중대'라는 굴욕적인 조롱이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환기해 보라.
김종인 대표의 오판은 '총선은 해보나 마나한 게임'이라던 비관적 상황이 어떻게 반전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살펴본 것처럼 더민주의 전통적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성원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에 투영되어 있던 무능하고 무기력한 낡은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더민주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참신한 인재를 영입해 시민들의 공감을 얻는 한편, 정부여당의 일방적 국정운영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시민들과 함께 하는 정치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김종인 대표는 독단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다.
조중동이 설계하고 더민주 안팎의 비주류들이 전파시키고 있는 친노패권 타파에 집착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친노 패권을 없애기 위해 김종인 대표는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패권을 죽이기 위해 패권을 사용한 것이다. 민주적 과정과 절차가 사라진 김종인 대표의 권위주의적 독선과 오만에 동의할 당원과 지지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연달아 계속되는 논란들로 급기야 더민주의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반발하는 의원들이 속출하고 있는가 하면, 컷오프에 반발해 탈당하는 의원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당원들과 지지자들도 김종인 대표를 맹렬히 성토하며 지도부를 압박하고 나섰고 일반 시민들 역시 더민주의 내부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불과 10여일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도대체 더민주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신들에게 찾아온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던 텍사스처럼 더민주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모양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대로 간다면 야권의 총선 패배는 기정사실이라는 점이다. 야권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김종인 대표와 더민주 지도부의 오판이 그 중심에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