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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제국(Evil Empire) : 숙명 #Chapte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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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achthexen
추천 : 0
조회수 : 4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06 01:01:33
Chapter 6 


크루이드 왕국의 궁전. 데키몬드 국왕을 따르는 수많은 가신들이 그와 그의 일행들을 우려하며 궁전 내부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 겉으로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 속으론 모두가 영생을 찾으러 떠난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 문득 궁금해졌던 것이다. 예컨대 사 일이 넘도록 국왕과 관련된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도리어 그는 영생은커녕 미지의 세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을 가능성이 꽤나 컸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왕국에는 거대한 변혁의 물결이 지배권 전역을 덮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사악하기론 국왕 못지않게 악명이 높은 왕국의 가신들조차도 그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차라리 눈물을 흘리며 깊이 통탄할 일일지언정 반가이 여길 일은 분명 아니었다. 국왕이야말로 왕국을 지지하는 중심적인 인물인데다가 그의 후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명성 높은 가신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킬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권력 싸움에 휘말리는 순간, 왕국의 모든 것은 세계가 흘러가는 형세와도 같이 오로지 ‘강자’만을 위한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지배당하게 될 것이며 왕국의 가신들 역시도 결국은 그런 비참한 운명을 결코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연히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이익과도 직결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데키몬드 국왕에 관한 소식은 아직 없는 건가?”

“그렇소.”

“어찌 됐든, 난 시민들 앞에 서기가 조금은 두렵다네.”

“나 역시 마찬 가지오. 사실은 그들 앞에 서서 과연 무슨 얘기를 꺼낼 수 있을지 사뭇 걱정이 되는군……. 우리의 국왕이 갑작스레 실종되었다고 알리면 모두가 혼란스러워 할 것이야. 힘 있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려 내전을 일으킬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고 말일세.”

가신들의 눈빛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기다리다 마침내 사 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행방이 묘연했으니 과연 심려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봐, 뭘 그리들 걱정하는 겐가? 단언컨대, 기어이 국왕은 죽은 것이 분명하다네. 그의 비범한 능력이나 지혜로운 성향만 두고 봐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을 인물이 결코 아니란 말일세. 그게 아니라면 그의 뇌에 이식한 개인 송신기로부터 무언가 잡히는 게 있어야 할 텐데, 여태껏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지. 그러니 이렇게 침울한 기색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연회 상을 차리고 성대한 파티를 여는 게 어떻겠나? 여긴 향락과 환희의 왕국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저 마음 놓고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이야.”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어딜 가든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법. 그래서일까. 가신 중 한 명이 국왕의 행방 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가소롭기 그지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그의 운명을 은근히 비꼬았다. 카르쿠스, 그는 예컨대 주변에서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것으로 한창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모두가 선견했던 대로 그는 그렇게 여유인지 교만인지 모를 회답을 의연히 끝맺은 후, 뒤이어 옷에서 페로민 주사를 꺼내들며 메마른 살갗에 내리꽂았다.


“카르쿠스, 이 간악한 배반자 놈 같으니! 네 놈이야말로 우리 왕국의 진정한 숙적이다.”

국왕을 향해 영원한 충성의 서약을 맹세한 충성파 가신, 케이덴이 휘황찬란한 플라즈마 소드를 치켜들며 카르쿠스에게 단죄의 칼날을 겨누었다.


“그만두게. 놈은 제 정신이 아닌 듯하니. 어차피 전부터 항상 있어왔던 일이니 이젠 더 이상 발끈할 것도 없다네.”

이처럼, 왕국에는 강력한 페로민 의존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매우 흔하게 널려있었다. 또한 페로민을 육체에 투여하면 투여할수록 인간의 근본적인 정신 체계를 바꿈으로서 더 악랄한 행위도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은 육체적 변이와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간혹, 아주 간혹 외부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변이보다도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곤 했기에 아무리 쾌락을 중요시하는 그들조차도 페로민 중독만큼은 뼛속깊이 경계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우리의 국왕은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공포 군주이긴 하나, 그러한들 절제와 너그러움을 아는 현명한 군주는 아니었다네. 그렇지 않나? 내 주장이 틀리다면, 어서 그럴듯한 반론 거리라도 꺼내서 날 부디 즐겁게 해주게나. 아, 행여 그대들이 벌써부터 내빼려고 하는 건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되는군.”

페로몬의 진득한 향내에 취한 카르쿠스가 넘어야 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의 주위를 돌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한 발만 더 디디면 그의 목숨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카르쿠스, 더 이상 허튼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국왕을 대신하여 네 놈의 사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진정하게.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

모두가 급변하는 분위기에 몸 둘 바를 모르며 당혹스러워하던 가운데, 갑자기 근방의 어딘가로부터 의아쩍은 회답이 들려왔다.


