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비가 그쳤네요.
아쉽습니다.
기왕이면 계속해서 비를 맞고 싶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네요.
뭐냐구요? 웬 놈이냐구요?
죄송합니다. 뜬금없었나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어찌됐든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시체입니다 .
자그만치 10년은 본업으로 시체를 삼았습니다.
정확히는 시체 '연기' 이지만요.
여러분도 안방 극장서 저를 봤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뒤통수나 등짝으로나마, 분명 TV에 여러 번 출연했었으니까요.
아아, 마땅한 대표작은 없어서, 당당하게 구는 게 머쓱해지네요.
오늘 조감독인 김형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하드라마가 진행 될 것 같다며 "한 잔 거하게 퍼야지?" 하더군요. 김형이 저를 꼬박꼬박 기억해 주는 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항상 이름 없는 시체 엑스트라만 하는 사람과 조감독이라니, 불협화음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도 대게 술값은 김형이 내고 있으니까, 불만은 없습니다.
좀 전까지 김형과 있었습니다. 진짜 금방 전까지 저랑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네요. 김형도 참… 김형과 알고 지낸 게 벌서 9년째인가요? 10년째인가요? 그 즈음 됐나봅니다. 김형이 카메라 장비며, 의상 박스, 도구 박스, 전선 뭉탱이 짊어지고 뛰어다닐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하하, 김형 옛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선배들에게 뚱더지 라고 불리던 건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수하는 특급 비밀이구요.
이젠 조감독이니까요.
오늘 김형에게 대본을 받았습니다. 시체 역할만 하는 놈이 무슨 대본이냐구요? 놀라지 마세요? 이번엔 사실 대사가 한 페이지 분량이나 있는 조연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제가 크게 한 잔 샀습니다. 혜정이에겐 비밀입니다?
혹시
송강호라는 배우를 알고 계시나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배우입니다. 알고 계시는 지 물어 본 다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시체 역할만 맡는 놈이요. <반칙왕>,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박쥐>, <괴물> 최근에는 <설국열차>, <관상> 이 영화들 중 단 한 편이라도 보지 않는 젊은 친구가 과연 한국 땅에 존재 할까 싶기까지 하네요.
스크린을 압도하는 최민식 같은 배우나, 안개처럼 자욱하고 진득한 인상을 풍기는 김윤석 같은 배우도,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송강호 같은 배우도, 주연배우란 칭호를 얻기까지 짧게는 7년 길게는 14년의 세월을 '견뎠다'고 하니까요. 저는 사실 그 들에게 비하면, 재능도, 노력도, 열정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저는 시체 주말반이거든요. 평소에는 용달차 운전을 부업이자, 단순 생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체 흉내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운전 중에 시체 흉내 내다간 큰일내려구요? 이유가 좋죠.
먹고 살아야겠으니까요.
거의 시체 연기만 해온 저이지만
10년 만에 대사다운 대사를 받았네요.
그나저나 여러분은 아스팔트 위에 누워 본 일이 있으신지요? 저는 지금 아스팔트 위에 있습니다. 잘게 부서지며 내린 비덕에 등이 눅눅해졌지만, 의외로 누워볼 만 한 것 같네요. 권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어릴 적 극단에 있을 때는 뭣 모르고 벤치에 누워 잠들기도 많이 했습니다. 제 몸 건사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릴 것도 없었죠. 돈이고 집이고 없으면 어때? 스스로의 자괴감도 패기로 억누르던 시절입니다.
벤치에 누워 눈을 떠보면
밤하늘이 넓게 펼쳐집니다. 그저 눈만 떴을 뿐인 걸 생각하자면, 수지에 맞는 잠자리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무료 잠자리 치고는요. 오늘 밤은 유난히 어둡네요. 먹구름이 별들을 모조리 삼키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별들 대신 고갯길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시내의 불빛만 휘황하고 찬란하고 합니다. 혹시 당신도 저 불빛 안에 있는 건 아닌가요? 잘 모르는 거지만, 왠지 저 불빛 안에 당신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창문 밖으로 제가 보이진 않나요?
누구라도 지금의 저를 좀 봐줬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누구보다 어서 빨리 김형이 지금 제 모습을 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배우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연기를 해내는 순간이 될 테니까요. 제 리얼한 외관이 좀 징그럽진 않나요? 옆구리로 튀어나온 갈비뼈 같은 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꺾여있는 제 다리를 본다면 아마 어머님들은 급하게 아이들 눈을 가리겠지요? 김형은 저의 모습을 보면 혀를 두를 겁니다. 그럼 저는 김형에게 염원하던 그 대사를 하겠습니다.
"나 준비 많이 했어. 정말이야."
