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과 영국, 캐나다는 맨해튼 계획에 따라 우라늄을 원료로 한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고, 이 무기가 완성되는 대로 추축국 세력을 상대로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초 이들이 생각했던 첫 번째 목표는 나치독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직 원자폭탄에 대한 최종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실제 1945년 7월에 프로젝트 완료)에서 나치독일이 1945년 5월에 항복을 선언하면서 추축국 세력은 일본만이 남게 됩니다.
2. 이 무렵 태평양 방면의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 일본은 연합군의 항복요구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일본 본토가 폭격당하면서 연일 불지옥이 펼쳐지자 슬슬 항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일본은 자신들이 챙길 거 다 챙겨먹는 조건부 항복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거의 휴전하자는 거에 가까운 거라서 연합군 입장에서는 "아니 이 새끼들이?"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시작인 진주만 공습의 경우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기습이었습니다. 물론 일본은 그 전에 전달하려 했다고는 해도 당시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일본이 비열한 짓거리를 한 것이었고, 덕분에 미국이 전의를 불태우는 한 가지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일본이 보여준 미친 짓으로 인해서 당시 미국의 여론은 일본은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들이었습니다.
3. 미국이 일본 본토로 향해 올라가면서 두 차례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가 이오지마였고, 두 번째가 오키나와였습니다. 문제는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미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는 점입니다. 당시 분석에 따르면 일본 본토 상륙전에서 백만 단위의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이었으니 크게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 본토의 여론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는데 "상륙해서 병력 희생늘리지 말고 그냥 말려죽이자!"란 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주변에 기뢰를 잔뜩 뿌리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살포하여 벼를 말려죽이는 식의 대응안도 고려될 정도였습니다.
4. 당시 원자폭탄을 처음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위력과 위험성이 어느정도인지 몰랐다는 점도 한몫 했습니다. 원래는 "우리 이런 무기도 가지고 있음. 쫄리냐? 쫄리면 뒈지든지" 정도로 대충 겁만 주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보기에 그냥 뭔가 번쩍하고 말면 "오오! 천황님의 가호다!"라 울부짖으며 더 미쳐돌아갈 수도 있었기에 이 안건은 취소되고 확실하게 조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원폭 대상으로 결정된 도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 코쿠라, 쿄토였습니다. 선정기준은 일본제국의 핵심도시이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아주 효과적으로 박살낼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를 통해 충격과 공포를 배가시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다만 교토는 최종적으로 제외됐는데 교토가 얻어맞으면 일본이 소련에 붙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히로시마는 원래 처음 투하 목표로 정해져 있었고, 두 번째 폭탄은 코쿠라에 떨어뜨릴 예정이었습니다. 다만 코쿠라 상공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도시가 보이지 않았고, 나가사키 상공은 때마침 구름이 걷혀 도심지가 잘보였기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었던 폭격기들이 나가사키로 날아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폭격당했습니다.
사실 이 때 두 번째 폭격은 피할 수 있었는데 일본이 계속 조건부 항복을 고집하는 바람에 "이 시벌놈들이 아직 매운 맛을 덜 봤군"이라면서 하나 더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안맞을 수도 있었는데 일본이 똥고집 부리면서 뻐팅기다가 크게 얻어맞은 셈입니다. 사실 이 때 일본이 시범케이스로 맞은게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때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수용했으면 이 무기의 위력을 몰랐기 때문에 아마 다른 전쟁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냈을지도 모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