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33주년 5.18 광주민주화 기념일입니다. 무고한 시민이 독재자의 총칼에 희생된 날이지만, 아직도 5.18과 북한을 연관시켜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조선과 동아를 비롯한 보수 신문에서는 탈북자의 증언이라며 5.18 광주 북한군 개입설을 버젓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와 보수 논객, 그리고 조선,동아, 보수 신문이 주장하는 '5.18 북한군 개입설'이라는 주장은 전두환의 신군부와 비슷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이고, 이 비상계엄은 '북한 남침설'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5.18 '북한 남침설'이 무엇이고, 그 근거와 거짓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정확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전두환의 치밀한 집권 시나리오'
전두환은 박정희가 가장 총애하던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속칭 보스라고 섬겼던 박정희가 죽자마자, 그의 죽음보다 어떻게 하면 박정희처럼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지에 골몰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자,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10월 27일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취임합니다.
전두환은 하라는 수사는 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가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자 12,12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 후 전두환은 신군부를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집권 시나리오를 작성하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비상계엄령을 위해 '북한 남침설'을 작성하여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 보고합니다.
전두환이 심야에 육군본부에서도 첩보 가치가 없다고 했던 '북한 남침설'을 올린 이유는 신민당과 공화당이 개헌안을 접수했고, 5월 22일 계엄령이 해제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5월 13일 전두환은 '북한 남침설'을 근거로 언론사와 관공서에 장갑차와 군인을 배치하고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북한 남침설'과 같은 전쟁 위협론 이외에는 명목이 없었기 때문이고, 결국 '북한 남침설'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 북한 남침설, 그 새빨간 거짓말'
북한 남침설은 1980년 5월 15일~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한다는 주장입니다. 박정희 사망 이후에 가장 우려했던 북한의 움직임과 전쟁 징후는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북한 남침설'은 많은 국민에게 공포를 주기 충분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하고 국무회의까지 보고된 '북한 남침설'의 근거는 중국을 방문한 일본 고위 관리에게 중국이 북한의 남침 계획을 제보했고 그 관리는 일본 방위청과 일본 내각조사실에 이 사실을 알린 것으로 나옵니다.
이후 일본 내각조사실(한국 중앙정보부에 해당)에서 북한 남침 징후를 포착하고 이를 중앙정보부에 제공했고, 이것이 '북한 남침설'의 근거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명분이 됐습니다.
자, 그럼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던 '북한 남침설'의 근거를 하나씩 검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을 방문해 북한 남침 사실을 들었다는 일본 고위 관리는 나카소네 전 일본 수상입니다. 그러나 나카소네 전 수상은 중국 방문 중에 중국이 북한의 전쟁 동향이나 징후는 말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 내각조사실의 한반도 담당관은 중앙정보부에 북한 남침설을 말한 적도 어떤 정보도 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북한 남침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내각조사실 한국담당 과장은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있자 일본 내 외국,국내 언론 및, 미군,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북한 남침설'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느냐는 문의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의 문서에 나온 일본 내각조사실 담당자가 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앙정보부의 '북한남침설' 발표 이전에 주일 대사관으로부터 북한 전쟁 징후에 대한 전화 문의가 왔었고, 자신은 그런 징후는 없었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 은 중앙정보부의 '북한 남침설'이 나온 뒤 5월 13일에 '북한 남침'에 대한 징후는 없었다고 본국에 보고했으며, 당시 주미 대사도 미국 정보부와 국무성 등 어떤 기관에서도 '북한 남침 징후'는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무도 하지 않은 말과 정보를 가지고 중앙정보부는 '북한 남침설'을 주장했고, 거짓말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5.18 광주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 5.18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의 허구'
북한 탈북자들이 방송에 나와서 5.18 시민군의 대부분이 북한군 특수부대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광주에는 북한군 특수부대가 탈북자들과 보수 단체가 주장하는 만큼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모두 반박하기는 지면이 길어져 힘들어, 주요 사안에 대해 진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북한군 특수부대 잠입 전제조건의 허구성
탈북자들과 보수 단체는 북한 특수군이 땅굴과 해상을 통해 침투해서 광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땅굴에 근무했던 군인들 수백 명이 전사했어야 합니다.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북한군 31명이 침투했을 당시에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수백 명의 북한군이 땅굴로 침투, 광주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렵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1980년 5월 13일 유고와 루마니아를 방문하고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12,12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50%로 봤지만, 그 이후는 북한 남침에 대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미국이 혹시나 모를 북한 남침에 경계를 강화했고, 북한도 이미 남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5월 21일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시작됩니다. 광주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대한민국 3공수,7공수,11공수,20사단,31시단,전교사가 모두 차단했습니다.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전국 곳곳에 배치된 군인과 경찰을 뚫고, 또다시 공수부대가 막고 있는 광주 외곽을 뚫고 시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을 전제입니다.
