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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제발 반박해주세요 ㅠㅠ 친구가 자꾸 이거 들이미네요
게시물ID : history_126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대만때리쟈
추천 : 1
조회수 : 145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1/22 20:10:14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조선시대 문헌들은 죄다 거짓말입니다.
 
본 답변은 제 양심을 걸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조사를 통해 얻은 결론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알립니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대략 이렇습니다.
 
1. 신라시대에 이사부가 우산국 (울릉도)을 정벌하면서 거기에 독도도 포함된다. 
 
 
-> 삼국사기 원문을 보시죠.
 
13년 여름 6월,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울릉도라고도 한다. 지방은 1백 리인데,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계락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아무리 읽어봐도 '울릉도'에 대한 설명 뿐이지 '독도'로 보일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2. 일본이 저렇게 반박하자 한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삼국사기에 독도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건 인정한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도와 무릉도가 맑은날에 서로 보인다고 기록해놓음으로써 여기 우산도는 독도일수밖에 없다. 고로 신라시대에 울릉도가 편입되면서 독도도 같이 편입됐다고 보는게 맞다.
 
 
-> 세종실록지리지에 과연 뭐라고 쓰여있을까요? 함 봅시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진현을 읽어보면 울진현 주변을 설명한뒤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오게 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40009004_002&tabid=k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짐승을 놓아서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울진현 주변을 묘사한뒤 우산도와 무릉도를 설명한다면 아무래도 울진현에서 맑은날에 
서로 멀지 않은 우산 무릉도를 바라본걸 설명한거라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두 섬을 설명하고 바로 뒤에 뭐라고 쓰여있습니까? 두 섬은 울릉도라고 하였다라고 하고
지방 (땅 크기)은 100리라고 합니다.  
지방 100리는 독도를 포함할수 있는 크기가 아니고 두 섬은 울릉도라고 하였다는건
실제로 한 섬인 울릉도를 두 섬으로 착각했단 소리가 되겠죠. (본토에서 보이는 울릉도를 관찰한다면
충분히 한개인지 두개인지 착각할만 합니다.)
거기다 밑에 김인우 얘기가 나오는데 세종실록지리지는 김인우의 보고를 어느정도 참고했단 소리죠.
김인우는 우산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적이 있습니다.
 
 
태종실록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우산도에 86명이 살았답니다. 하지만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입니다. 우산도는 독도가 맞을까요?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 무릉 (사실) 한 섬을 두 섬으로 착각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사료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ㆍ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이야 말로 바라보는 시점이 울진 동해안이라는건 상당수의 한국학자들도 인정하는바 입니다.
저 본토에서 관찰되는 우산도 무릉도가 어떻게 보이는지 자세히 묘사했으며 지방이 백리라는건 세종실록지리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는걸 알 수 있죠.
결정적으로 일설에는 우산 울릉이 원랜 한 섬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한국학자들은 저걸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일설은 일설일 뿐이고 본설은 두 섬이다.
여기에 대한 제 반박은 이렇습니다.
일설이 나온거 자체가 우산도 무릉도의 모습을 제대로 몰랐단 소리가 아니냐
울릉도에서 독도를 설명한 기록이라면 울릉도에 가서 독도를 본단 소린데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면서 일설에 두 섬이 한 섬이라는 기록이 들어간다는게 말이 되느냐
 
저 시기엔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포함 수많은 고지도들이 우산도가 무릉도 제각각 방향에 그려지게 됩니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봤다면 어디가 동쪽인지 알텐데 저렇게 우산도를 그릴수가 없죠.
반면 본토에서 보이는 울릉도가 우산 무릉으로 나뉘어진 두 섬이라고 생각했다면 고지도에 저렇게 그렸다는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동국여지승람이 우산 무릉이 사실은 울릉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당대 지식인들이 울릉도를 바라보면서 동국여지승람의 문구를 인용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굵은글씨와 아래 굵은글씨를 중점적으로 보시죠
 
김만귀

신이 옛날에 강원도사江原都事가 되었을 때,[5] 해상海上에 이르러 거주하는 사람에게 울릉도를 물었더니 섬을 가리켜 보여주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일어나 멀리 바라보니 세 봉우리가 역력했는데, 해가 뜰 때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에서 제주濟州를 바라본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가까운 편입니다."
 
 
남구만
 
본도本島(울릉도)는 봉만峰巒과 수목이 육지陸地로부터 역력歷歷하게 바라다 보이고, 무릇 산천山川의 굴곡과 지형이 넓고 좁음 및 주민의 유지遺址와 나는 토산물土産物이 모두 우리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 이란 서적에 실려 있어, 역대에 전해 오는 사적이 분명합니다
 
 
허목
 
평해의 월송포. 우산, 울릉 한 섬인데, 세 봉우리가 높고 험준하게 솟아 있는 것이 바라다 보인다. 바다가 맑으면 산과 나무를 볼 수 있고 산 아래 흰 모래는 아주  멀리 있다. 옛 우산국이다. 
 
