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인가 2006년인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당시 3년째 만났고 있던 여친이 있었다.
둘 다 뭐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고
우리 엄마가 조금 일찍 돌아가셨다는 거 말고는
그냥 저냥.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집안. 평범한 인서울 CC. 서민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목걸이에,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구멍난 것 예쁜 것 줏어다가 꿰어서 걸어줬다.
금붙이는 아무한테나 주는거 아니라고 하길래 아무한테나 주는거 아니라고 하면서 고백했다.
남자가 군대간 동안 여자가 기다리는게 보통인데,
나는 카투사여서 그 반대였다.
오히려 나 전역하고서 전여친이 캐나다로 워홀인지 뭔지 갔다 오는걸 내가 기다렸다.
하여튼, 꽤 오래 만났고,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남자 셋만 살던 우리집에 와서 요리도 자주 해주고
덕분에 우리 아빠가 나보다 더 전여친을 좋아했었고
나도 전여친 부모님과도 여러번 만나고
라면끓여 소주한잔하며 허물없이 지낼 지경까지 이르렀고
당연히 결혼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개인적으로 참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전여친 워홀 중에 우리 아빠가 재혼을 했는데, 계모는 계모인지라
집안에서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고
학비도 생활비도 이제는 내 힘으로 해결해야했고
지금처럼 노동자 보호가 철저하지도 못하던 시절에 기껏 일한 돈은 떼어먹히고
지금처럼 사이버 범죄 수사가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노트북 사겠다고 기껏 모은돈 보냈더니 사기당하고
기타 등등. 죽도록 달리는데 학점도 개판, 돈도 개판.
힘들긴 하더라. 생각만해도 끔찍하긴 했다.
어쨋든 공부+일+연애는 쉽지만은 않더라.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이해해줄줄 알았다.
힘든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빛을 보게 될 날이 올거라는 생각은 나 혼자 했었나보다.
어느날인가 알바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네이X온 채팅으로 모르는 상대방을 꼬셔서 유료채팅 같은걸 하게끔 유도하는 일이더라.
그딴 일 당장 집어치우라고 한소리 했더니만 엄청 기분나빠하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뜸해지더니,
결국 차였다.
그것도 우리 엄마 기일에. 절대 모르지 않았을텐데. 같이 산소도 몇번 갔었는데.
그 목걸이도 결국은 못돌려받았다. 지금은 어쨋는지 모르지.
몇 달 뒤에 알게 된 일인데, 양다리였더라.
그 놈 이름은, 왜인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정X동.
3년 만나던 나랑 헤어지기 전부터 시작해서 그 놈을 한 세네달 만나더니 금세 또 헤어진 모양이더라.
그땐 싸X월드라는게 있어서, 그런 개인정보 쯤은 쉽게 보이더라.
참 씁쓸했지만, 뭐 별 수 있나.
잘 살기나 하던가.
한참 시간이 지나고
이젠 생각해보려 해도 별 추억 같은것도 떠오르지 않고,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지금은 정말정말 예쁜 마누라와 귀여워서 어쩔줄 모르겠는 두 아이의 아빠이고
때되면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무슨 날이면 맛있는것도 먹으러 다니고
여러 직원 거느리며 내 사업 하고 있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얼마 전, 아니 벌써 2~3년 전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 건너건너 전여친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미대를 나오긴 했는데, 메이크업 같은거 하고 있다더라.
직업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관련 전공이 아니라 안타까울 뿐.
언니가 있었는데, 암에 걸렸다더라.
병원비가 3천정도 필요한데, 마련할 길이 요원하다더라.
나이가 이제 30대 후반인데, 아직 시집은 못갔고
못된 남자 만나는 것 같더라. 때린다더라.
헤어지고 싶어도 죽이네 어쩌네 그러면서 붙들고 있다더라.
전해 들은 말은 "난 그동안 순둥이들만 만났었나봐" 라더라.
그 와중에 동기라는 노총각놈이 찌질대면서 추근거린다더라.
참 불쌍했다. 삶이 왜 그렇게 꼬였을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도 그 전여친을 만나고 있었다면, 혹시라도 결혼을 했다면
적어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진다.
어려운 상황이나 빨리 극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