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미나 시간에 13세기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공부하다가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질문이 나쁘면, 그 질문이 설정해놓은 굴레에 갇혀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와.. 미국 교수님이 우리나라 뉴스 보시나 싶었다..
이미 13세기에도 논쟁을 할 때 질문이 나쁘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질문 자체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이 권리를 주장하면 무한 반복으로 또 물을 것이다.
'저는 부정선거를 고발합니다.'
'너 종북이야?
'종북이 아니라, 부정선거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아 됐고. 어쨌든 너 종북이냐고. 그것부터 대답해봐.'
고정된 틀에 사람들을 가두어 언론 몰이를 하려는 사람들은 계속 나쁜 질문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못해 그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정말 엉뚱한 논의가 전개된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스님도, 목사님도, 미국 사람도, 이탈리아 사람도 선거가 잘 못 치러졌다고 하면 다 종북이 된다.
'너도 종북이냐? 조국이 어디냐?'
슬프게도 질문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질문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이미 언론의 지원에 힘입어 강력한 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부정선거가 아닌 돌아가신 연평도 장병들을 다시 기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너도 종북이냐? 종북이면 북한으로 가라.'
이 나쁜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는 좋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더 나은 현실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저 질문에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