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만원의 위력, 이제 와서 화를 낸들 -
개천 나무라면 뭐 하나. 눈 먼 탓이나 해야.
이기명 팩트TV논설위원장
‘저기 가는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서러운데 짐조차 지실까.‘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시조(時調)다. 청년시절에는 못 느꼈는데 나이를 먹으니 느낌이 새롭다. ‘송강 정철’의 시대에도 늙은이들은 연민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 시조를 지을 때 정철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며칠 전 신문에서 사진 한 장을 봤다. 늙은이들이 줄을 서서 뭔가 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설명을 보니 늙은이들은 떡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들은 누구며 무슨 떡을 타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일인가에 집단으로 동원이 됐다가 일이 끝난 후 떡을 받아먹는 모양이다.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르겠고 바로 조금 전 ‘어버이 연합’의 종북규탄 집회가 있었다. 쳐진 어깨에 꾸부정한 허리. 힘없는 눈 빛, 탑골공원에 노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거의들 내 나이와 비슷한 늙은이들이다. 저속에 내 친구는 없을까.
추석이 지난 후 이민을 떠난 80 먹은 친구는 평소에 길을 가다가 종이상자를 줍는 늙은이를 만나면 남녀 가릴 것 없이 천 원을 손에 쥐어준다. 돈을 준 뒤에도 비참한 마음은 금할 수 없지만 그래도 쭉 그 일을 했다. 누가 볼까 주위를 살피며 그 일을 했다. 그까짓 천 원이 무슨 도움이 되랴.
### 20만원 준다는 바람에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나의 늙은 친구들은 거의 박근혜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4대 중증환자 무상진료. 간병비 지원, 솔직히 늙어서 병드는 것처럼 서러운 것이 없다. 병원에 가면 왠 환자들은 그렇게 많고 환자들 대부분이 늙은이들 같다. 아들인지 며느린지 딸인지는 모르지만 눈치 보기에 모두들 기가 죽어 있다. 치료비가 얼마나 겁나랴. 그러나 4대 질병에 대한 진료비를 나라가 부담한다니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거기다가 20만원을 준다고 한다. 안 찍고 배길 도리가 있는가.
한국 늙은이들의 경제적 능력이야 물으나 마나다. 안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용돈 한 푼이 없어서 전전긍긍이다. 어린 손주새끼들도 돈 없는 할애비 할미는 저리가라다. 늙은이라고 돈 쓸 일이 왜 없는가. 먹고 싶은 것도 많다. 돈이 없다. 창문 너머로 음식을 보며 군침을 삼키는 늙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이들에게 돈을 준다고 한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엎드려 절을 할 복음이다.
65세 이상의 늙은이들에게 매달 20만원 씩 준다. 하늘이 내려주는 복음이 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을 한 것이다. 공약은 약속이다. 그는 TV생방송에 나와 분명히 말했다. 그 재원이 가능하냐고 야당후보가 질문했을 때 ‘그래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늙은이들이 누구를 찍었느냐고 묻는다면 바보다. 박후보가 하느님이다.
-18대 대선 선거인명부 60대이상 유권자는 20.8%인 841만여명, 투표율 78.8%면 662만여명 투표. 65세 이상 639만명중 최소 20~30%인 약 127~191만명은 기초연금 20만원 해당-
### 친구야 미안하다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소주 몇 잔에 거나해졌다. 갑자기 그 친구가 울먹인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그쳤다.
“내가 세상이 다 아는 야당 아닌가. 그런 내가 박근혜를 찍었다. 이유가 뭔지 아냐. 20만원 준다는 공약 때문이었다. 웬수놈의 돈.”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친구 많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찍었을 것이다. 투표지를 들고 기표소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20만원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에라! 눈 질끈 감고 찍었을 것이다.
욕할 수도 없다. 직업도 없는 늙은이. 마누라와 단 둘이 사는 처지에 한 푼이 아쉽다. 20만원이 어디냐. 어떻게 그 친구를 나무랄 수 있으랴. '이상 저상 해도 코앞에 진상이 최고‘라지 않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못 준단다. 늙은이한테 사기치고 잘 될 것 같은가. 수백만 늙은이한데 거짓말 하면 벼락 맞는다. 이것이 친구의 결론이다.
