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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필리버스터가 신의 한 수인 이유
게시물ID : sisa_6699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카엘대공
추천 : 38
조회수 : 1473회
댓글수 : 30개
등록시간 : 2016/02/26 13:32:08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사실 설득이랄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왜냐면 다들 찍을 사람 찍거든요.

광주 사람들은 더민주 찍고, 6~70대 이상 노인분들은 새누리 찍고, 뭐 항상 그래왔습니다. 콘크리트 콘크리트 하는데 사실 콘크리트는 더민주 쪽에도 있어요. 새누리만큼 두텁고 충성스럽지 않아서 그렇지. 뭐 더민주 지지자인 저로서는 "그러게 누가 광주 학살하래?" 라는 심정입니다만.

각설하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냐면 대한민국 분위기 자체가 정치판을 선악 프레임으로 구분지으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분위기를 굉장히 맘에 안 들어합니다만, 언론부터 철면피 깔고 그래버리니 뭐... 여튼 그래서 노인분들 얘기 들으면 무조건 더민주=나쁜놈, 새누리=착한놈 이죠. 오유오면 그 반대구요.

그렇기에 대한민국 정치대결은 언제나 "누가 상대방/중도표를 잘 끌어모으는가?" 가 아닌 "누가 우리 편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고 오는가?" 에 따라 승패가 갈려왔습니다. 그리고 여론조사만 하면 언제나 이기는 것처럼 보였던 더민주가 늘 발려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죠. 새누리 지지자들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달려가서 투표하는데, 더민주 지지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충성스럽지는 않거든요. 젊은층에게 주로 지지받는 정당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사실 전 지난 대선이고 총선이고 죄다 새누리가 이길 것 같았습니다. 뭐 이 결과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일단 그 점은 덮어두도록 해요. 왜냐면 결국 뭐라 한들 그때 더민주가 이 선천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새누리는 이 부분에만은 정말 도가 튼지라 선거때마다 북풍이다 뭐다 해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보내는데 더민주는 항상 이런 걸 잘 못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투표장으로 가야 할 동력을 제공하질 못했죠.

여기서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동력"이라는 겁니다. 아마 그때 당시에도 투표함을 집 앞에 갖다주고 하나 뽑으라고 시키면 더민주 뽑을 사람들은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를 하려면 옷 갈아입고 차 타고 투표장까지 가야 하죠. 그리고 이는 굉장히 귀찮은 일입니다. 젊은층 투표율은 언제나 이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왔고요.


그런데 이번 필리버스터는 정말 오랜만에 젊은층에 이유가 아닌 동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테러방지법이 뭔지, 이게 통과되는지 아닌지는 지지율적인 측면에서는 그닥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면 위에서도 말했지만 더민주나 새누리나 뭘 하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할 거거든요. 이번 필리버스터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딱 비슷한 각 나오잖아요? 5~60대는 부정적 2~40대는 긍정적. 제 예상이지만 이번 필리버스터로 인한 지지층 변동은 크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요한 건 그 2~40대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냐는 건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유튜브 생방송으로 국회방송 시청하는 사람이 2만 7천명입니다. 누적이 아니라 동접이 2만 7천, 그것도 평일 오후인데 이 정도 수치죠. 게임도 웬만큼 인기있는 거 아닌 이상 평일 동접 2만7천 못찍습니다. 방송 3사에서 다루지 않아도 충분히 이슈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두번째는 이 관심이 무겁고 진지한 형태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가볍고 유쾌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방송의 실시간 채팅을 보면 "국가스터디" "최애의원님" 따위의, 마치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는 듯한 드립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트위터를 보면 발언한 의원들의 팬아트가 올라오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국회의원을 향한 후원금 인증 릴레이도 이어집니다. 국회의원장 분위기는 썰렁하고 엄숙하지만 온라인상의 분위기는 실로 생기가 넘칩니다.

진지하지 않은 게 맘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게 오히려 더 좋은 겁니다. 솔직히 무겁고 진중한 거? 짊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 잘 없습니다. 대다수는 자기 삶이 바빠서 딱 보고 관심이 생기는 게 아니면 회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더 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전반적인 상황의 흐름이 무척 "흥미롭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설 전반이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시청자들이 그걸 보면서 실시간으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죠. 그리고 이는 여당에 대한 네거티브한 분노가 아닌 "저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라는 포지티브한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이성이 아닌 감성, 이유가 아닌 동력이 제공되고 있는 겁니다.

세번째는 더민주 자체에 대한 이미지 변화입니다. 여기서 미드 뉴스룸 1화의 명대사를 인용해야겠군요 - "사람들이 민주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걔들이 지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그 새끼들이 그렇게 똑똑하고 잘났으면 대체 왜 맨날 처발리는 겁니까?" 미국 드라마지만 한국에 적용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들어맞죠.

민주당은 지금까지 이런 적극적인 카운터를 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정당하고 깨끗한 길만 걸으려 해서 스스로 행동의 폭을 좁혀왔죠 (지도자인 문재인부터가 그런 타입이구요). 물론 이 점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도 많겠지만 전 항상 이게 졸라 맘에 안 들었습니다. 대체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고 링 위에서 뭘 하겠다는 거죠? 심지어 그런다고 이미지가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새누리의 꾸준한 언플과 안철수 분당사태 때문에 이미지도 깎을 대로 깎아먹었죠. 항상 잃기만 하면서 얻는 것은 없습니다. 하는 게 없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로 얘들이 전부 잃을 걸 감수하면서 올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찔끔찔끔 걸던 소심이들이 처음으로 건곤일척의 도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추이를 보면 도박의 결과는 긍정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더민주, 정의당 모두 지지도 약 3%p 상승). 얘들은 진작부터 이랬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기 때문에 그쪽 눈치를 보기보다 자기를 찍어주는 사람들을 대변해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런 행보가 이어진다면 유권자들도 자신의 투표가 보답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투표를 하러 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끝으로...

대부분 짱구는 못말려라는 애니메이션을 한번쯤 보신 적 있으시겠죠. 이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중에 <어른제국의 역습> 이라는 역대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이 있는데요.

거기 보면 클라이맥스에서 짱구네 가족이 사람들을 세뇌해 세상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조직의 음모를 막기 위해 적의 본진이 있는 탑을 오릅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이 극장판에서 이들 가족은 정말 어떠한 특수능력도 없는 평범한 가족이라는 겁니다. 탑 꼭대기로 올라가서 적 보스를 만나봤자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죠.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름아닌 이 행동 자체가 실시간으로 방송되면서 사람들의 세뇌를 풀고 음모를 저지하게 되죠.

전 이번 필리버스터도 그런 전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필리버스터 자체에는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3월 10일이 되면 법안은 표결에 부쳐질 것이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의 행동에 의미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국민들 모두가 이들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담컨대 분명 큰 힘이 될 겁니다.


총선까지 약 한달 반. 평소엔 별로 기대도 안 하는 선거지만, 올해만은 무언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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