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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비극적이었던 투쟁, 바르샤바 봉기
게시물ID : humorbest_6763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66
조회수 : 3290회
댓글수 : 1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5/13 22:08:1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5/13 20:06:58


바르샤바 봉기

Powstanie warszawskie(Warsaw Uprising)


1944년 8월 1일 폴란드인들이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봉기.

45000명의 자유폴란드군과 수십만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2차세계대전 당시 가장 규모가 큰 봉기였으며 아직도 폴란드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의거이다.


(1) 배경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최소 20만에서 60만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빨치산 항쟁으로 나치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다.

마침 소련군이 6월에 시작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은 거의 괴멸당하다시피하여

바르샤바에선 이미 소련군의 전투기를 볼수 있었으며 대포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으니

모두들 곧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입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소련은 7월 하반기에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무력항쟁을 촉구하고 나섰다.


거기다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정부에게 4가지를 약속했다.

1. 대독전 승리를 위한 협력에 기반한 항구적인 폴란드-소련관계의 수립.

2. 해방 폴란드 영토를 보장

3. 폴란드 영토 내 폴란드 정부의 조속한 수립 및 조속한 민주적 선거 실시.

4. 바르샤바 항쟁에 대한 즉각적인 지원


비록 준비를 모두 끝내지는 못했으나 자유폴란드군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바르샤바에 약 4만5천명에 달하는 연합군을 결성, 8월1일에 봉기하였다.

그러나 이 네가지 조항중 단 하나도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었다.


(2) 봉기!

(위의 지도는 바르샤바 봉기당시 자유폴란드군이 점거했던 지역이다)


8월 1일 오후 5시, 바르샤바에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봉기가 일어났다.

자유폴란드군만 4만5천명, 그외 참가한 시민들만 수십만에 달했다.

나치도 봉기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정도로 대규모일줄은 몰라 매우 당황하였고

무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다.

해방지역엔 봉기군의 신문이 배부되었고 자체 라디오 방송인 섬광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3) 투쟁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약 3만명이 바르샤바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자유폴란드군과 달리 기관총과 대포,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외곽에만 9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거기다 제19기갑사단이 봉기진압을 위해 바르샤바에 도착했고 폭격기로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었다.

봉기초기에만 시민 65000명이 죽었고 8월 14일에는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구시가지가 독일군에 함락당했다. 

이곳에서 봉기군은 7,500여 명이 사상했고, 독일군도 4,000여 명이 사상했으며, 시민도 30,00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하고 37,000여 명(부상자 포함)만이 살아남아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폴란드군은 곳곳에서 바르샤바로 모여들었다. 결국 독일은 바르샤바를 빼앗지 못하고 9월에 이르게 되었다.

폴란드군은 소련이 지원을 올것이라고 믿고 끝끝내 피로써 바르샤바를 지켜내었다.


(4)좌절


그러나 스탈린은 그들을 버렸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독립을 약속했고, 망명정부에게 이 약속을 재확인했으나 

사실 스탈린은 폴란드를 자신의 위성국가로 만들 생각뿐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스탈린에게 바르샤바 항쟁을 위한 지원을 위해 자국비행기가 소련측 비행장을 이용할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다.

스탈린은 수십만에 달하는 폴란드군이 봉기에 가담하자 이들이 훗날 소련에게 위험할것이라고 판단했고

도우려 하지 않았다. 사실 폴란드를 위해 나치와 싸울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폴란드를 위해 소련과도 싸울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어찌보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봉기를 일으키라고 선동한 소련으로서는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일부 서방세력의 물자지원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은 보급품 부족과 무기고갈로 궁지에 몰렸다.

영웅적이었던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4년 10월 4일, 꼭 63일만에 바르샤바 봉기가 끝났다.

약 25만명의 바르샤바 시민이 죽었고 15000명의 자유폴란드군이 전사, 20000명은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17000명 전사, 9000명 부상으로 집계되었다.


(5)결과


폴란드의 독립운동가들의 운명은 매우 비극적이었다. 1945년 1월,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군은

자유폴란드군이 스스로 나타나 무기를 내놓기를 요구했다.

약 5만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에 따라 행동했으나 모두 체포되어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무기를 땅에 묻고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게 된다.

그러나 소련의 보안부대는 이를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남은 독립운동가들은 소련의 압제에 맞서서 저항했다. 소련은 이들을 체포, 16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6일동안의 재판(일명 Trial of the 16)을 진행했다. 소련은 허위증언과 고문으로 자백을 얻어내어 그들을

나치부역죄로 처벌하였다. 나치에 맞서서 독립운동한 이들이 나치부역자로 몰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폴란드 국민군 총사령관 오쿨리츠키 장군은 감옥에서 살해됬으며 나머지 간부들도 대부분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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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http://mirror.enha.kr/wiki/%EB%B0%94%EB%A5%B4%EC%83%A4%EB%B0%94%20%EB%B4%89%EA%B8%B0

이상철의 '유럽의 중원 폴란드'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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