### 기초연금, 4대중증질환. 무상보육, 군 복무단축.
인간의 이중성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20만원 씩 준다고 박근혜 후보가 공약했을 때 늙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대범하게 생각했을까. 까짓 20만 원? 그러나 속으로는 무척 좋았을 것이다. 박후보를 당선시켜 20만원을 받아먹어야지. 주저 없이 찍었을 것이다. 치사할 것 없다. 인간의 마음이 그런 것이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다 드릴 수 있고, 제가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꼭 실행하려고 한다." (작년 12월16일 3차 대선후보 TV토론)
"공약을 모두 지키면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진다고 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1월 인수위원회 회의)
아아 얼마나 감격스러운 후보의 공약인가. 이런대로 표를 찍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은혜를 모르면 그게 어디 인간인가. 짐승이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마음이다.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살아서는 돈이 최고다. ‘하숙생’이란 노래가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어차피 인생은 뜬 구름 같은 것, 공수래공수거다. 대통령이나 말단 공무원이나 재벌이나 독거노인이나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안달복달 할 것이 뭔가. 돈을 준다고 했다가 안 주면 어떤가.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약속이다. 대통령의 약속이다. 수천만 국민을 앞에 두고 한 약속이다. 독거노인 찾아가서 떡 먹듯이 한 약속이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당신들에게 한 달에 20만원 씩 기초연금을 줄 것이다.’ 원칙과 신뢰를 생명처럼 여긴다는 박근혜후보의 공약이다. 문재인과 토론에서도 큰 소리 쳤고 그 약속의 장면은 국민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파기했다. 무 잘라먹듯 한 것이다.
### 거짓말 했으면 사과라도 제대로
노인들의 속이 부글거리는 것은 이해한다. 박근혜 정권 출범 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정부에서 주는 20만원 받아 자식들 용돈 기대지 않으면서 살수 있다는 기대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정치는 욕만 하면서 살았는데 이런 세상도 오는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러나 공약은 빌 空(공)자 공약이었다. 돈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안 준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 주고 누군 안 주고 누군 조금 주고 몇 년 후에는 연금이 줄고 도무지 나이 먹은 늙은이는 복잡해서 알아먹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고 약속 믿고 표를 찍은 것에 열불이 나는 것이다. 이게 사기가 아니면 뭐가 사기냐.
"말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것이 어르신들이라고 좋은 말을 다한다. 그래서 노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고 고생 좀 덜 하고 살 수 있게 하자고 이야기 해놓고는 이제는 돈이 없다고?"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깎아야한다고 하는데 어디 이게 시장 물건 흥정하는거냐."
"이번에는 기대를 좀 했다. 두 늙은이가 살면서 그거라도 받으면 보탬이 될까 했는데 완전 절망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65세이상 노인연금 준다 하고 노인들 몇 백만에게 사기치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정말 정 떨어졌다.”
“부자들 감세해 주면서 돈이 없다고? 부자들한테 세금만 제대로 걷어도 몇 십조 원이 된다고 한다. 늙은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연봉이 수억 원, 성과급이 몇 십억씩 되는 재발회사 임원들 세금 좀 더 걷으면 벼락 맞느냐.”
### 국민에게 거짓말 하면 끝이다
잘난 정치평론가의 말을 들었다. 20만원 공약이 없었다면, 중증질환 100% 국가지원 공약이 없었다면 박근혜 후보는 당선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20만원이 1등공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약은 파기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감을 표시했다. ‘죄송하다’고 했다. 국무회의 말미에 삐쭉 한마디 했다. 그러면서 ‘죄송’하지만 공약파기는 아니라고 했다. 임기 중에 실천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국민이 바보인가.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노릇을 할 것이다. 국민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못 박힌 생각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몽땅 안 주는 것은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국민들 귀에 그 소리 안 들린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사과라도 해야 한다. 방송에 나와 국민을 향해 진정으로 사과해야 한다. ‘죄송’이나 ‘유감’ 따위의 말에는 국민이 신물이 난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집권한지 7개월, 파기된 공약이 얼마나 되는가. 이러면서 어떻게 5년을 견딜 것인가. 국민은 속고만 살라는 말인가. 늙은 게 무슨 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