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영, 비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김재진, 새벽에 용서를
그대에게 보낸 말들이
그대를 다치게 했음을
그대에게 보낸 침묵이
서로를 문 닫게 했음을
내 안의 숨죽인 그 힘든 세월이
한 번도 그대를 어루만지지 못했음을
나희덕, 반통의 물
대체 기억이란 얼마나 되새겨야 흙으로 돌아가며
상처란 얼마나 고개 숙여야 순해지는 것일까
최승자, 기억하는가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황경신, 그때가 가장 슬프다
뭔가가 시작되고 뭔가가 끝난다
시작은 대체로 알겠는데 끝은 대체로 모른다
끝났구나, 했는데 또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아니구나, 했는데 그게 끝일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 그게 정말 끝이었구나 알게 될 때도 있다
그때가 가장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