김형은 분명 저에게 박수를 줄 겁니다. 어느 누구에게보다 어느 어떤 장면보다 뜨거운 박수를.
아, 조명이 들어왔네요. 이렇게 사람들이 배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조명을 밝히는 법이 있나요? 어쩌겠습니까. 슛이 들어 왔으면, 배우는 배우답게, 시체는 시체답게, 본연의 모습을 보여야지요.
감은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조명을 느끼고 있자니, 7년 전 여름이 떠오릅니다. 그게 벌서 7년이나 됐나 싶네요. <주몽>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저는 전쟁터에서 파리 목숨을 달고 등장하여 찍소리도 못한 채 검풍에 베여 죽는 역할을 맡았었죠. 그 여름, 그 삼복더위에 두툼한 갑옷을 차려입고, 투구까지 쓴 채로 뙤약볕에서 세 시간을 땅바닥에 누워 보냈습니다. 저 말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만, 저는 유독 힘들었습니다. 오늘 밤처럼 피 칠갑을 뒤집어써야 했었으니까요. 여름날 뙤약볕에 바짝 말라가는 가짜 피는 가쯔오부시만 같았습니다. 그 왜, 우동 위에 얹어지는 얇은 거 있잖아요. 진득하게 제 볼 살 위에서 그 놈이 굳어가며 지글지글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응당 저는 시체인지라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찌나 그 날 해가 쨍쨍했던지, 지금 제 앞의 조명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도, 그날 눈을 감고 얻어맞았던 그 햇볕이 훨씬 밝게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매번 빨지 않고 돌려 입히던 군인 의상에 찌든 땀 냄새는 또 어땠구요. 하하. 이젠 옛날 일입니다.
이제는 저도 슬슬 진짜 궤도를 타기 시작했으니까요.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분량이 한 페이지나 됩니다. 혜정이는 그러더군요.
"이제 대박 나는 날만 기다리면 되?"
말문이 턱하고 막힐만큼, 혜정이의 말은 벅찬 기운을 제게 줬습니다. 꼭 다음 주면 주연 배우가 될 것 처럼, 그래서 대박이란 게 정말로 내 눈 앞에 현실이 되어 올 것 처럼요. 그 어떤 격려보다 가슴을 치는 물음이었습니다. 역시 혜정이 답다고나 할까요.
혜정이요?
혜정이는 분장팀에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습니다. 혜정이는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평가하진 않더군요. 저는 매번 그 말을 부정하곤 하죠. 혜정이는 분장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아트입니다. 매번 혜정이에게 분장 받으려고 긴긴 줄을 섰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얼뜨기 들이 혜정이 하얗고 가는 손에 분장을 받았으면 했죠. 기분 탓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직도 확신해요. 분명 혜정이는 다른 사람들 보다 제 분장을 더 정성들여 해줬습니다. 덕분에 혜정이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온 것이기도 하고요. 지금와서 솔직히 그 때 일을 대답하라고 물어도, 새침하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마는 혜정이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제 대박이 나는 그 날까지만 견뎌내면, 혜정이에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힐 겁니다. 누구보다도 하얀 색이 잘 어울릴 겁니다. 꼭 씌웁니다. 죽어도. 극단을 나오면서 제 스스로 한 약속입니다. 사실은 배우로서 성공 말고, 사회인으로서 큰돈을 벌게 되면… 하는 이야기였지만요.
"그만해 이제! 빨리 나와 시간 없어!"
조명 너머에서 남자가 소리칩니다. 스스스스 풀잎이 바람에 갈리는 소리에 섞여 자동차 엔진소리도 들리네요. 저 남자는 화가 났을까요? 긴박한 표정이 압권이네요. 그는 조명 앞으로 나타나 긴 그림자를 만들어 저를 덮습니다. 그리곤 두리번두리번 합니다. 발걸음은 갈 길을 모르는 듯 갈팡질팡, 허둥지둥 그리곤 다시 자동차를 보며 소리칩니다.
"야!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야! 하아, 좀!"
그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도 상관없다는 듯 열변을 토합니다. 좋네요. 타고 난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형과 이 고개를 자주 올라왔었습니다. 2차가 됐든 3차가 됐든, 5차, 6차 상관없습니다. 마지막은 항상 이 고개를 다 오르면 있는 벤치에 앉아 마른안주와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릴 했었어요. 가끔 여기저기서 끙끙거리는 연인들을 제외한다면, 거나하게 취한 밤, 고된 하루의 입가심을 삼아 올라오기에, 이곳은 참 안락하고 동시에 낭만이 있는 곳입니다. 아니네요. 연인들이 가끔 찾아들어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 짙은 곳이라 말할 수도 있겠네요. 모르는 일입니다. 저와 김형만의 낭만인지도요. 혹은 우리가 너무 취해서 올라왔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차치하고, 확실히 반짝이는 저 도시의 불빛은 저와 김형을 매료시킵니다. 김형이 언젠가 "꼭 여기서 영화든 드라마든 한 편 찍자, 너랑 나랑. 안 되면 셀카라도 찍자." 했습니다. 언젠가가 아니네요. 떠올려보면 매번 했던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김형의 그 말을 듣고 나면, 항상 김형이 진두지휘하는 현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맞으며 제가 설 그 날을 상상했죠. 누구보다 멋진 연기를 보여줄 샘이었습니다. 최민식 보다 뜨겁게, 김윤석 보다 노련하게, 송강호 보다 자연스럽게요. 김형이 액션! 을 외쳐준다면,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 씨발, 빨리이!"
