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브론즈에 서식하는 심해어다. 인벤에는 챌린저 1티어에 레이팅 3000+이고 페이커보다 라인전을 잘하며, 롱판다 '따위'는 씹어먹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데, 나는 MMR이 아마 1000점이 안 되는 브론즈 나부랭이다. 이 글도, 여태껏 인벤에 올라온 수많은 '브론즈의 문제점'과 다를 게 없는 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튼, 이 글도 왜 브론즈는 이 모양 이 꼴인지에 대해 설명하려 하는 글이다.
오늘도 심해 바닥에서 진흙을 먹으며 랭겜을 돌리던 와중, 아주 신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곳 인벤 인구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동료 심해어들은 알겠지만, 브론즈 경기는 주로 15분쯤 결판이 난다. 전라인이 이기거나, 전라인이 패배한다. 한 라인 정도는 흥하는 경우가 있지만, 게임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 브론즈의 스노우볼이란 이렇다.
이번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섰던 미드는 약간 우세했고, 봇이 크게 불리했지만 큰 손해는 면했고, 탑이 아주 크게 이겼다. 심지어 킬을 엄청나게 먹은 우리팀 정글러는 카직스, 말도 안 되게 탑을 압도한 우리 탑솔은 베인이었다. 탑 베인-정글 카직스-미드 오리아나-바텀 바루스, 니달리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지만, 조합을 따질 필요도 없이 당연히 이기는 게임이었다. 바론과 용은 거들떠보지도 않아도, 뭉쳐 다니며 포탑만 밀어도 이기는 게임이었다. 우리팀 중 유일하게 바루스만 오버데스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씨에스도 크게 밀리며 한마디로 망했다.
우리팀 바루스는 유독 말이 많았다. 게임보다는 채팅에 관심이 더 많은 듯했다. 무난하게 게임을 하면서, 브론즈 특유의 중반 운영인 '유리하면 포탑 밀지 말고 애들 사냥 다니기'를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도 베인은 계속 킬을 먹었고 더더욱 흥하기 시작했다. 바루스는 계속 베인에게 '와 베인' '베인 제발 좀 뒤져라'이러면서 베인에게 장난을 치며 채팅을 계속 했다. 베인이 딜계산 실수로 죽자, '피들이 빨대 꽂았는데 그걸 계속 치고 있냐 등신아'라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는 브론즈5를 가야 한다며, 일부러 적에게 죽어주기 시작했다.
미드 길을 따라 꽂은 와드길을 사뿐히 즈려밟고 적 포탑으로 돌진하기 시작했고 온갖 발악을 다 하며 경기를 지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애당초 바루스가 게임에 끼치고 있던 영향은 미미했기 때문에 게임은 이겼다. 바루스의 트롤링은, 나머지 팀원들이 오히려 각성하고 어두운 정글탐험을 멈추게 하여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난 게임만 이기면 된다. 트롤링은 리폿하면 되고 그 이후의 처벌은 게임사가 알아서 할 문제다.
그런데 날 조금 짜증 나게 한 것은 이 부분이다
브론즈의 마스코트를 많이 담고 있는 짤이다. 미드를 가로지르는 트롤링 파랑장미길, 니달리 서폿, 어두운 맵.
지가 압도랜다.
브론즈5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 게임을 엎겠단다. '나의계획대로군'이란다. 아마 인벤에 올라온 챌린저 승급 대란에서 압도가 했던 짓거리에 대한 오마주였을 것이다. 바루스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게임 내내 했던 채팅을 보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바루스는, 자기가 휘젓고 무쌍을 찍었어야 했는데, 자기는 망해버리고, 되려 베인이 영웅 놀이를 하고 있는 게 너무 샘이 나고 심사가 뒤틀려서 게임을 망쳐버린 것이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자기 통제 하에서 얻고 싶은 것이다. 브론즈에서 꽤 많이 보이는 광경이다. 잘하면 잘했다고 칭찬하는 팀원은 드물고, 군말없이 따르면서 LP를 얻는 경우와, 대놓고 질투하는 경우가 반반이다. 오히려 작은 실수를 꼬투리 잡아 트롤링을 시작하기 일쑤다.
내가 이 글을 여기 인벤에 올린 이유는, 압도를 욕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특별히 저 바루스를 까고 싶어서도 아니다. 압도가 자기를 좋아하는 모든 게이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하는 게임인데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날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한 판이야말로 브론즈에 대해 정말 정확하게 알려주는 한판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을 못해서 재미없는 것뿐만은 아니다. 천상계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하며 얻는 재미에는 비할바 못 되겠지만, 브론즈에게도 브론즈만의 서스펜스가 있다. 게임을 못하는건 브론즈에겐 당연하다. 라인전 우위를 바탕으로 경기를 빨리 끝내지 못하는 습성도 브론즈에겐 당연하다. 우리가 스노우볼을 잘 굴리고, 운영을 잘하고, 컨트롤이 좋으면 왜 브론즈겠는가?
