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이번 대선 투표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는지 분석해보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추측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려고 하였으나
글쓴이의 역사관이나 정치성향에 따라 한 쪽에 편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일제시대의 무서움은 당시 전국민이 겪었을테지만 그것을 겪고 기억하려면
당시 일본군이나 일본경찰들이 마구잡이로 학살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못해도 1925년 정도 이전 출생자(88세 이상)여야 할 겁니다. 되도록이면 일제강점기 시작 전 출생자들이 더 잘 알고 있겠죠.
하지만 현재 그 시절을 겪어본 분들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돌아가셨겠죠.
그렇기에 '친일파'라는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전국민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직접 경험해 본 일이 아니니까요.
한국전쟁: 1950년 ~ 1953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가족이나 친지들이 죽거나 다친 전쟁의 아픈 기억,
이를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대체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이전 출생자(68세 이상) 정도라면 기억할 것입니다.
대여섯살 정도의 나이라도 옆에서 총탄에 죽어간 부모형제를 직접 봤다면 그 트라우마는 평생 남겠죠.
그리고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국민이 겪은 아픔입니다.
아직 많은 분들이 살아계시고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빨갱이'라는 단어에 치를 떨겠죠.
그리고 이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바로 다음 세대도 반공교육이나 '빨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서움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을 것입니다.
대략 20세 부터 자식을 낳았다고 가정하면 전쟁직후 다음 세대는 대략 1965년 이전 출생자(48세 이상)일 것입니다.
4.19 혁명: 1960년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일어났던 대학생 주도의 시위입니다.
관련 지역들은 2월 28일 대구, 3월 15일 마산, 4월 18일~19일 서울 정도입니다.
전국민적인 시위도 아니었고 일부 지역이라서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많이 기억할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5.16 군사정변: 1961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요즘 시대로 비유하자면 사단장급 이상의 군인이 예하부대를 이끌고
이명박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이유로 청와대로 진격한 정도의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지금만큼 방송, 신문,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던데다가
이 군사정변은 성공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은 아무래도 성공한 군부측에 유리하게 보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TV와 신문 등으로만 소식을 접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나라가 혼란해서 군대가 나섰구나 정도로 알고 넘어갔을 거라고 봅니다.
박정희 집권기간: 1963년 ~ 1979년
한국전쟁 직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나라 이곳 저곳에 도로가 깔리고 건물이 들어서고
연일 TV나 신문에서는 박정희의 업적과 오늘의 행적을 칭송합니다.
이 시대를 몸소 겪어본 분들은 어릴때 못먹고 못입고 자랐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먹고 입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성장한 우리나라를 보게 됩니다.
대략 어릴때부터 이 시절을 겪었다고 가정하면 1958년 이전 출생자(55세 이상) 전체가 이시절을 직접 겪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엄청난 성장을 직접 겪은 세대라서 '그 시절이 좋았지'라는 향수가 강할 법도 합니다.
박정희 통치기간을 직접 겪은 세대의 다음 세대는
대략 20세 부터 자식을 낳았다고 가정하면 1978년 이전 출생자(35세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현세대에서는 그 당시에는 누가 집권했어도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 발전했을거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를 살아간 세대들은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본 그때의 여러 언론 보도 자료들과 직접 경험했던 경제발전 때문에
그 때의 경제발전이 박정희의 업적이 아니라는 반박자료를 본다해도
이를 인정하면 자신의 경험이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하기 쉽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라도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박근혜를 지지했을거라고 봅니다.
10월 유신: 1972년
1963년, 1967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1971년에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며 3번째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합니다.
당시 상대 후보는 김대중으로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94만표 차이로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언론, 출판, 방송, 보도는 사전 검열 받도록 하며, 대학들에는 휴교령을 내립니다.
또한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시위, 집회를 금지시키고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이 국회의원 1/3과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으며, 임기는 6년으로 늘리고 연임 무제한,
지금과 같은 직선제를 폐지하고 간선제로 바꿉니다.
