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학번인 저에게는 너무도 생생한 기록과 같았던 87년 6월 항쟁을 정리해서 올렸는데 지금 20대 후배들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역사 같은 사실이었다는 것이 정말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에도 잘 나오지 않는 야사와 같은 이야기를 조금 곁들여서 87년 6월 항쟁이 있기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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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생들에게 87년은 처절한 패배속에서 맞이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전년도인 86년 10월 28일 ~ 31일까지 건국대학교에서 있었던 애학투련 발족식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흔히 건대 사태로 더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애학투련은 전국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의 약자로 10월 28일, 그 날 건국대학교에서 발족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것을 매우 교묘히 이용하며 사냥하듯이 매우 강경하게 진압을 했고,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을 건물의 옥상으로 몰았습니다. 원래는 발족식을 한 후 각자의 대학에 흩어져 학생운동을 하려고 했던 당시 애학투련 집회 참석 학생들은 졸지에 모두 집에도 가지 못하고 건국대학교의 각 단과대별 옥상에 올라가 철야농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국대학교의 각 단과대별로 흩어져 철야농성하는 시위참가 학생들.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시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정통성에 큰 문제를 안았고, 대학생들은 끊임없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타도의 이슈를 제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군부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물리적으로 저항하는데 한계를 느낀 수많은 학생들의 분신, 투신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80년 이후 84년까지는 폭압적인 정권의 위세에 눌려 몇 몇 사람들의 희생적인 투쟁으로 이어가다가 드디어 1985년을 계기로 하여 전국 각 대학에 학생들의 직선제로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적인 총학생회가 부활하게 되며 상황은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984년 이전에 총학생회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학도호국단입니다. 학생단체이면서도 학생들의 자주적인 단체가 아닌 학교에 의해서 만들어진 단체이며, 전체 학생들의 직선이 아닌 각 학과 대의원들에 의해 간선으로 선출된 대표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학도호국단과 총학생회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 : 이번 4.13총선에서 서울 서대문갑에서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후보는 87년 연세대생의 직선으로 선출된 총학생회장, 같은 지역의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라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의 이성헌 후보는 직선 총학생회장이 아닌 84년도의 간선 학도호국단장 출신.
어쨌든 85년부터 민주화의 봄이 시작되었고, 전국의 각 대학교에서는 기존의 학도호국단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적인 직선 총학생회장 체제를 수립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학생들이 기지개를 펴고 다시 대중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85년 ~ 87년의 시기는 대학생들에게 있어 반독재 민주화투쟁 시위로 하루를 시작해서 시위로 하루를 마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일 매일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 타도하자"라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운동권 학생들이 주동을 했지만, 일반 학생들도 많이 참여를 해서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량을 총집결하고자 했던 일이 바로 86년 10월 28일에 건국대학교에서 있었던 건대 사태로 알려진 '애학투련 결성식 사건. ' 이었던 것입니다.
그 집회를 알아챈 전두환 정권에서는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고 아예 마음을 먹고 애학투련 집회에 모인 모든 학생들을 전부 다 구속시킬 계획을 처음부터 갖고 몰이를 시작했고, 각 단과대 건물로 쫓긴 학생들은 3박 4일의 철야농성에 들어갔다가 헬기까지 동원된 공권력의 입체적인 작전에 전원 연행되고 대다수가 구속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신문기사 1면을 차지했던 10.28 건대 집회 보도.
집회 참석자들에 대해 단일사건으로 정부 수립이후 최대인 1,274명이라는 기록적인 구속 사태.
10.28 건대 집회의 상처는 당시 학생들에게 너무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의 모든 대학교의 핵심적인 운동권 학생들이 거의 다 구속되어 씨가 마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987년을 맞이했고, 새해 초부터 충격적이었던 서울대 84학번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때 그 유명했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고문경관들의 허위 진술이 나왔던 것이고요.
당시 호외로 발행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건대 사태의 후유증으로 거의 궤멸되다시피했던 대학가의 학생운동 세력은 박종철 학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시 있는 역량 없는 역량을 모두 끌어모아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규탄 집회를 열게 되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86년 10월의 패배에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됩니다.
박종철군 아버님인 박정기씨가 했던 말씀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
당시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에 야당과 학생들, 재야단체, 시민들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개 개헌을 무시하고 '호헌 - 기존 헌법대로 그냥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뜻'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호헌론은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시발점으로 해서 전국의 각 대학교의 뜻있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기폭제가 되었는데 그 때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은 전국적으로 약 1,500명이나 되었고 학생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게 되었습니다.
