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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사건 후속]박정희가 5.16 쿠테타 직후, 가장 먼저 했던일.
게시물ID : sisa_6689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sert_Fox
추천 : 22
조회수 : 113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2/25 21:16:32
경주 유족회.jpg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122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1-22&officeId=00020&pageNo=3&printNo=12283&publishType=00010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시기, 한국전쟁때 민간인 학살(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나주 경찰부대 학살 사건 등등) 진상조사를 위해 유족들이 결성한 유족회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5.16 쿠테타 일으키고 집권하자마자 '혁명재판'의 이름으로 이 분들을 싸그리 잡아들이고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 및 학살자 유해를 수습하는거 자체가 북괴에 이익을 주는 이적행위'라고 규정(당시 처벌할 형법조항이 없어, 소급적용했음. )짓고 유족회에 계신분들 전부다 싸그리 사형 내지 무기징역, 20년 징역등 때렸죠.. 유족들이 유골 수습하는것 조차도 이적행위로 처벌( '유족회에서 허위 선전을 했다. 용공 사상을 고취했다. 군경을 학살자로 몰았다'라는게 당시 '혁명재판'에서의 주 논리..)했던게 박정희의 군부 쿠테타 세력이였습니다.(그래서 유골들이 오랜기간동안 방치되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되어가면서 진상규명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뒤늦게 2000년대 초반, 참여정부 시기가 와서야 유골 수습이 뒤늦게 시작되었던 이유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너무 억울했는지 유족회 간부 출신이던 어떤 유가족 한 분('피고인' 신분으로)은 법정에서 손가락 깨물고 자해하는 일까지 벌어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122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1-22&officeId=00020&pageNo=3&printNo=12283&publishType=00010 ) 이 유족회 간부출신으로 징역받으신 분은 뒤늦게 2010년에 재심해서 무죄로 복권되셨습니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01214100413275)


참고로 박정희는 'CIC 계통의 정보장교' 출신이죠. (CIC 방첩기관은 한국전쟁때 민간인 학살 관련해서 가장 주동적이었던 기관 가운데 한곳) 

5.16 쿠테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들은 '혁명재판'을 통해 한국전쟁 유족회 간부들 때려잡고, '그나마' 남아있던 자료들마저 죄다 소각시켜버림... 그래서 오늘날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진상을 밝히는게 굉장히 힘들었죠.. 정부가 철저히 은폐한 최대 금기였습니다.(지금도 이 사건에 대한 인식.. 극우세력들에 의해 왜곡된 인식이 상당합니다. 예를들어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부역행위를 했던 자들'이라고 몰아세우는 경우..)

 

오늘날 한국근현대사 역사 과목에서 이 사건 언급이 거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구요. 굉장히 정치적인 학살이고, 이게 오늘날도 유효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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