“누구냐? 저 어리석은 자의 실언에 동의하는 겁 없는 자는? 두 놈 다 내 손에 처참한 몰골로 죽고 싶은 게로구나.”

“레메투스다. 한 때 그의 충직한 개였지.”

그의 이름은 레메투스. 그의 짧은 회고가 모든 것을 선명히 대변해주었다. 그는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국왕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귀중한 목숨까지도 즉시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우직한 가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네. 으흐흐…….”

레메투스는 누군가가 직접 통제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강력한 통치자의 부재는 자연스레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광기 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광기는 겉보기에 잠잠했지만 그래서 더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으흐흐……. 그는 죽은 것이 분명해. 그래서 난 더 이상 그를 따를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네. 모두들 떠올려보게. 그가 우리에게 준 것은 뭐였지? 빌어먹을 공포와 억압을 제외하면 대체 우리에게 충성의 대가로 무슨 답례를 해 주었냐는 말일세.”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계속 해보게.”

단 몇 마디의 언사로 인해 분위기는 벌써 꺼림칙할 만큼이나 싸늘해져 있었다. 케이덴은 발칙한 회답에 흥분한 나머지 레메투스에게 플라즈마 소드를 들이댔고, 이 불안한 형세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튈 지도 모르는 화(禍)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몸을 사리려 애쓸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적어도 왕국의 뒤를 책임질 후계자를 지명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나는……. 조금 더 상황을 관조했을 것이야.”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그것이 네놈의 가소로운 마지막 췌언이 될 것이다.”

플라즈마 소드는 순식간에 레메투스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다만, 소리 없는 한 줄기의 어둠이 되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막연한 힘에 의존하기보단 차라리 그를 압도하는 간계로 적을 농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처사라고 재차 가르침 받지 않았던가. 진리를 본받아 실전에 운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와 네 놈 간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네 놈의 가치는 평생을 그렇게 내 발 끝에도 못 미치며 단지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만 얼룩지게 될 게야.”

그는 어느 새인가 혼란스러워하는 가신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치명적인 무기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기엔 그의 옷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깨끗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케이덴이 휘두른 플라즈마 소드는 처음부터 그의 육신을 꿰뚫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 입 다물라!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 따위에게 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격노한 케이덴은 로브 안에 몰래 넣어두고 있던 플라즈마 피스톨을 꺼내들더니 레메투스를 향해 사정없이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의 흐름을 미리 선견하고 있었던 레메투스는 그보다도 더 빨리 데스 웨폰을 치켜들며 강력한 보호 결계를 구축했다. 결국 그의 결계에 튕겨나간 플라즈마 에너지는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빗겨감으로서 도리어 싸움과는 무관한 이들에게 애처로운 죽음을 선사할 뿐이었다.


“모두들 멈추게! 그대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들 언제까지 이렇게 절망스런 나날을 보낼 수만은 없지 않겠나? 물론, 우리의 국왕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은 애석하게 여길 일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으로선 레메투스와 카르쿠스의 의견에 조금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네. 우린 우리가 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쾌락을 향유하며 신속히 다음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논의를 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혼란에 빠진 왕국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말일세. 바라건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기보단 지금 놓인 암담한 현실을 주목하게나.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왕국을 위한 일이라네.”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가신들 중 한명이 갑작스레 그들의 격렬한 혈투를 만류하려 소리쳤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케이덴은 레메투스와의 싸움을 뒤로 미룬다는 것 자체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적어도 그의 가치관에 따르면 왕국을 위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그가 진정으로 친애하는 국왕을 위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리라.


“신속히 성대한 파티를 열라.”

가신의 칼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근위병들은 왕실의 직속 노예들을 불러 음식과 술상을 풍족히 차리게 했다. 곧, 수척하고 메마른 몰골을 띄고 있는 노예들이 왕궁에 들어왔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근위병의 지시에 따라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갓 차려진 호화로운 연회의 음식과는 달리,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어 힘들어하는 노예들이 유난히 분주하게 명을 따르는 이유는 너무나도 비참할 지경이었다.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나태한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가시가 박힌 채찍으로 두들겨 맞는 것이 예사였고 심지어 그 중에는 목숨을 잃기까지도 하는 게 그들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자유를 담장처럼 옭아매는 낡은 구속복과 차가운 냉소로 가득 찬 철제 사슬, 그리고 그들의 뇌리를 근본적으로 통제하는 핏빛 가시관까지……. 스스로의 생명을 거두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행할 수 없는 그들은 단지 죽지 못해 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신들은 그것을 딱히 개의치 않아했고 오히려 그들의 가련한 행색을 즐거워했다.