브론즈의 대표적 습성은 이기심이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제일 잘나야 한다.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이런 집착은, 그들의 중심에 어떠한 빈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브론즈의 목표는 게임을 이기는게 아니다. 게임을 이기고 싶어하는게 아니라, 자기 잘난걸 보여주는게 제일 중요하다. 이 습성 하나가 브론즈의 많은 문제점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브론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노우볼을 못 굴린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라인전 우세를 잡으면 취할 이득을 재빨리 취하고 다른 라인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이것은, 브론즈의 선수들은 팀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보다 솔킬을 따면서 약한 상대를 짓밟으며 느끼는 쾌감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고, KDA가 높게 찍혀서 '내가 지금 제일 잘하고 있다'를 어떻게든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쾌감을 팀의 승리보다 우선하고, 그것밖에 모른다. 그러니 팀에게 타워를 깨서 750골드, 용을 먹어서 975골드를 주는 것보다 라이너 솔킬을 따서 50골드를 버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둘째, 브론즈의 라인전은 크게 이기거나 크게 진다.
이건 손해를 최소화하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많은 고랭커들은 이야기한다. 그게 아니다. 브론즈는 자기가 1킬을 내주고 하는 라인전, 즉, 지고 있는 라인전은 하기 싫어한다. 할 맛이 떨어져서 의욕없이 플레이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1킬을 다시 따서 동률로 복구해 놓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빌지워터가 나온 베인에게, 이즈리얼이 도란검 하나 들고 앞비전으로 시비를 거는 것과 같은 무모한 장면이 라인전에서 자주 나오는 이유다. 물론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브론즈에도 랭겜을 천판씩 한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챔스를 챙겨보며, 나이스게임 티비의 프로그램들을 자주 보는 사람들이 허다하며, 온갖 아프리카 방송의 채팅창에서 고랭커 행세를 하는 사람 투성이다. 모를리가 없다. 기본은 안다는 것이다. 아는데도, 상한 자존심에 먹혀서 제대로 판단을 못 하고 무작정 달려들고 보는 것이다. 하기 싫은 게임을 꾹 참고 팀원들을 위해서 사리면서 하지 못 한다.
셋째, 트롤이 많고 경기를 쉽게 포기하는데 이상하게 경기는 쉽게 끝이 안 나고 항복도 안 한다.
당연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브론즈는 이기려고 게임을 하는게 아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요즘 꽂힌 그 캐릭으로, 자기가 원하는 라인을 가서 그 캐릭의 힘을 느끼려고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브론즈는 템에 미친듯이 집착하고, 그 템의 효과를 눈으로 보면서 얻는 쾌감에 굉장히 약하다. 적 르블랑이 몇킬을 먹어도 음전자 망토 하나 안 뽑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게임을 이기든 지든, 그 템을 꼭 뽑아서 상대편에게 딜이 박히는 걸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하다. 브론즈의 탱커들 대부분이 가시갑옷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를 계속 치는데 오히려 치는 원딜 피가 닳는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몰왕검 나올때까지만 버텨봐요" "데캡 나옴" "존야만 나오면 이김" 우린 롤을 하는게 아니라 리니지를 하는거다. 그러니까 완전히 지고 있는 게임에서도 정글러는 계속 정글몹을 처먹고, 탑은 계속 파밍을 하고, 암살자 미드는 어디 한 놈 딸 놈 없다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다. 항복에는 관심 없다. 자기가 원하는 캐릭으로 원하는 라인을 갔으면, 그 캐릭의 위력을 한번 느껴보지 않고서는 게임은 끝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신의 목표에만 몰두되어 팀으로서의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아예 인지조차 못 한다.
이런 경기가 재미있을 수 있을까? 과연 이런 경기는 롤이란 게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경기인가? 절대 아니며, 이런 경기를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무너진 자존심에서 비롯된 편집증적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편집증적 이기심과 롤 커뮤니티 사이 팽배해 있는 브론즈에 대한 자세 사이에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다시 바루스로 돌아가 보자. 저 바루스는 지가 압도랜다. 뭔가 우습지 않은가? 브론즈가 압도를 좋아하다니... 압도는 우리 같은 심해어들의 나약한 자존심과 뒤틀린 공명심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그 브론즈들과 게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압도 눈에 브론즈들은 말 그대로 사람새끼들로 안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브론즈를 개무시하는 압도를 왜 좋아할까? 압도가 브론즈들을 말 그대로 썰고 다니고 학살을 하고, 채팅창에는 그들에 대한 조롱이 가득한 그 방송을 보면서, 압도에게 좋은 감정을 대체 왜 가질까?
