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이지만 무척 흥미로운지라 퍼 왔습니다.
동족상잔의 내전, 40년의 군부독재, 독재 이후로도 이어지는 구세력의 압력 등...
우리나라의 역사와 너무 닮은 부분이 많네요.
과거 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 연구
스페인
스페인 내전(1936-39)은 19세기 이래 악화일로를 걸어 온 “두 스페인”간에 벌어진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사료 1, 2, 3, 4). 1939년에 전쟁은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측의 승리로 끝났고, 그 후 프랑코는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철권으로 지배했다. 거의 40년 동안 유지된 프랑코의 독재 시대는 두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939년 내전의 종결 이후 1959년까지의 ‘전기 프랑코 시대’와, 1959년부터 1975년 프랑코 사망까지의 ‘후기 프랑코 시대’가 그것이다.
가공할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출발한 프랑코 체제는 군대, 파시스트 유일 정당인 팔랑헤,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그 권력기반으로 지배 구조를 강화해 나갔다. 군대는 프랑코 체제를 무력으로 뒷받침하였고, 팔랑헤는 프랑코를 추종하는 민간인들의 집결체로써 독재 통치에 필요한 관료들을 제공하였으며, 교회는 내전을 ‘위대한 가톨릭의 십자군’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재 체제를 합리화해주었다(사료 4). 이들은 그 대가로 여러 가지 혜택과 특권을 누리면서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50년대 과도기를 거쳐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1959년 이후 독재 정권은 지금까지의 경제적 실패를 인정하고 조심스런 자유화와 개방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사료 6). 1959년에 발표된 ‘경제안정화 계획’은 그러한 변화의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었다. 정책의 변화는 스페인 경제와 사회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61년부터 약 15년 동안 스페인은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급속히 향상되었고 지식수준도 크게 높아졌다. 이러한 경제 발전은 프랑코와 그의 측근들이 우려했던 대로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동반하였다. 스페인은 근대화되어 갔고 국민들은 도시적, 세속적, 민주적 가치를 수용해갔다. 그렇지만 프랑코 체제 자체의 억압적 본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사료 8, 9). 그러나 어쨌든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는 프랑코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와 정권과 교회간의 전통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나타났다(사료 11). 그러나 체제에 가장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 사회집단은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었다.
1975년 11월 프랑코의 죽음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왔지만 향후의 전망은 매우 불확실했다. 그의 체제는 상당히 광범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고 체제에 대한 군부의 충성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억압적 방식을 통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그 동안 세상은 많이 달라졌으며, 사회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무변화의 괴리로 인한 사회 혼란은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었다.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이런 복잡한 상황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도전 세력의 성장에 직면하여 이제 ‘지나친 탄압’ 없이는 권력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정권을 쓰러뜨릴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둘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스페인의 민주화와 ‘과거청산’은 그러한 복잡한 상황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제’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니까 체제 내 온건개혁파가 보수 강경파의 반대를 극복하고 좌파 반대 세력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변화를 만들어갔다. 요컨대 스페인의 ‘이행’은 ‘체제주도적 이행’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거와의 갑작스런 단절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기존 체제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개혁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사료 13). 바로 이 점이 스페인의 민주화 혹은 과거청산의 성격을 규정한 결정적인 요인이라 할 것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정치개혁법’의 제정(사료 21, 22)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1976년 11월에 코르테스를 통과한 이 법은 프랑코 시대의 중요 기구들을 폐지하고 민주적 선거를 통한 새로운 의회와 정부 구성을 통하여 독재 체제 청산과 새로운 의회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수아레스는 1977년 4월에 군부를 비롯한 수구 우파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공산당 합법화(사료 18)를 전격적으로 단행하였고, 이어 프랑코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던 중요한 기구들을 차례로 해체하였다. 그와 함께 총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중도세력’을 결집하여 하나의 급조 정당(UCD)을 만들고 1977년 6월에 치러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의회를 갖게 되었고, 이는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이어진 관문인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 제정 과정(사료 26)은 스페인 민주화 과정의 중요한 특징가운데 하나인 엘리트주의적, 타협적 성격을 명백히 보여준다. 어렵게 마련된 새 헌법 최종안은 그해 10월 코르테스(의회)의 압도적 지지 속에 통과되었고, 그 해 12월의 국민투표에서도 이 법안은 68%의 투표율과 88%의 높은 지지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명실상부한 민주 국가로 진입하게 되었다.
새 헌법 제정으로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좀 더 확실히 자리잡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몇 가지 시험이 더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 가지의 잠재적인 도전이 극복되어야 했다. 첫째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군부였고, 두 번째는 지역자치 문제(특히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였으며, 세 번째는 정권교체의 문제였다. 지역문제에 대해 수아레스 정부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에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해 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카탈루냐와의 관계는 성공적으로 해결된 데 비해(사료 19) 바스크와의 협상은 실패하여 바스크 문제는 그 후 악화일로를 걷게 되고,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스페인의 골치거리로 남아 있다. 한편 수아레스 정부에 기만당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군부의 불만은 결국 81년 2월 23일 쿠데타로 폭발했으나 이들이 군부 다수파를 끌어들이는데 실패하고, 특히 군부의 공식적인 수장인 국왕이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일축함으로써 쿠데타는 몇 시간만에 끝나고 말았다(사료 31, 32) 평화로운 정권 교체라는 시험은 온건 좌파인 사회노동당이 이행기 동안 온건화, 정치적 중도화를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82년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좌파 정당으로의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사료 27). 이 1982년 사회노동당의 집권은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성공적인 종결이었다.
스페인의 과거청산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독재 체제의 정치적 청산을 얘기한다면 스페인은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의 모범답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픈 과거의 청산을 통한 진정한 국민 화해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말하는 것이라면 스페인의 과거청산은 결코 모범답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당장 시급한 민주화를 위해 아픈 과거는 일단 덮어두자는 ‘망각협정’에 불과했다. 그 망각은 놀랍게도 독재 체제가 종식된 지 4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사료 35). 그렇다면 망각 위에 세워진 스페인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망각에서 재생산된 불의에 기반을 두게 되면 안정된 것이 될 수 없다”는 남아공의 투투 대주교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진정한 화해란 반드시 희생자들에 대한 유감의 표현과 함께 저지른 잘못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한의 불덩어리는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고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출처는 [역사와 기억 - 서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이며 링크는 아래 주소입니다.
http://past.snu.ac.kr/02_document/Spain/Spa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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