“어서 빨리 움직이란 말이다!”

“아아…….”

근위병 중 하나가 갑작스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노예 한 명을 향해 자비 없는 채찍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다 죽어가는 노예의 머리에 박힌 가시관을 순식간에 잡아챈 후, 그의 머리를 허공에 이리저리 휘젓더니 곧 흥미를 잃고서는 땅바닥에 그대로 내팽겨쳐버렸다. 그로서 ‘쿵’하는 묵직한 소리가 바닥을 울리자 주위는 다만, 속박의 굴레로부터 마침내 해방된 어떤 이의 안락한 ‘경종’ 소리만이 찬란히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놈을 조금 더 살려두었으면 했는데, 이거 아쉽게 됐군. 저 가소로운 것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기어이 즐기고 싶었거든.”

광기에 잠식된 레메투스가 굳게 닫힌 입을 열더니 이내 섬뜩한 회답을 흘기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시체 처리장에 당장 내다버려라.”

죽은 이의 창백한 시체 덩어리가 카이덴의 비위를 상하게 만든 게다. 그는 이 반인륜적인 행위에 관해서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스러운 연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이었던 탓에 그가 꺼림칙하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 쪽은 신경 끄고 모두들 자리에 앉게.”

주변을 둘러보니 그새 가신들이 명한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곧, 예정대로 성대한 규모의 잔치가 벌어졌고 그것을 즐기는 가신들의 화기애애한 모습과 그들의 잡역을 받드는 처참한 몰골의 노예들이 소름끼치도록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연회는 잔인하리만치 유쾌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술과 음식을 더 내와라!”

“크흐흐…….”

가신들의 악랄한 웃음소리가 연회장 안에 지독할 정도로 만발하였다. 모두가 불순한 쾌락을 탐닉하며 타락의 늪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본질이었기에 그 누구도 일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행색을 자세히 보아하니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희미했던 이질적인 느낌의 뿔과 포자들이 몸의 곳곳에 상당히 완연해져 있었다. 이는 필시, 타락화의 전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현상을 전부터 익히 접하여 아는 바가 많았기에 그저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며 다음 후계자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뿐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받들게 될 다음 후계자는 누구로 지명하면 좋겠는가?”

분위기는 그렇게 한창 무르익어가고 모두들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향락에 심취해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고요했던 궁전에서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총탄 발사하는 소리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선견했던 불길한 예감은 한 치의 빗나감 없이 적중하여 곧 몇 가닥의 비명 소리가 궁전 전역을 장식했다. 가신들은 문득 뜻밖의 상황에 놀라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것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그대도 방금 그 소리를 들었소?”

“물론이오. 짐작컨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오. 섣불리 밖에 나갔다간 애꿎은 목숨만 잃게 되겠지.”

궁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다. 그 만큼 견고하고 복잡한 궁전 내부를 자유롭게 헤집고 다니는 이는 고위 귀족들과 왕실 근위대를 제외하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뜻인즉, 국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이 아니라면 이 신성한 곳에서 감히 내란 따위를 꾀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아아아아악!”

그들이 서 있는 궁전의 거대한 문의 바로 뒤편에서 갓 목숨을 잃은 듯한 어느 근위병의 짧은 단말마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굳게 닫힌 문을 강제로 밀쳐내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렸으나, 괴수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혀 상황의 진전이 없자 강렬한 빛을 방출하는 금속 병기로 문의 중앙을 사정없이 내려찍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광채를 뿜어내는 그 거대한 자태를 보아하니, 그 육중한 금속 무기는 플라즈마 액스가 분명했다. 


“굉장하군. 저건 왕실 가문에서도 보기 드문 귀중한 물건일 것인데,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 의아할 따름이군…….”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죽임을 당한 게야. 그 자가 어쩌면, 다름 아닌 우리의 폐하일 가능성도 충분히 실재하고 말이지.”

그들의 말대로 플라즈마 액스는 최상위 군주들이나 사용할 법한 고급 무기였다.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위력 또한 그 권위에 비견될 정도로 파괴적이었으니 예컨대, 그 누가 보기에도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던 육중한 문 두 짝이 결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불규칙적인 균열을 일으키고 부서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반쯤 나간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상황을 관조하자, 그새 대문의 중앙은 괴수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이나 공허하게 뚫려있었다.


