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점점 세지고, 기온도 매섭게 떨어져 분명 내가 싫어하는 겨울이 왔음을 몸소 깨닫소 있다. 내가 겨울을 싫어한 이유를 밝히려면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가는데, 날씨가 추워질 수록 수능을 봐야하는 날짜가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며, 매서운 한파와 함께 초라한 성적을 손에 쥔체 무너진 자존감을 다독인 그 당시 처절했던 나의 기분이 다시 기억나 겨울은 유달리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계절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 졸업반인 내상황과 맞물려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헝클어 트리고 있다.
졸업반이라 하면 대게 곧 사회 초년생을 의미한다. '사회'. 학창시절에는 사회라는 곳이 정말 궁금했다. 학창시절 나에게 사회란 그저 인간관계를 뜻했으며 그 관계란 사람과 사람과의 대면, 나와 나의 지인과 내 친구들이 포함된 곳. 그것이 전부였다 . 나에겐 이것이 바로 사회인데 왜 굳이 어른들이 사회나가면 어떻다 저렇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던 것같다. 내가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은 대학생활 말이여서였다. 딱 이 시기 자기소개서를 쓸때이다. 이상하게도 서식이 너무나 비슷한 몇몇의 자기소개서에 내 얼굴과 학력. 활동경력들을 기입하며 느꼈다. 사회는 피상적인 공간이다. 내 존재와 정체성은 사실 유일하지만, 사회에서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은 '존재'로서의 가치 보다는 어떠한 상징으로 대변되는 "나"라는 존재인 것이다. 너가 어렸를때 어떤 는지 , 티비를 볼때 누워있는걸 좋아하는지 웃을깨 보조개가 이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나의 존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많은 접속어로서 표현되었고 또 그러기에 충분하다. 어떠한 활동을 한. 어떠한 것을 어느정도 할 줄 아는. 사람 또는 인력. 딱 여기까지인것같다. 사회는 이러한 심볼속에서 상호작용을 한다. 사회생활이란 이런 피상적인 존재로서 활동인 것이다.
꽤나 삭막해보였다. 사회활동을 한 이상. 대게의 만남은 초면일것이며, 그때되면 수식어만 바뀐채 또 하나의 역할을 하는
피상적인 나로 살아갈테니.
아름다움은 있을까?
어린왕자야... 나의 어린왕자는 죽었을까
이러한 것을 느끼고 어떠한 조언이나 촉구보다는 . - 이런 것을 말하면 축약하면 앞의 형용사를 더 붙이라는 말밖에 더될까? 예술이 소중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같다. 존재로서 사람을 알라는 것이 왜 나에게 감명을 주었는지 비로소 이해할수있었다.
앞으로는 그저 존재로서 소통할수있을까 고민이 된다. 여행을 가는 이유도 피상적인 나를 벗어던지고 존재로서의 샐활을 되찾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찾는게 아닐까.
다만 수식어의 획득은 자존감의 근원이 될수는 있어도,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은 것같다.
나또한 누구보다 많은 수식어를 붙이기위해 노력해왔고 또 따왔으니깐. 여기까지가 부정으로 가득찬 편중된 나의 시선에서 보는 잡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