그가 다시 소리치네요. 그는 조명 뒤로 사라졌다가 여자를 한 명 끌고 나옵니다. 빛이 너무 눈 부셔서 잘 보이질 않네요. 그는 안간힘으로 여자를 끌어내고, 여자는 남자의 힘을 못 이겨 당겨지듯 딸려오다 땅바닥에 넘어지듯 주저앉기를 반복합니다. 그녀는 오늘 내렸던 보슬비보다 더 서럽게 울고 있네요. 제 가슴까지 저미게 하는 눈물입니다. 여자는 아스팔트에 손을 짚어가며 남자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한 팔 한 판 기어가며 딸려 옵니다.
"너 진짜 그렇게 계속 처 울고만 있다가, 누구 지나가면 그냥 끝이야! 알아?"
그가 그녈 끌던 손을 땅으로 던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두 손을 아스팔트에 힘없이 늘어트리곤 서러워라합니다. 진중한 듯 동시에 여린 울음소리가 외줄타기를 하는 듯 절묘한 게 일품입니다. 실루엣밖엔 보이질 않지만, 분명 미인일 겁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제 머리맡으로 와서 제 겨드랑이 안으로 손을 깊숙이 넣곤 감아올립니다. 저는 시체답게 목을 늘어트리며 남자의 가슴을 타고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마치 목에 뼈가 작살이 난 사람처럼요. 굉장히 리얼하죠? 시체만 10년 째 입니다.
"야 빨리 와서 다리 잡어어! 아, 시간 없다고!"
저는 다리께로 다가오는 그녀를 봅니다. 가느다란 시야로 핏물이 비에 섞여 번졌네요. 그래서 사실 그녀를 본다는 것 보다는 찾는 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다리를 팔목 쪽으로 감아 들었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곤, 다리를 놓아버립니다. 이미 부러져 휜 다리는 지면에 닿으며 자유롭게 튕겨납니다.
"아, 아아아, 아, 아아, 아직 안 죽, 안 죽, 안 죽었..."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떱니다. 미미한 손끝의 흔들림이 저를 동요시킬 만큼이군요. 완벽합니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 맛깔난 더듬을 구사에요. 어중이떠중이라면 재연방송 연기처럼 어색함이 도드라지기에 보는 사람이 괴롭거든요. 그녀는 분명 보통내기가 아니네요. 진정 겁을 집어먹지 않고는 나오지 않을 법한 더듬질입니다.
아마 "아직 안 죽었어." 를 맛깔나게 표현 한 거겠죠.
여자의 말에 남자는 입이 걸어집니다. 목에 선 핏줄에서 가늘고 긴 핏물이 물총같이 뽁, 튀어나올 듯합니다. 여자는 눈동자를 흔들며 그를 아른아른 살피네요. 마치 몹시 수상하고 생소한 이를 만난 듯.
"개소리 그만하고 와서 좀 잡으라고! 미친년, 대가리가 빠가냐? 말 좀 처 들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덕분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린 듯합니다. 남자의 신랄한 욕 하나에 그녀는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습니다. 좀 전까지 겁에 질려있던 흰 얼굴이 이젠 눈발처럼 차갑네요. 함박눈처럼 쏟아지던 눈물이 무안할 지경입니다. 그녀는 제 양다리를 헌 짐짝처럼 들어 올립니다. 얼싸하고 옆구리에 종아리를 붙여 드는 것이 익숙해 뵈기도 하네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들어 올려 진다는 느낌 보다는 패대기쳐지는 느낌입니다.
두 사람이 저를 이끄는 길을 따라 제 허리는 붓처럼 선을 긋습니다. 어두침침하고 불그스름한 먹물이네요.
두 사람은 저를 자동차 뒤편으로 운반합니다. 자리를 옮긴 아스팔트는 좀 전에 비해 더 축축한 것 같습니다. 남자는 운적석으로 돌아갑니다. 여자는 아직 제 다리를 옆구리에 붙이고 서있습니다. 남자가 사라진 덕에 다시 하늘이 펼쳐졌습니다. 아, 몰랐던 사이에 다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네요.