계엄령과 사전 검열제로 인해 10월 유신 이후의 법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일들은 거의 보도되지 못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1979년 10월 26일,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숨지자
사건 수사를 위해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릅니다.
그리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12월 6일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10.26 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민주적으로 헌법을 개헌할 것을 약속합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하여 군부를 장악합니다.
이를 12.12 사태 또는 12.12 군사반란이라고 합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조치를 하고 계엄군을 전국 대학에 배치하여 학생 주도 시위를 막으며 정권 장악을 시도합니다.
이에 항거하여 5월 18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 퇴진,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납니다.
계엄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시민까지도 죽거나 다칩니다.
광주 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껴 중장년층은 물론 10대 청소년까지도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무력으로 완전히 진압합니다.
그 후 신군부는 장악한 언론들을 통해 이를 '빨갱이'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일로 왜곡합니다.
즉, 당시 광주나 전라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대다수 국민들은 사건의 진실을 모른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등학생 정도까지 시위에 참여했다고 가정하면
1963년 이전 출생자(50세 이상)의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은 한 두 다리만 건너면
당시의 피해자를 알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대부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들의 친인척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전해들은 바로 다음 세대라면 1983년 이전 출생자(30세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1995년, 12.12와 5.18에 대해서 재수사가 진행되었고 12.12는 반란, 5.18은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후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의 판결을 받았으나, 후에 전두환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와 5.18 사건 관계자들을 특별 사면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봤을 때 유권자들의 세대간 경험 추측
TV와 신문 그리고 경험만으로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왔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 중에서,
1.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즉, '친일파'라는 말은 유권자 대부분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2. 한국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해서 이를 통해 '빨갱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를 기억하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있다.
3. 박정희 통치기간의 경제발전을 경험하고 향수가 남아있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많다.
특히 이 계층은 '빨갱이'의 공포도 아는 사람이 많으며,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친정부 성향의 편향된 보도 내용에 수 년, 많게는 10년 이상 노출되었다.
4.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다 죽은 사람들의 친인척들과 다친 사람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이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
5.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지 않았거나 또는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에 비해 전국적으로 배가 넘게 많다.
6. 정부에 의해 장악되고 통제된 언론들에 의해 일부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제가 박정희 시절을 살아봤다면 저도 박근혜를 찍었을 겁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그 외 여러 공무원들 나랏밥을 먹고 나랏일을 하는 분들
이 분들이 어떠한 일을 하려하고, 하는 중이고, 했을 때
기자들은 취재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따져보고 무언가 문제가 있거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방송, 출판, 보도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알리고
문제가 크다면 적법하게 경찰은 수사를, 검찰은 기소를, 법원은 판결을 내리는 나라
이것이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재정권은 10월 유신을 통해 모든 언론을 사전 검열하여 언론을 장악하려 했고
군사정권은 계엄령과 언론 통폐합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언론이 장악되고 통제되면 TV나 신문으로만 나라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접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모든 일들의 진상을 제대로 알기는 힘들었을 것 입니다.
모든 언론이 제 기능을 상실 했을 때 모든 언론은 현 정부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만 보도했을테니까요.
MBC가 사장이 바뀌고 나서 어떻게 변해갔는지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옛날처럼 계엄령이 내려지거나 강제적으로 언론을 장악, 통제하지는 못할 것 입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MBC 처럼 여러 언론사, 방송사에 현 정부를 따르는 인사들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포털사이트, SNS 사이트 등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을 조작하여
정부에서 한 일들을 과대 포장하여 칭송하고,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면 이를 축소, 은폐하여 보도하려 하고
경찰, 검찰, 법원이 현 정부의 편을 들어 제대로 된 수사나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결과적으로 이런 방송과 기사들이 '팩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국민들이 우민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부디 제 걱정이 기우이길, 제가 박근혜라는 사람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었길 바라며,
제가 염려한 일이 다음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