 
김시습
 
다시 동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ㆍ오대산五臺山에 올라 동해 끝까지 다 구경한 다음 월송정越松亭에 노닐며 울릉鬱陵 우산도于山를 바라보았다.
 
 
 
굵은글씨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울릉도를 자세히 묘사한
세봉우리 수목 흰모래 이걸 당대 지식인들도 울릉도를 보면서 똑같이 묘사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본토에서 울릉도를 보면서 울릉도의 수목과 흰모래가 보인다는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걸 관념적으로 표현한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색할건 없습니다.)
거기다 김시습과 허목은 우산도까지 언급했고 허목은 두 섬은 사실 한 섬이라는거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독도 문제로 인해 안 가르치지만 어느 기록을 뒤져봐도
당대 조선인들은 본토에서 울릉도를 관찰하며 한섬인지 두섬인지 헷갈려했다는게 명백합니다.  
저 헷갈려한 두섬을 지도엔 두 섬의 위치를 마음대로 그려넣은거죠
 
결론: 이때 우산도는 무릉도와 함께 둘다 울릉도를 지칭하는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저러다 유명한 안용복 사건이 발생합니다.
안용복 사건은 안용복의 거짓말로 인해 복잡한게 많으니 개략적인것
안용복 사건 이후로 조선 지식인들이 무슨 섬을 우산도로 인식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안용복은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자(子)산도(于산도를 잘못읽음)에 얼쩡댄다길래 쫓아냈다는 진술이죠.
동시기에 일본은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공교스럽게도 안용복은 자산도는 일본인들이 송도라고 칭한다고 진술함으로써
한국은 안용복이 독도를 지켰다는 근거로
그리고 우산도는 독도라고 더욱더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자산도가 독도가 맞을지 그의 진술을 차근차근 분석해봅시다.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굵은 글씨를 주목해서 본다면 안용복의 진술을
독도로 볼 경우 말이 안된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입니다. 근데 안용복은 자산도(송도)에 왜인들이 산다고 했죠.
그리고 그 섬에서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다는데 독도는 당시에 사실상 불을 피우기엔 불가능한 섬입니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자산도에 갔는데 얼마 안걸렸다는식의 진술로 볼때 자산도는 울릉도 2km 옆에 떨어진 죽도로 보는게 타당한것 같습니다. 
 
중요한건 안용복 사건 계기로 조선 정부가 장한상과 박석창을 시작으로 해서 정기적으로 울릉도에 수토관을 보냅니다. 
장한상은 울릉도에 5리 떨어진 해장죽전이 자라는 죽도와 300리 떨어진 독도를 발견했습니다만 두 섬다 우산도라고 부르지 않았고 직접 조사한건 울릉도와 죽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후임 박석창이 다시 울릉도를 조사해서 울릉도 도형을 그려 올리는데
울릉도 동쪽 바로 옆에 작은 섬을 그려놓음으로써 해장죽전 소위 우산도라고 써넣습니다. 
해장죽전 '소위' 우산도가 죽도라는건 한국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저걸 인정함으로써
소위 우산도는 공도정책으로 인한 발생한 혼란이고 그냥 우산도는 독도라고 주장하지만
공도정책 전에도 이미 제가 설명드렸다시피 우산도는 독도라고 볼 수 없죠
오히려  '소위' 우산도라는거 등장했다는거 자체가
본토에서 우산 무릉도를 바라봄으로써 우산도의 인식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는 소리가 되겠죠.
저 안용복 사건과 박석창의 소위 우산도의 계기로 다음과 같은 울릉도 우산도 지도들이 제작되고 문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저 우산도가 독도로 보이십니까?
장한상 박석창 두 수토관이 울릉도를 제대로 조사한 계기로 우산도는 저렇게 죽도 위치에 죽도 모양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신경준이 쓴 동국문헌비고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우산도와 울릉도가 울진 동쪽 350리에 있다. (중략)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 (안용복 진술 인용)
 
한국은 우산도를 왜인들이 송도라고 불렀다는 문장만 쏙 들이밀며 우산도는 독도라고 주장하지만
제대로 해석하면 우산도를 죽도처럼 설명한 기록들만 있는 마당에 
저 섬을 왜인들이 송도라고 했다는건 오히려 독도를 인지하지 못했단 소리가 됩니다. 
결정적으로 우산도와 울릉도는 울진 동쪽 350리에 있다고 해놓음으로써 이 거리는 울릉도 죽도 거리와 일치합니다.
 