“거기, 근위병. 지금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네 놈의 눈엔 저 문이 맥없이 무너지고 있는 게 안 보이나?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네 놈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저 괴수에게 잡아먹힐 지도 모른단 말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흉측하게 생긴 변이 괴수가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문을 깨부수는 광경을 직접 마주하게 되자, 왕국의 으뜸가는 일급 근위병인 그들조차도 당황한 기색을 차마 숨길 순 없던 게다. 문 앞에 서기를 조금은 망설이고 있었던 그들을 향해서 가신 중 하나가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어두운 에너지를 연성해내며 섬뜩한 위협을 가하자, 그제야 지금 막 무너지려고 하는 문 두 짝을 지탱하려 다급하게 달려갔을 정도니까 말이다.


“제기랄……. 이게 대체 뭐야!”

“문이 부서진다!”

근위병이 문을 봉쇄하려고 달려갔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거대한 문 두 짝은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지다 더 이상 어떠한 조취도 취할 수 없는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앞에 있던 근위병들을 기어이 깔아뭉갤 심산인 양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비참한 죽음을 의미했다.


“우린 꼼짝 없이 죽고 말 것이야!”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나머지, 궁전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경직된 채로 그 섬뜩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혼란에 빠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또 어떤 새로운 비극이 그들의 운명을 조여 올진 아무도 몰랐다.


“내가 없는 동안 다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시답잖은 탐욕 따위나 채우며 배불리 잘 지내고 있었겠지?”

“아아……! 데키몬드 폐하!”

문 앞에 선 자는 다름 아닌 데키몬드 국왕이었다. 보다 육중하게 변한 몰골이며 이질적인 갈퀴와 뿔들이 온 몸에 돋아난 그의 형상은 사뭇 저주받은 괴수를 보는 듯한 느낌과도 같았다. 또한, 유약하고 새하얗던 그의 피부가 옅은 상처와 고름으로 뒤덮이고 불에 그슬리기라도 한 듯 검은 빛깔에 가까워 진 모습을 보아하니 그가 여정을 떠나며 겪은 고충이란 게 과연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도 조금은 헤아려볼만 했다.


“폐하, 지금 들고 계신 그건 무엇입니까?”

“아! 이거 말인가? 크흐흐…….”

데키몬드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기며 손에 한가득 쥐고 있던 희생자들의 두개골을 들어올렸다. 전투 헬멧의 모양과 전면부에 새겨진 문양을 보니 왕실 근위대가 분명했다. 목 아래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새하얀 척추 뼈는 그가 그에 맞서는 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잔혹하게 살육했는지에 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해주었다.


“대체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신 겁니까…….”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가 죽어 마땅하다네.”

가신들이 보기에 국왕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광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전투를 치르던 과정에서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과 그의 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두개골들은 섬뜩한 빛깔의 핏물을 쏟아내며 차가운 바닥을 적시고 있었기에 가신들은 차마 혀를 내두르며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 분들을 직접 만나 뵌 것입니까?”

“그렇다네. 크흐흐…….”

어쩐 일인지 국왕은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 기분 나쁜 실소를 흘겨댔다. 전에도 그는 겁에 질려있는 포로를 모질게 고문하거나 노예를 능욕할 적에 사악함과 살기로 가득 찬 조롱을 쏟아낸 바 있었지만 이건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예컨대, 미심쩍은 국왕의 행동과 기괴한 행색 등이 경이로운 조화를 이루어 그의 모습은 전보다 훨씬 더 기괴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 웃음이 진정 의미하는 것에 관해서 도무지 유추할 수도 없었다.


“그 분들께서 영생을 부여해주셨습니까?”

“물론. 그보다 더 한 것들도 얻어왔지.”

국왕이 의연한 기색을 띄며 나지막한 회답을 건네었다. 그의 당당한 태도는 결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느껴졌다.


“감히 바라옵건대, 그 숭고한 축복이란 것을 저희에게도 조금 나눠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페로몬의 진득한 향내에 흠뻑 젖어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카르쿠스가 살벌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는 국왕을 조금 흘겨보더니 대담하리만치 교묘하게 그의 처지를 비꼬았다.


“카르쿠스, 여전히 쾌락에 눈이 멀어 진정 네 놈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아마 우리가 숭배하는 ‘그 분’들도 저희의 이런 모습을 보고 기쁘게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조금은 무례하게 느껴질 법도 한 섣부른 회답이었다.


“크흐흐…….”

카르쿠스의 가소롭기 그지없는 망발을 두 귀로 똑똑히 들은 데키몬드 국왕은 이내 그의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순간 카르쿠스는 살 떨리는 섬뜩함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음을 느꼈다. 육중한 플라즈마 액스를 한 손으로 꽉 쥐며 궁지에 몰린 듯한 어느 가련한 사냥감을 노획하고 종국에는 사뭇 도륙이라도 낼 듯한 그의 살기 서린 위압감……. 가신들은 그가 내뿜는 초연한 기운에 압도되어 그의 공포스런 행보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그의 광기어린 표정으로 보아하건대, 털끝이라도 잘못 스치는 순간 어떤 참변을 당하게 될지 그들은 결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아아악!”

