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rus3님께서 인터넷 상에 떠도는 선동에 낚이신거죠.
어찌 낚이셨는지 설명 드리면
만주국이라는 국가자체가 일본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만주에 출병하여 관동군관구의 통제하에 건국 된 괴뢰국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만주군이라는 군대의 성격 역시 매우 복잡한 집단의 성격을 가집니다.
관동군이 만주국을 창설하고 부의가 관동군에 만주국의 치안과 국방을 일임한다는 서한을
시작으로 형식상 국가로 선언하며 양국의 공동 방위조약을 맺을 당시 만국국군대란
사실상 만주지역 치안유지를 위한 병력이자 지역군벌 잔재 소탕의 의미도 있었죠.
만주군 자체가 관동군의 일부고 만주군 각 단위마다 관동군 소속 일본군 장교가 파견되는 상황에서 만주군관학교를 통한 장교의 양성은
형식적으로 만주국의 장교양성이지만 동시에 일본군 장교를 양성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기존 군벌들이 군사훈련을 하던 교육장을 이어받아
1932년에 2년제 만주국 군관을 양성하는 중앙군사훈련처를 창설했죠.
이게 박정희가 나온 신계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입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된 직후인 1910년대 초반 약간의 조선인을 일본육사에 입학 허가를 내어준 것을 제외하고는
1930년대까지 왕족과 공족을 제외한 조선인이 일본육사에 입학 허가가 된 사례가 없습니다.
중일전쟁이 심화된 1937년에 가서야 비로소 일본 육사에 조선인이 응시하고 입학생이 소수 나온 정도였죠.
이런 1930년대 더군다나 극심한 실업난으로 허덕이던 조선에서 설령 다른 직업이 있더라도 미래가 없는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일본육사에 못 들어간 조선인들이 출세의 장으로 여겨서 해당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계로 지원해서 6기부터 출신 장교를 배출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지원한 신계군관학교는 바로 이런 2년제 봉천군관학교가 4년제로 전환하여
정식 사관학교로 개편하게 되자 그때 지원을 하게 된 것이죠.
1939년 1기 처음 만계입소자를 받았으며 1940년 일계 입소자를 받아 첫 개교식을 하였는데
여기서 만계와 일계로 나눈 이유는 기존에 봉천군관학교에서
일계의 전형을 한 이유로 대만, 조선인, 일본인을 포괄하여 만주어를 집중교육하고자 하는 의미로 전형을 나눈게 아니라
1기 사관학교를 개교하며 관의 양성이라는 것이 정식 사관학교 제도가 됨에 따라 일계지원자의 경우 일본사관학교가 존재하는 가운데
형식상 외국의 사관학교에 지원하는 상황으로 일본의 병역법 개정과도 연계하는 사안이고 더불어 일본육군성교육총감부와 의견차이로
일본군 장교를 만주에서 뽑는다는 것에 의견차이를 보임에 따라 일계지원자를 일본육사지원과 연동하기로 합의한 사안이죠.
당시 조선인의 경우 식민지인으로 공민권이 없는 존재인지라 초창기 만계로 지원하였고 5기 이후 부터 일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고 박정희는 혈서를 보낸 후 만주신문에도 이름이 거론되며 2기로 입학했습니다.
애초 알려진 군관학교였고 헤당 군관학교가 4년제로 개편하며 정식 사관학교가 되었으니 지원자도 넘쳤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1939년 갑자기 개교한 것이 아니라 이미 1937년 식민지인력을 군사력으로 양성하는게 본격화 돠면서
해당 학교의 개교를 염두하고(일본 육사입학도 이때 이뤄졌고요) 기존 봉천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모교 돌며
만주에 새로 개교하는 육사를통해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로 출세할 수 있음을 진학지도 차원에서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더부어 신경군관학교가 개교할 당시 조선내 일간지에도 해당 개교의 소식이 실렸을 정도죠.
박정희가 봉천군관학교 부터 조선인이 만주로가서 지원하고 아예 신문에도 보도된 내용인데
이런 사정을 알았던 것은 너무 당연하죠
지원했으나 나이차이가 나고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니 혈서를 써서 의지를 알린 사례입니다.
그것을 만주국 통치선전에 열을 올리던 만주신문이 미담으로 소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만주신문에 박정희가 2차례 편지를 보냈다고 나오죠
이전 봉천군관학교에서는 조선인의 경우 일계로 지원했으니
1기에 지원하고자 했으나 만계지원에서는 비록 안되었지만 아직 개교안한 상태에서 40년 일계 지원자를
또 뽑는다고 하니 그거라도 어찌 안되는지 문의하는게 어찌보면 자연스런 반응 일수도 있고
1차 지원에서 떨어진 것에 대해 취소를 요구했는지 아니면 2차 지원을 위한 사전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했건 이 혈서 덕분에 원칙상 자격미달로 탈락이 기정사실인 박정희가
40년 2기생 모집을 하는 39년 응모에는 해당사항 없음에도 불구하고
혈서를 쓰고 그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는 사실과 조선의 박정희 지인들에도 알려진 미담의 주인공으로
2기생으로 당당히 합격하여 입학했으니 말이죠.
물론 이후 조선인 지원자는 봉천군관학교 시절처럼 당연히 일계 지원자로 분류되게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혈서 지원 정황이 이러합니다
이런 혈서를 쓴 내용을 보도한 신문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보도를 믿건 말건
아예 그 해당 자료가 일본 국회도서관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존재하는 상태죠
이를 부정하기 위해 문구의 자구를 꼬투리잡아 말도 안되는 상상력을 투영해 가며
부던히 날조자료를 만들어 눈가리고 아웅하는건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2009년 완벽하게 반박이 된 자료가 착각을 하시는데
실상은 상상력이 풍만한 블로거 한명이 전후사정 삭제하고
사료 몇개 그럴듯 하게 캡쳐해서 소설 한편 써놓으니 박정희를 지지하는 보수네티즌들이
단체로 2009년에 대거 낚였던 사례죠
날조의 주장을 하도 그럴듯하게 글을 써서 어찌써서 이리 유포된지 출처를 따라 블로그를 찾아가니
해당 날조 게시물을 유포한 작성자 조차도 이젠 논점을 후퇴해서 혈서가 거짓이 아니라 해당 신문기사의 내용이 존재함은 맞지만
대신 그 내용이 신문사의 창작이란 설로 판타지 세계를 바꿨더군요. 논점을 보면 거의 안드로메다로 가더군요
판티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심 이해가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나 박정희가 유명하지 당시에 듣보잡 조선인에 불과한 박정희를 두고 뭔 음모를 꾸밀까요.
있는 그대로 사실이고, 만주신문이 이를 선전용으로 이용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 해당 날조 주장을 한 원 저작자도 하지 않는 주장을 하시는거죠
문제는 무슨 일계지원이니 만계지원이니 하는 되도 않는 소설이 지금도 도는건
무려 3년이 지났음에도 게시물만 복사 붙여넣기로 여전히 떠돌며
부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는 선동당한 네티즌을 꾸준히 양성하는 인터넷
특히 일베같은 열악한 커뮤니티가 원흉이 아닌가합니다.
댓글로 처음 달았으나 새로 글을 파는게 나을거 같아 정리해서 새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