 
 
 
 
 
4. 그 외 한국이 과거 독도였다고 주장하는 섬에 대한 반박
우산도 말고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가 독도였다는 한국측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삼봉도는 성종실록, 가지도는 정조실록, 석도는 대한제국 칙령에 등장하는 섬입니다.
석도는 맨 마지막에 설명하도록 하고 삼봉도와 가지도에 대한 기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삼봉도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영흥(永興) 사람 김자주(金自周)가 말하기를, ‘삼봉도(三峯島)를 가 보고 또 그 모양을 그려 왔다.’고 하므로, 김자주를 보내어 바치게 합니다.”
하였다. 명하여 물어 보게 하니, 김자주가 대답하기를,
“경성(鏡城)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4주(晝) 3야(夜)를 가니, 섬이 우뚝하게 보이고, 사람 30여 명이 섬 입구에 벌려 섰는데 연기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흰 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조선 사람이었는데, 붙잡힐까 두려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유의(襦衣) 두 벌을 하사(下賜)하였다.
 
 
삼봉도에 사람이 30명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엔 없지만 1000여명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국 어느 학자는 저 30명은 사실 독도에 사는 물개를 사람으로 착각한거라고 반박했지만
그 밑에 흰 옷과 불을 피운건 뭐냐는 주장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단 우스개 소문도 있더군요.
 
 
가지도
 
울릉도의 수토(搜討)를 2년에 한 번씩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거행하기로 이미 정식(定式)을 삼고 있기 때문에, 수토관 월송 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에게 관문을 띄워 분부하였습니다. 월송 만호의 첩정(牒呈)에 ‘4월 21일 다행히도 순풍을 얻어서 식량과 반찬거리를 4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학(倭學) 이복상(李福祥) 및 상하 원역(員役)과 격군(格軍) 80명을 거느리고 같은 날 미시(未時)쯤에 출선하여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는데, 유시(酉時)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레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22일 인시(寅時)에 거센 파도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바다 멀리서 두 척의 배 돛이 남쪽에 오고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참에 격군들이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 안개 속으로 은은히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아마 섬 안의 높은 산봉우리일 것이다.’ 하기에, 만호가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그것은 섬의 형태였습니다. 직접 북을 치며 격군을 격려하여 곧장 섬의 서쪽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에 정박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살펴보니, 계곡에서 중봉(中峰)까지의 30여 리에는 산세가 중첩되면서 계곡의 물이 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논 60여 섬지기의 땅이 있고, 골짜기는 아주 좁고 폭포가 있었습니다. 그 왼편은 황토구미굴(黃土丘尾窟)이 있고 오른편은 병풍석(屛風石)이 있으며 또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는데, 예전에 한 해 걸러씩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지고 있습니다.
24일에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고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닷속에 있는 그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하여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25일에 장작지포(長作地浦)의 계곡 어귀에 도착해보니 과연 대밭이 있는데, 대나무가 듬성듬성할 뿐만 아니라 거의가 작달막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조금 큰 것들만 베어낸 뒤에, 이어 동남쪽 저전동(楮田洞)으로 가보니 골짜기 어귀에서 중봉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 사이에 세 곳의 널찍한 터전이 있어 수십 섬지기의 땅이었습니다. 또 그 앞에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북쪽의 것은 방패도(防牌島), 가운데의 것은 죽도(竹島), 동쪽의 것은 옹도(瓮島)이며, 세 섬 사이의 거리는 1백여 보(步)에 불과하고 섬의 둘레는 각각 수십 파(把)씩 되는데, 험한 바위들이 하도 쭈뼛쭈뼛하여 올라가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서 자고 26일에 가지도(可支島)로 가니, 네댓 마리의 가지어(可支魚)가 놀라서 뛰쳐나오는데, 모양은 무소와 같았고, 포수들이 일제히 포를 쏘아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구미진(丘尾津)의 산세가 가장 기이한데, 계곡으로 십여 리를 들어가니 옛날 인가의 터전이 여태까지 완연히 남아 있고, 좌우의 산곡이 매우 깊숙하여 올라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어 죽암(竹巖)·후포암(帿布巖)·공암(孔巖)·추산(錐山) 등의 여러 곳을 둘려보고 나서 통구미(桶丘尾)로 가서 산과 바다에 고사를 지낸 다음,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대저 섬의 둘레를 총괄하여 논한다면 남북이 70, 80리 남짓에 동서가 50, 60리 남짓하고 사면이 모두 층암 절벽이며, 사방의 산곡에 이따금씩 옛날 사람이 살던 집터가 있고 전지로 개간할 만한 곳은 도합 수백 섬지기쯤 되었으며, 수목으로는 향나무·잣나무·황벽나무·노송나무·뽕나무·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아욱·쑥·모시풀·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충(羽虫)으로는 기러기·매·갈매기·백로가 있고, 모충(毛虫)으로는 고양이·쥐가 있으며, 해산물로는 미역과 전복뿐이었습니다.
30일에 배를 타고 출발하여 새달 8일에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섬 안의 산물인 가지어 가죽 2벌, 황죽(篁竹) 3개, 자단향(紫檀香) 2토막, 석간주(石間朱) 5되, 도형(圖形) 1벌을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 하였으므로,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냅니다.”
 