브론즈들에게는, 무시당하는 건 이제 당연한 게 되었다. 나는 나이스게임TV의 방송을 자주 보는 편이다. 나겜 직원들의 티어 분포는 꽤 다양한 편이고, 그만큼 방송 컨텐츠도 다양하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일관적인 메세지가 있다. 바로 '게임을 나보다 못하는 사람을 나는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다. 실버인 홀스가 브론즈인 짱세를 무시하고, 골드인 남궁광진은 실버인 단군이나 이화진를 무시한다. 그리고 플레인 빛돌은 롤바타라는 방송에서 대놓고 피그베어와 콜록콜록에게 짜증으로 일관한 적이 있다. 나겜 직원들이 나쁜 사람이어서 낮은 티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낮은 티어에 대한 무시가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농담으로 포장되었지만 '얘네들이 게임을 얼마나 못 하는줄 알아?'는 롤 커뮤니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떡밥이자 모든 사람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나겜 뿐만 아니라, 인벤, 롤갤에서도 마찬가지다. 실버와 브론즈에 대한 조롱이 거의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떡밥 중 하나다. 대회보다 더 흥한다.
아프리카에서 잘나가는 롤BJ가 되려면, BJ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 이상, 양학 방송을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롤을 즐기는 인구 대다수가 브론즈라는걸 감안하면, 양학 방송 시청자의 대부분은 자기 티어가 통채로 무시당하고 썰리는 방송을 즐겨보는 것이다.
근데 이건 이상하다. 롤 인구의 대다수는 실버나 브론즈다. 왜 이들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바로 브론즈들이 게임 내에서 하는 행동, 그들의 감정선이 게임 내외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임 내에서, 게임을 이기는 것 보다는 이기는 플레이어 행세를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듯이, 게임 밖의 롤 커뮤니티 안에서도, 자신들이 실제로 이득을 보는 것 보다는 이 시스템 안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 행세를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브론즈면 심해인들을 욕하는 게 자기를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고, 그 챗방, 그 댓글, 그 방송에서 자기가 심해인을 무시해도 되는 고랭커 행세를 해서 순간적으로 즐거운 게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해를 조롱하는 글과 댓글, 멘트들이 흥하는 것이고, 양학 방송이 그렇게 흥하는 것이고, 압도에 대한 지지가 말 그래도 '압도적'인 것이다. 브론즈에 대한 무시는 이들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오히려 고랭커 행세를 할 수 있는 기회다.
우리, 브론즈들은, 어떻게든 부정하려 애쓰는 것이다. 자기가 못한다는 사실을. 자기가 그 조롱의 대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지만, 그 자리에서 그 순간만큼은 그 조롱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실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열등감을 낳고 열등감은 뒤틀린 이기적인 행동을 낳는다. 그러니까 게임 내에서도, 게임을 이기는 것보다는 자기가 잘난 것을 보여주는 데 급급해서 온갖 무리수를 두며 팀웍은 뒷전이고, 강제 이니시에이팅 당하기 일보 직전 상황에서도, 죽어 있는 사이 사놓은 민병대로 부활하자마자 씨에스를 처먹으러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21킬 먹은 제드가 적진으로 무작정 달려들어서 한 명을 죽이고, 적에게 킬과 어시스트를 덕지덕지 발라주고, 왜 원딜 끊었는데 한타 지냐고 성질을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5대5 대치 상황에서 기다리다 못해 궁키고 알파부터 긁은 다음, 서포터를 후드려 패다 장렬하게 산화한 마스터이가, 팀원들은 노답이라며 백도어만 주구장창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남기는 기가 막힌 한마디 '역시 브론즈는 노답이야'.
압도를 비롯한 양학 BJ들이 브론즈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브론즈가 수많은 양학 BJ스타들을 탄생시켰는지, 이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과 브론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말 그대로 압도의 브론즈이고, 브론즈의 압도다.
게이머들 대부분이 이럴 수도 있다.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브론즈에만 있었으니 브론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브론즈의 심리나 게임 플레이 방식, 그리고 여러 커뮤니티와 롤 방송의 풍조, 사이에는 확실한 관계가 있다. 원래 인간이 이런 존재인지, 아니면 롤이라는 것을 둘러싸고 있는 무언가가 나쁜 모습을 우리에게서 끌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엇이 무엇을 유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키워나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 롤판에 범람한 온갖 양학 BJ들과, 낮은 티어를 무시하는 자세가 브론즈 내에서의 게임 자체에 암을 키우고 있다.
안타깝다. 트롤링을 하려 했지만 벌어들인 골드가 너무 적어 임팩트 있는 트롤링을 하지 못 했다.
당연히 이런 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권한이 내게 없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바라보며 기분이 조금 씁쓸한 건 사실이다.
브론즈는 게임 못해서 브론즈가 아니다. 내가 게임을 못해서 때문에 브론즈인 것이다.
브론즈는 손잭스라 게임을 못한다가 아니다. 내가 손잭스라 게임을 못하는 것이다.
브론즈는 뇌가 문도라 게임을 못한다가 아니다. 내가 뇌가 문도라 게임을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프로게이머에서 멀고 먼 브론즈 티어인데, 자기가 게임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게임을 즐겁게 하는 게 과연 그렇게 어려울까?
이분 롤 전문 기자 하셔야 할듯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