‘퍽’ 하는 불쾌한 전율과 함께 곧, 뇌리를 일깨우는 공포가 궁전을 어지럽혔다. 데키몬드가 휘두른 플라즈마 액스가 카르쿠스의 우둔한 두개골에 여지없이 내리꽂힌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데키몬드는 격노 섞인 조언(粗言)을 토해내며 죽어가는 카르쿠스를 향해 최후의 회답을 건네었다.


“적어도 네 놈이 말하는 그 ‘미소’란 것이 그들로선 결코 기쁘게 여겨 짓는 웃음은 아닐 것이다. 네 놈의 처지가 그저 천박하고 가소롭기 그지없기에 무심코 흘기는 일개 조롱에 불과할 뿐이지.”

“크아아아아아아아악!”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에 사로잡힌 카르쿠스가 살려달라는 눈빛을 애처롭게 자아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멸시 섞인 경고를 마친 데키몬드가 카르쿠스의 두개골 깊숙이 박혀있는 플라즈마 액스를 뽑아낼 즈음, 그의 육신은 플라즈마의 격렬한 열기에 반 이상이 불타버려 단지 한 줌의 잿더미로 변질된 후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대들도 ‘그 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키몬드 국왕은 그의 거대한 플라즈마 액스를 보란 듯이 높게 치켜들었다. 그의 경악스런 행동을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하고 있던 수많은 가신들은 마침 스며드는 웅장한 두려움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크흐흐……. 지금 막 얘기했잖은가? 그대들은 때가 되었다네. 이제 ‘그 분’ 곁으로 갈 시간인 게지.”

마침내 그는 광기어린 본색을 드러냈다. 이곳까지 헤쳐 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서야 했던 수많은 왕국의 근위병들을 애써 상대하면서까지, 그는 몽매한 가신들을 결단코 도륙내고 숙청해야겠다는 개인적인 소신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레메투스. 모든 책임은 레메투스에게 있어! 저 졸렬하기 짝이 없는 놈이 우릴 간악하게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공포에 사로잡힌 가신들 중 한명이 몸을 부르르 떨며 갑작스레 레메투스의 죄를 함고(咸告)했다.


“오, 나의 충직한 가신. 레메투스가 그대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국왕의 안위 따윈 네 놈들의 갈망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었을 테지. 그렇지 않나? 하지만 그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군. 내가 두려운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속셈일 수도 있겠지만 말일세.”

“그를 뒤쫓을 테니 다만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 없다네.”

국왕이 일순간 거대한 플라즈마 액스를 치켜들고 그의 기괴한 몸을 온 대지에 휘저으며 강렬하고도 소름끼치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난데없이 일어난 일이라 많은 이들이 차마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의 발 앞에 무참히 도륙 당했다.


“저는 당신에 대한 존망을 져버리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목숨을 허망하게 앗아가실 셈입니까?”

끝까지 국왕에 대한 충직함을 지킨 케이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간절한 부름이 순간 데키몬드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데키몬드는 잔뜩 경직되어 있는 그의 애처로운 동공을 의연히 주시하며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단순히 인자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케이덴.”

“나…… 나의 국왕이시여……. 계…… 계속 말씀하십시오…….”

국왕이 섬뜩한 조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곧장 응시하자, 이내 그의 몸은 저항할 수 없는 공포심에 완전히 사로잡혀 뻣뻣이 경직되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으으…… 아으으…….”

그는 다만, 감히 말조차 입에 담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러 오로지 괴로움 섞인 신음 소리만을 줄곧 토해낼 뿐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했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국왕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새어나왔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케이덴은 결국 그 흉측한 광경을 뚜렷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마주한 그의 피부엔 순식간에 소름끼치게 생긴 갈퀴와 뿔들이 돋아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가신들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청초했던 정신이 점점 피폐해져감을 느꼈다. 이는 필시, 타락화의 전조임이 분명했다.


“우리의 국왕이 드디어 미쳤군!”

“모두 이곳에서 빠져나가세!”