 
기록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울릉도 주변을 돌다가 가지도에 가서 가지도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네요.
굵은 글씨가 가지도에 대한 설명인데 독도로 보기엔 무리가 뒤따른다는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대한제국땐 독도를 인지하고 정식적으로 편입한 기록이 있는가?
 
  
 
당시 대한제국이 생각한 자국 최동단입니다. 1899년에 제작되었구요.
130도 35부 울릉도 죽도 (실제 130도 58부의 오차)
죽도 위치에 죽도 모양으로 우산도가 표기되었고 독도는 없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자국 최동단을 130도 35부로 한 계기가 있습니다.
 
1882년 이규원이 고종의 명을 받아 울릉도를 조사하러 갑니다.
그는 울릉도를 조사하며 울릉도에서 죽도와 관음도를 발견하고 울릉도 주위를 둘러보는데
독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1900년 칙령 공표하기전 우용정이 울릉도를 조사하러 가는데 역시나 그가 올려 그린 도면이나
기록으로 봤을때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 상태로 칙령을 공표하고 그 내용엔 울릉도 죽도 석도를 관할한다고요.
 
 
여기서 울릉도는 현 울릉도 죽도는 현 죽도
여기서 석도는 현 어떤 섬일까요?  (한국은 석도가 독도라 주장하지만)
한국은 사투리 가설을 근거로 해서 독도로 만들지만
석도는 어떤 섬이라고 단정 지을순 없습니다. 석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거든요.
 
 
오히려 칙령 공표하기전 독도를 언급한 기록이 없다는것과
자국 최동단을 울릉도 죽도로 했다는 점
울릉도 주변에 자잘한 돌섬들이 많고 고지도에 자잘한 돌덩이들이 그려져 있다는것을 감안할때
석도는 저 돌덩이들을 포함한 섬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거기다 1904년 울릉도에 살면서 독도에서 어업하는 일본인들로 인해
울릉도에 사는 조선인들도 독도를 발견하면서 이 섬을 조선인들은 독도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일본측에 있거든요.
저 기록들을 감안했을때 석도와 독도의 개연성은 파괴된다고 봅니다.
 
 
나중에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다고 울도군수 심흥택에 알리자
심흥택은 울릉도에 살면서 독도에서 어업하는 사람들로 인해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는지 (대한제국은 정식으로 편입한적이 없음) 
그는 독도가 일본에 편입됐다고 중앙 정부에 보고하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황성신문에 실립니다.
 
그 답변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울도군의 관할 섬은 울릉도 죽도 석도이며 동서 60리 남북 40리 총 200리다.
 
분명히 독도가 편입됐다고 보고했는데 독도가 아닌 석도가 그대로 등장했다는건
석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있지 않은 이상
아무리 봐도 독도와 석도는 다른 섬이라고 판단할수밖에 없습니다.
 
동서 60리 남북 40리 200리에 대해 한일 학자들의 주장이 갈리는데
한국 학자들은 동서남북 200리가 울릉도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동서남북 200리는 울도군 전체 크기를 말하는것이고 여기에 독도는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 학자들 말대로 울릉도 크기라고 해도 독도를 설명하는 석도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석도는 어느 섬인지 단정지을수 없습니다.
 
거기다 1955년에 정부가 발간한 독도문제개론에선 한국정부는 석도는 독도가 아님을 인정했었습니다.
 
 
아래 유튜브 영상 링크 붙이고 제 답변 요약하면서 긴 글 이만 마칩니다.
 
우리나라가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 않는 이유
http://www.youtube.com/watch?v=QZZPuQxTI34 
 
한국엔 독도를 그린 고지도가 존재할까? 한일 고지도의 비교
http://www.youtube.com/watch?v=P_hWLuCUvwY
 
독도 검증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U49FZc23MoU
 
 
1. 조선 정부는 역사적으로 독도를 인식한적 없다.
2. 한국학자들이 독도라고 주장하는 우산도는 조선 중기 이전은 울릉도 후기부턴 죽도며
독도를 가리키는 결정적인 사료는 없다.
3. 삼봉도 가지도 석도도 독도와 일치하는 사료는 없다.
4. 1904년 들어서야 일부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사는) 독도를 인지하긴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여전히 자국땅은 석도라는 답변을 함으로써 독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5. 17세기부터 독도를 인식한  일본은 대한제국이 독도를 정식적으로 편입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파
1905년에 무주지 선점을 내세워 독도를 편입했다.







출처는 네이버 지식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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