달칵 하고 트렁크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남자가 다시 돌아와 저를 짊어지는 군요.
남자는 말합니다.
"너도 공범이야. 블랙박스 카메라에 다 찍혔어…."
여자는 대답이 없습니다. 표정 변화도 없네요. 조금 전보다 한결 낯이 차가워 졌다는 것 말고는요.
빗줄기가 힘 있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찰박찰박 지면을 치는 소리가 정겹네요.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졸졸졸졸 언덕길을 따라 빗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립니다. 좀 더,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면 제 핏물들이 소용돌이치며 빗물에 씻겨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제 핸드폰도 이 빗물에 쓸려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두 사람을 대화 없이 요령 좋게 저를 들어 올립니다.
아, 저기 다시 김형이 보입니다. 김형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오늘 정말 둘 다 너무 많이 마셨네요. 이렇게 땅바닥에 뒹구는 신세가 될 때까지 퍼 마셨다니. 제 잘못입니다만.
김형. 설마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 있었을 줄이야.
김형 괜찮아? 하하 나는 이 소동에 핸드폰까지 놓쳤지 뭐야? 혜정이가 "이제 대박 나는 날만 기다리면 되?" 물어 봤는데, 아직 대답을 못해줬어. 좀 놀랐어야 말이지. 김형? 정신 좀 차려봐. 일어나서 내 핸드폰 좀 같이 찾아줄래? 핸드폰 찾으면 김형이 내 대신에 대답해 주는 건 어때? 나 대박 나는 날 기다려도 되는 거야? 왜… 내 연기 인생은 김형한테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김형?
속으로 물어봐야 들릴 리가 없나요?
김형은 대답이 없습니다.
남자는 저를 트렁크에 욱여넣곤 대충 문을 닫습니다. 어설프게 내려온 트렁크 문은 제 무릎을 잘근 씹었다가 슬쩍 튕겨납니다. 반 뼘 열린 트렁크 사이로, 빗소리가 세어듭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타라며 소리를 지릅니다. 여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만 갑니다. 불꽃같은 연인이네요.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쿵쿵 문 닫히는 소리가 두 차례 들립니다.
"왜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사람 쳤어?"
트렁크 문 너머에서 희미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다음 말은 내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에 의해 들리질 않습니다. 자동차가 풀썩풀썩 할 때면, 트렁크는 저를 비웃듯 살살 입을 여닫습니다.
‘만년 시체만 해오니까 그렇지.’
그렇게 웃는 걸까요?
김형과 오르던 고갯길이 점점 멀어져 갑니다. 고갯길과 멀어지던 시야는 고갯길 밑에 있던 해물파전 집과도 멀어지고, 파전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있는 파출소에서도 멀어집니다. 들썩들썩 심심한 바닷가에 쪽배를 띄워 올라있는 것만 같습니다.
빨갛고, 파란 빛들이 모자이크처럼 흩어집니다. 아득해져가는 정신 너머의 심심한 파도는 멈춰섭니다. 트렁크는 이제 활기차게 입을 열고 큰 웃음을 짓습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우산 밑의 다리들이, 멀어져 갑니다. 누군가는 우산 밑으로 저를 향해 손가락 질 하네요. 혹시 모릅니다. TV에서 봤던 저를 기억하고 있는 지도요.
"아저씨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차가 급하게 멈춰 서곤, 문이 열립니다. 남자가 내린 걸까요? 맞았나봅니다. 그가 제 머리맡에 달려와 트렁크를 손에 쥐었습니다. 남자의 앞에서 얼어버린 아가씨가 보입니다. 아가씨는 소리를 지를 듯 말 듯, 뜸을 들이다 남자를 돌아봅니다. 아가씨와 눈이 마주친 그는 트렁크를 차마 닫지 못하고 길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마네요.
“이거 봐요. 아가씨, 저 트렁크에 있는 거 뭐요? 아가씨? 이봐, 문 열어봐. 이거 미친년 아니야? 야, 경찰 불러. 야 너 문 열어. 아이쿠! 야 안 되겠다. 119먼저 불러 119.”
목청 걸은 아저씨가 똑똑똑 하고 계속해서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차 안에 남아있을 여자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사람들이 제 앞으로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누군가를 구조대를, 누군가는 경찰을 부르려 전화기를 쥐고 있습니다.
동그랗게 몰려든 사람들은 저의 시체 같은 모습을 보며, 저를 알아봐 주고 있는 걸까요?
비가 이렇게 내리는 통에, 저를 알아보긴 힘들지도 모르겠죠. 애초에 모른다구요? 그런가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어찌됐든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시체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