87년 당시 교수들의 시국 선언에 대해 정권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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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여기까지는 기록을 살펴보시면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계기로 해서 86년 10월 이후 몇 개월간의 패배주의에서 벗어사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각 대학교에서는 구속됐던 학생들도 조금씩 석방되면서 총학생회 선거가 치뤄지게 됩니다. 전국의 모든 대학교 총학생회의 주요 공약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 타도"였습니다.
주로 4월과 5월에 치뤄진 각 대학교의 총학생회 선거속에 저는 제 모교인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되었고, 다른 대학교보다 한 달쯤 늦은 5월 15일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선되자마자 치룬 행사가 바로 5.18 7주기 추모집회 겸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 타도 집회였습니다.
당시 각 대학교에서는 각 대학교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자라는 취지로 총학생회장간의 협의체를 지역별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서울의 경우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서대협) 부산울산같은 경우 부산울산지역총학생회장협의회(부울총협) 광주전남지역같은 경우에 광주전남대학생대표자협의회(남대협) 대구경북지역이 경우 대경대협. 인천지역의 경우 인대협... 등등 이런식으로 각 지역마다 협의체가 속속들이 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전국적인 단위의 대학생대표자 모임인 전대협은 6월 항쟁 이후인 8월에 만들어집니다.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들(주로 각 대학교의 총학생회장들, 각 학교에 따라 단과대학생회장 연합, 혹은 총대의원회의장)의 협의체인 서대협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서대협 의장에 고려대 총학생회장인 이인영(고려대 국문학과 84학번)이 선출되었습니다.
총학생회장 선거가 늦게 치뤄지는 바람에 뒤늦게 합류한 제 모교인 세종대는 그런 흐름에 약간 뒤쳐졌었는데, 어느 날 불쑥 바로 인근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인 건국대 총학생회장,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저희 학교로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 이유인 즉슨 '서대협에 함께 활동하자"라는 것이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그러자"라고 하고 그 이후부터 다른 대학교와의 연대 투쟁에 함께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 30일. 당시 서울의 이화여자대학교 총학생회장실에서 서대협의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6월 항쟁의 기폭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것은 6월 10일 대규모 투쟁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울 지역의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주최하에 6월 2일 고려대학교에서 서대협문화제라는 명분으로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힘을 모으고, 6월 5일 ~ 9일까지 5일간 단식투쟁을 하며 학생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나가자라는 결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서울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대학에 속속들이 퍼져서 총학생회가 있는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6월 5일 ~ 9일 총학생회장들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슬로건으로 일제 단식 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저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슬로건으로 학생들의 뜻을 모으기 위한 학내 단식투쟁 모습
여기서 잠깐.. 나중에 6.10 항쟁으로 불리워진, 그 당시에는 6월 10일 대규모 투쟁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모였던 총학생회장들끼리 나눴던 대화가 기억이 나네요. 그 때 고려대 이인영, 연세대 우상호, 이화여대 임미애, 한양대 김병식, 건국대 강석우.. 등등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들이 밤 10시가 넘어서 새벽까지 이화여대에서 6.10 항쟁을 준비하며 회의를 했습니다.
그 직전 해였던 10월 건대 사건으로 학생운동권이 궤멸되다시피했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던 당시 총학생회장들은 이화여대에서 비밀리에 회의를 하면서 "혹시 오늘 여기에서 회의 한다는 소문이 공권력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서울지역의 모든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이 전부 다 연행, 구속되어 6.10 항쟁은 치루지도 못할 수도 있으니 정말 보안을 철저히 해야한다"라는 대화를 나눈적이 있죠.
정말 그 날 심야와 새벽의 그 회의는 극도의 긴장감을 갖고 했고, 다행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공권력의 침입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6월 2일 고려대학교에서 서대협 문화제를 통해 86년 10월 28일 건대 사건 이후로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3,000명이라는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 열기를 각대학교에 전파하였습니다.
그 서대협 문화제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각자 자기 대학으로 돌아와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슬로건으로 6.10 항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총학생회장들은 전원 단식 투쟁에 들어가고, 각 단과대학생회장들까지 동조 단식 및 삭발에 들어가면서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87년 6.10 항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서울지역에 40개 대학이 있었고, 대학생수가 총 25만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 중 10만명 이상이 광화문, 종로, 강남 등 시내 중심가는 물론 심지어 동네 구석구석에까지 "호헌철폐 독재타도"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의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라는 시위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87년 6월 항쟁이었던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의 연속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100만 인파가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