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소공위의 휴회는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면서, 중도파 세력들은 좌,우대립이 계속되고, 이대로 가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북은 결국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여운형,김규식,안재홍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는 김규식을 선출하게 된다. 당시 미군정은 반소반공적인 이승만과 김구 등을 배제하고 우익과 좌익의 온건파로 하여금 합작을 하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 중도파 정치인을 지원했다. 좌우합작은 중도우파인 김규식과 중도좌파인 여운형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으며 1차 회담에서 좌파 쪽에서 좌우합작5원칙을 내놓았지만 신탁통치문제와 토지문제 그리고 친일파문제에 대해서 좌우양측이 합의를 찾지 못했고 그사이 좌익3당 합당추진 9월 파업, 대구 경북지역 10월 민중 항쟁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지만 합작의 노력은 계속 되었고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이 절충하여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였다. 47년에 접어들면서 2차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 좌파의 주석인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이후 미국이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자국 지지 세력이 절대 우세한 유엔으로 가져감으로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고 단독 정부 수립 안이 확정되었다.
좌우합작7원칙
1.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2,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 발표
3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 중요산업의 국유화, 지방자치제 확립
4친일파 처리법안 마련
5정치운동자 석방과 남북 좌우의 테러행동 제지
6입법기구에 대한 대안마련과 적극적 실행
7언론집회결사출판 교통 투표의 자유보장
정읍발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이는 이승만의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9월총파업
9월 총파업은 46년 9월 13일 미군정의 운수 노동자 감원과 월급 삭감에 반발하여 3,000여명의 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을 시작으로 일어난 전국적인 파업이었다. 이러한 파업은 좌파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확산됨으로써 9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파업의 배경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과 남노당의 정치적 행동전략이었다. 이러한 파업에 대해서 미군정 당국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러한 파업이 폭동화 할 조짐을 보이자 이들을 검거하였다. 이 파업을 통하여 전평은 조직이 매우 약화된 반면, 우익계 노동조합인 대한노총은 파업의 진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결국 대한노총 소속원과 군정청 운수부 당국자 사이에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9월 총파업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파업은 10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0월 항쟁
10월 항쟁은 10월 대구 폭동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0월 항쟁은 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경찰과 시민들 간의 충돌로 시작된 대규모 유혈사건이다. 10월 1일 대중시위에 밀린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1명이 사망함으로써 평화적 시위는 폭력화 되어 경찰서 습격 등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는 경상북도의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각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게 폭동형태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남노당이 통일적인 통제를 제대로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시위는 46년말 진압되기 전까지 폭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0월 항쟁의 의의는 일제가 패망한 뒤 일제하에서 구조화 된 모습이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재건되는데 대한 항쟁이었다. 그것은 일제지배의 잔재였던 관료체제 및 경찰이 그 공격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북협상
내용 한반도 문제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연합으로 넘어가게 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여운형의 서거 후 민중동맹·신진당·사회민주당 등 중도파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김구는 반탁투쟁에서 손을 잡았던 이승만과 결별하며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며 김규식과 함께 노선을 같이했다. 1948년 1월 26일, 27일 양일간 UN한국임시위원단과 김구·김규식·이승만 사이에 열린 회담자리에서, 김구는 '미·소 양군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에 의한 정부 수립'의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 2월 4일에는 북쪽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2월 10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인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한 후 3월 8일, 또다시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이에 김일성은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은 사실상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해놓고 있던 상태였다. 이에 4월 19일부터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연석회의가 열렸다. 열린 연석회의에는 남북의 69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을 통틀어 좌·우익세력 대부분을 망라한 것이었다.
연석회의가 끝난 4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는 15인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한편 이와 함께 김구와 김규식의 요청으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 김규식과 김일성의 양김회담도 열렸다. 그리하여 4월 30일,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공동성명서에는 1. 외국군의 즉시 철군, 2. 외국군의 철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의 확인, 3. 전조선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총선으로 입법기관 탄생→헌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의 4단계 통일정부 구성안 4. 남조선 단독선거 절대 반대 등의 4개 항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2항과 3항은 북조선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승만
5·10선거
UN총회에서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남한 단독선거과 유엔에서 통과 되어 48.5.10 선거가 치러졌다. 5 10 선거의 선거권은 만 21세에 달하는 남녀 모두 국민에게 부여되었고,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이르는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그러나 친일행위를 한자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선거로 기록된 제헌국회 총선은 미군정에 의하여 관리·집행된 가운데 국회의원 정수 200명을 선출하였다. 제헌국회의원 투표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42.5%에 해당하는 85명이 당선되었고, 정당 및 단체별로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총의석의 27.5%인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내어 제1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선거전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한국민주당은 당 중진을 포함한 후보자들이 대거 탈락하여 총의석의 14.5% 그 뒤를 이었지만 상당수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기 실제 의석수는 이보다 많은 60-80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민당이 선거결과에서 참패하는데 이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