가신들은 각자의 몸을 사리기 위해 그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편, 궁전은 최근 일어난 격렬한 조산 운동에 의해 거대한 용암 강에 잠식되어 있었는데, 도시와 궁전 사이를 연결해주는 거대한 다리가 간이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히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그 다리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아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매정하게도, 차마 그들의 존립을 돌봐주지 않았다. 죽음이란 두려움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여 본능적으로 겁에 잔뜩 질려버린 가신들이 궁전을 벗어나려고 거대한 입구 앞에 들어서자, 그 순간 잠복하고 있던 커럽터 수 십 마리가 그들 앞에 놓여진 ‘신선한 고기’를 취하기 위해 잽싸게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지독할 정도로 먹이에 굶주려있었고 그리하여 가신들은 압도적인 기세로 도약하는 괴수 무리에게 한낱 ‘신선한 고기’의 일부로서 희생되는 필연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

“제기랄, 동원 가능한 전투 장비는 다 꺼내서라도 지금 당장 저들을 저지하게! 지금 당장 말이네!”

가신 몇 명이 커럽터들의 맹렬한 기습을 받고 맥없이 쓰러졌다. 무방비 상태가 된 가신들은 순식간에 허기진 괴수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이를 눈치 챈 수 십 마리의 개체가 그 뒤를 이어 눈 깜짝할 새에 단지 뼈와 내장 조각만 남은 흉측한 몰골이 될 때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러나 굶주린 그들은 결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그리고 더 신선한 필멸자들의 고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캬아아아아오!”

가신들의 명예와 권위만큼이나 긴 옷자락을 가진 로브 속엔 각자 비상시에 사용이 가능한 플라즈마 피스톨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그 ‘작은 수호자’를 옷에서 꺼내 본연의 의도대로 사용했다. 지금 내쉬는 이 숨결이 비록 삶의 절명(絶命)을 알리는 최후의 신호가 될지언정, 그들은 눈앞에 놓여 있는 불순한 존재들 따위에게 결단코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게다.


“죽어라, 이 불결한 놈들아!”

플라즈마 피스톨의 희미한 총구에서 공포스런 위압감을 내칠만한 강렬한 빛이 새어나왔고 그것에 반응한 커럽터들이 보다 광폭한 기세로 저항하는 이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이 모든 것이 결국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 동안, 치열하고도 섬뜩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무사히 뛰쳐나온 이들은 겨우 우리들뿐인가? 사지 멀쩡하고 정신 반듯한 놈들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냔 말이다! 교전 상황이 점점 우리 쪽으로 불리해지고 있는데 지금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어떻게 된 건지 이 빌어먹을 상황을 설명해보게.”

“정신을 집중하고……. 다분히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 에너지를 모아 마법을 연성해보는 것은 어떻겠나?”

“데스 웨폰도 없이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들을 보게. 아주 잠시라도 방심한 틈을 내보였다간 어떻게 되는지……. 아악!”

그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맹렬히 달려드는 수많은 괴수들을 상대해내려면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전투에 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는 틈을 노리고 도약한 커럽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만큼 전투는 치열하고 난잡했던 것이다.


“숙련된 마법사들이란 자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금만 각성하고 집중하면 될 것을…….”

가신들 중 한명이 급하게나마 맨 손으로 정제되지 않은 불안정한 마법을 연성해냈다. 그렇게 도출된 마법 에너지는 그대로 땅에 박히더니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커럽터들은 그 여파로 꽤 많은 수가 무력화되었지만 미처 마법을 예상하지 못한 가신들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극심했다.


“제기랄, 충격파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있지 않나? 파편에 맞아 죽기 싫으면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입구의 벽면과 기둥이 대지를 뒤흔드는 강력한 충격파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거대한 궁전의 파편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내리찍었으며 자연히 수많은 사상자들의 시체가 끔찍한 장관을 이루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주변의 정세 속에, 호화롭고 장엄하기 그지없었던 루이번 왕국의 궁전은 곧 다가올 몰락의 서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생존자는 우리가 전부인가?”

붕괴된 건물의 혼란스러운 잔해 사이로 생존자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파편을 맞고 뼈마디의 일부가 골절되어 뒤이어 찾아온 막심한 고통에 의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다. 몸의 거동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던 그들은 각자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비상용 페로몬 주사를 꺼내며 내장이 바늘에 닿을 만큼이나 깊숙이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러한 처사가 진정, 그들의 근본적인 통증의 원인을 해결해줄 순 없었다.


“우린……. 우린, 꼭 살아남아서 저 실성한 국왕을 몰아내고 왕국을 재건해야 하네. 모두들 이동을 계속하세.”

가신 중 한 명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로 하고 가능한 한 이 불길한 지역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무너진 궁전의 벽과 기둥들처럼 부서질 대로 부서지다 그들의 육신은 결코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예컨대 마침내, 넘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더 이상 행군할 수 없네.”

“아니, 조금만 더 힘을 내주게나.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면 생존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음을 그대는 모르는가?”