북한 특수군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수백 명이 5월 18일 광주에 시위가 일어나자마자 침투하거나,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곧바로 투입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수부대 작전은 최소한 침투 루트가 확보되지 않으면 작전 자체가 실현되기 어렵거니와 불과 며칠 만에 종료된 5.18진압 작전 기간으로 볼 때 북한군 개입설은 소설에 가깝다.오히려 북한이 광주에 북한군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포기했다는 증언이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결론은 북한군이 광주에 오지 않았다는 진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미군이 북한 동향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광주까지 오는 동안 미군이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해상,공중,육상에 모두 미군과 한국군이 경계를 서고 있는 상황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내려왔다는 사실이 진실이라면 기밀문서가 해제된 지금 시점에서 분명 밝혀지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북한군 수백 명이 넘어왔다는 공식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 M1소총 총상 환자가 많은 이유
탈북자와 보수 세력은 유독 M1이나 카빈 소총 총상 환자가 M16 총상 환자보다 많기 때문에 이것이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 증거가 된다고 주장 합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사인을 보면 M1이나 카빈 소총의 총상 환자가 M16 총상자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자 사인 보고서의 작성은 전두환이 장악한 보안사가 작성했습니다.
처음 광주 지역 의사,.검찰, 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검시 자료 원본에는 오히려 M16사망자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M1 총상 환자가 늘어났을까요? 이유는 피해자 보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5.18이 종료된 뒤 보안사 주도로 사체검안위회원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보안사는 M16 총상 환자를 폭도로 분류했고, 검안에 참가했던 의사 2명과 목사는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지만 (의사와 목사의 주장으로) 보안사는 이정도 비율이면 폭도수가 너무 적다고 해서 상호 합의하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결국, 사체에 난 총상이 M16인지, M1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이것이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 증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광주에서 죽은 한국군이 총 23명이었는데, 그 13명은 진압군끼리의 충돌로 사망했고, 대략 7~10명 정도의 군인이 무장 시민에 의해 죽었습니다. 수백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들어와서 겨우 10명 미만의 한국군을 사살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 특수군 개입설 주장은 헛된 증언에 불과합니다.
○ 탈북자 VS 기자의 시각
요새 종편 채널에 자주 등장해서 5.18 광주 당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입니다.
임천용은 언론에 나와 광주에 북한 특수군 수백 명이 침투해 민간인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증언은 그리 신빙성이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에서는 북한군 450명이 그해 12월 기자회견에서는 1개 대대가, 2007년 뉴스한국에서는 2개 대대 600명이 2013년 TV조선에서는 1개 대대 등 침투인원수가 매번 달라집니다. 여기에 침투 방법도 배를 이용해 침투했다가 해놓고는 잠수함, 나중에는 땅굴까지 다양해집니다.
침투 인원,침투방법,생환자수 등이 매번 바뀌는 그의 증언을 믿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오로지 그의 주장이 진실인양 TV조선과 보수 단체는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0년 광주에는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인들이 다수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정부에서 폭도와 간첩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해외 언론 기자들은 이런 정부의 발표를 검증했습니다. 그러나 간첩이나 북한 특수군의 개입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극우 논객 중의 한 명이었던 조갑제닷컴의 조갑제씨는 광주의 북한 특수군 개입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조갑제씨는 광주를 취재했던 기자 중의 한 명입니다. 만약 광주에 북한군이 있었다면 조갑제를 비롯한 기자와 신군부가 모를 리 없었고, 33년이 지난 시점에서조차 그들이 말을 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광주를 취재했던 기자 중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증언이 바뀌는 탈북자들의 말만 믿고 1980년 광주에 수백 명의 북한 특수군이 침투,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단순한 생각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최소한 인간답게 생각하려는 행동에 있습니다. 1980년 광주에 있었던 아픔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없고 오로지 권력과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사는 듯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광주를 경험했습니다. 그 아픔을 아직도 잊지 못해 가슴 한켠에 분노와 좌절, 그리고 한이 어린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위로를, 남아 있는 자에게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말도 안 되는 왜곡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1980년 5월,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33년 전 광주에서 희생당한 모든 이들의 넋에 고개 숙여 고마움와 미안함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