그는 전적으로 의연함을 유지하며 쓰러진 동료를 이끌면서도 아주 중대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그의 뒤에 있는 생존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몰락의 잔재에 휩쓸려 그저, 한 구의 싸늘한 시체로 전락하였음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탈주로였던 거대한 다리가 파편의 충돌로 인해 처참하게 끊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인원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두 명. 그러나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 ‘두 명’이란 숫자는 또 다시 ‘한 명’이란 비극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뒤에 있던 한 명이 심각하게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부여잡으며 곧 다가올 죽음이라는 불운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취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더욱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크흐흐……. 크흐흐흐…….”

섬뜩한 웃음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까보다도 더 흉측해진 몰골로 그들 앞에 나타난 데키몬드 국왕이었다. 그의 어깨장식과 벨트에는 그가 살해한 자들의 참혹한 두개골이 끈적한 피멍울을 토해내며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섬뜩한 것들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가 그대들을 그저 모른 체하고 순순히 살려둘 것이라 생각했나?”

“…….”

광기 깃든 맹렬한 살기가 어느 매서운 날의 폭풍처럼 대지를 압도하던 찰나였다. 그는 먼저 기묘한 손짓을 취하더니 곧, 길쭉하고 날카로운 금속 파편을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어 쓰러져있는 가신을 향해 서서히 내리찍었다. 그것은 워낙 예리하여 흡사 철제 칼날 같기도 했던 탓에, 가신의 유약한 피부 속을 쉽게 파고들 수 있었고 뒤이어 괴로움에 사무친 희생자의 가련한 비명소리를 터뜨리도록 이끌었다.


“아아아악! 살려주십시오, 데키몬드 폐하!”

데키몬드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의연하게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그러자, 희생자의 복부에 박힌 칼날 조각이 그의 손짓에 따라 머리 쪽으로 가로지르며 육신을 철저히 두 동강 내버렸다. 상하로 처참히 갈라진 희생자의 육신 사이에는 신선한 내장과 뼈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역겹게 느껴질 만큼 잔인했다.


“이것이 제 최후의 순간이 되겠군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신 한 명이 비참하게 살육당하고 남은, 이 저주스런 곳의 마지막 생존자가 의식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굴복하지 않겠지. 다만, 굴복당할 뿐.”

그리곤 국왕이 점점 그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던 중, 그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느끼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한 깊이의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 아래에는 살인적인 열기의 용암이 사나운 기세로 추락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려 발악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우린 필히 지옥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때엔 기어이 당신이 내 발 밑아래 무릎 꿇고 애걸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결전의 그 날을 각오하십시오.”

그 한 마디와 함께 그는 다만……. 스스로의 육신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내던질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성난 용암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묵묵히 사라져갔다. 마침내 제 기력을 다하여 정처 없이 소멸하는 저 밤하늘의 가련한 유성우처럼 말이다. 애처롭고도 무상(無常)한 살육의 전야제였다.


“애석하지만 내가 죽어서 그대를 볼 일은 이제 결코 없을 거라네, 어리석은 자여.”

데키몬드는 그렇게 의연히 중얼거리곤, 무엇이 그리도 우스웠던 것인지 뒤이어 갑작스레 섬뜩한 웃음을 자아내며 가신의 죽음을 한껏 능멸하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그의 하찮은 충성심에 대한 대가였거나 혹은, 국왕으로서 베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 답례였을 게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은 분명 지극히 악마적이고 사악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그는 불순한 조소를 흘겨대며 궁전 입구의 부서진 잔해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입구는 필멸자들의 시체와 암석 파편들로 인해 마구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그는 어떤 특별한 대안이라도 갖춰놓은 양 의연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에너지의 흐름을 조율했다. 그의 기묘한 손짓이 곧, 궁전의 통로를 막고 있는 거대한 잔해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고, 마침내 팔을 양쪽으로 활짝 펴보이자 모든 것은 바람에 쓸려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맥없이 나뒹굴었다. 그렇게, 일순간 통로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아, 이것이 진정……. 불멸자만이 누릴 수 있는 숭고한 힘이란 말인가……!”

그는 피와 시체로 얼룩진 공허한 궁전을 거닐었다.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누군지 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역겨운 시체 더미들과 부서진 탁자……. 그 아래 깨진 술병과 접대용 그릇만이 정처 없이 나뒹굴 뿐이었다. 과연,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던 활기찬 분위기가 머물던 곳이었음이 믿겨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궁전은 섬뜩하리만치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살기서린 오한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담담한 그의 태도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너무나도 쉽게 간파하는 필멸자들이라면 필시 본능적으로 살이 떨리고 오금이 저릴법할 정도의 광기서린 공포였다.


“…….”

“거기 누구냐?”

궁전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존재들이 없었다. 죽일 수 있는 것은 모두 그가 몸소 나서서 처참히 학살하고 도륙 냈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멀쩡히 숨이 붙어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 또 누군가가 그와 같은 장소를 거닐고 있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이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정체를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 역시 저들과 같은 비참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기분 나쁘게 그를 흘겨보는 어떤 ‘누군가’의 시선이 조금 더 명백히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지독한 불안감에 떨게 만들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물증이 그의 귀를 서서히 사로잡았다. 그것은 섬뜩한 발소리……. 아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바닥을 선명히 기어 다니는 소리였다.


“스르르…….”

“…….”

이번엔 확실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그의 곁을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것을 그는 알아차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데키몬드…….”

흡사 흉측한 괴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더군다나, 무언가가 바닥 따위를 역겹게 기어 다니는 듯한 그 기이한 기척은 전에는 일절 들어본 적이 없는 부류였기에 그는 조금 더 세심한 태도로 주위의 모든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스르르……, 스르르……, 스르르……, 스르…….”

“…….”

그 섬뜩한 소리의 자취는 어느 틈엔가 존재감을 감추고 부자연스럽게 끊어져버렸다. 그래서일까. 비록 주변은 잠잠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오감을 압도하는 찢어질 듯한 적막함이 그가 서 있는 공허한 대지를 암묵적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똑.”

성분을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가 한데 뭉쳐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그 불길한 액체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위쪽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다음에야 비로소 국왕은 무심결에 그의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는 궁전의 천장에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흘리며 그를 섬뜩한 눈길로 주시하고 있던 흉측한 괴수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아아……. 네…… 네 놈은 대체……!”

“크흐흐…….”

그 경악스런 괴수가 차마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코웃음을 흘겨대며 무방비 상태인 그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당황한 국왕은 가신의 시체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플라즈마 피스톨을 꺼내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기고 있는 흉악한 괴수를 향해 매몰차게 발사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의 발악은 정체모를 그 괴수를 향해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었다. 그제야 국왕은 그 괴수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이계로부터 온 어떤 초월적인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리곤 두렵고도 경외스런 감정을 느꼈다.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괴수는 차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국왕의 바로 앞까지 기어와서 그 흉측한 몰골을 면전 앞에 과도할 정도로 들이댔다. 혐오스럽게 꿈틀거리는 촉수와 고름들이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나머지, 데키몬드는 일순간 그 괴수의 얼굴을 향해 플라즈마 액스를 내려찍었다. 그러나 그 괴수는 도끼가 허공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가 땅에 박힌 플라즈마 액스를 뽑아내느라 고역을 치르고 있는 그의 뒤에 의연히 서며 한껏 여유로움을 과시했다. 


“크흐흐……. 나의 작은 데키몬드여. 그렇게 두려워 할 것 없다네. 난 공포와 죽음을 관장하는 악신(惡神), 카젤(Ka'zzel)이라고 한다. 비록 오래 전에 이미 죽었던 몸이지만, 영혼만은 끝내 홀로나마 실재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정처 없이 세계를 유랑하곤 했지. 그러던 도중에 난 본능적으로 네 놈이 저지른 피의 축제가 수도 없는 필멸자들의 공포를 만발하게 함을 느낀 게야. 그리고 난 단지 네 놈의 경이로운 태도와 업보가 마음에 들어서 잠시 찾아온 것일 뿐이다. 그럼 이쯤에서 제안을 하도록 할까? 내게 영원한 신념을 약속한다면 그 답례로 네 놈의 권위와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이 정도면 네 놈이 아주 솔깃하게 여길 법도 할 텐데 말이지.”

“…….”

“호오, 예상과는 다르게 내 제안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그럼 할 수 없지. 네 놈의 목숨을 강제로 거둬가는 수밖에.”

그는 그 제안이 시답잖게 느껴졌던 탓에 입을 다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원초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마 묵직하게 굳어버린 시퍼런 입술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 계…… 계약……. 지금 당장이라도 한다면 하겠소. 그러니…… 나를 제발 내버려 두시오…….”

그가 아주 힘겹게 막혀있던 말문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건지, 짐스럽게 느껴질 만큼이나 가까이 근접했던 괴수는 이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데키몬드는 그를 한껏 조이던 육중한 압박감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지금 네 놈이 한 결정 말이다……. 행여나 후회는 없겠지?”

“무…… 물론이오…….”

두 괴수 사이에는 어느새 기이하고도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데키몬드는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거대한 두려움과 모멸감을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카젤이 내건 제안을 반드시 수긍해야만 했다. 설령, 그 계약이라는 것이 차마 합당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혹한 절대자의 시련과 완벽히 부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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