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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물고 태어난 은수미가 흙수저 노동자편에 선 이유?
게시물ID : sisa_6665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순수나라
추천 : 15
조회수 : 1305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6/02/24 12:03:14

[이너뷰]금수저 물고 태어난 노동자의 편, 은수미를 만나다

초선 비례, 거기다가 여성 의원. 국회에서는 정말 아무 힘도 없는 말단 구성원인 그런 사람들이다. 초선이라는 것에서 이미 절반, 비례에서 나머지 절반, 여성이라는 점에서 또 절반. 권력이라고는 남은 것 하나 없는 직책이다.


그런 직책에도 불구하고, 만만찮게 수시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유명한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 받고 강릉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6년 가량 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정규 과정을 통과해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딴 뒤 노동 전문가로 재탄생 해서 의회에 진출한 은수미 의원이 바로 그 사람이다.


사실 이 이너뷰는 꽤 오래전에 시행된 것이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기사 자체를 정리할 시간도 부족했었다는 핑계가 있긴 하다.


이제라도 만나 보자.


참고로 은수미 의원은 통진당 해산과 헌법재판소 권한이 아닌 의원직 박탈이라는 초유의 결정으로 갑작스레 실시되는 보궐선거에서 성남 중원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부 경선을 앞두고 있는 중이다.


만남은 국회 내, 은수미 의원의 의원 사무실에서 있었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상투적인 호구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 은수미물 : 물뚝심송)


1. 상투적인 호구조사


물 : 진부하지만 출생과 가족 이야기부터 물어 보겠다. 먼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은 : 서울에서 태어난 셈이지만 정확하게는 배가 부르신 어머니께서 친정이신 정읍으로 내려가서 저를 낳으셨어요. 어려서부터 계속 서울에서 살았고. 신림초, 신림여중, 미림여고, 서울대까지 나왔으니, 20년 이상을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에서 살아온 셈이죠.


신림 1동에서만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강을 혼자서 건너 본 적도 겨우 고교때에요.


물 : 고교 때에는 뭐하러 한강을 도하하셨는가?


은 : 고교 때 미팅을 했어요. 원래 저는 그런 거 안하는 얌전한 모범생이었지만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사고를 쳤죠. 덕수궁에 가느라 강을 건넜고, 세명이 가서 이미 대학입시를 끝낸 남학생 셋과 만나 각각 짝을 짓는 형식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들이 저희 커플만 남겨놓고 이미 사라진 거에요. 제가 좀 어리숙하거든요.


그래서 그 남학생하고 걸어서 덕수궁에서 용산을 지나 한강을 다시 건너 왔던 기억이 납니다.


물 : 손이라도 잡아 보셨는가?


은 : 당연히 손도 못 잡았죠. 그런 정도가 매우 큰 사건일 정도로 아주 평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학교와 도서관을 왕복하면서..


물 : 아무리 옛날 일이라 해도 매우 측은하다. 부모님 얘기를 좀 해 달라.


은 : 저희 아버님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해병대 장교 생활을 하셨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보급장교 출신으로 수입이 좋으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집에 티비,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도 많았고 부유한 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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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아버지, 큰오빠와 함께


물 : 그 시절에 그 정도면 엄청난 부자 아닌가?


은 : 당시에는 요즘과 달라 같은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생활 수준의 격차가 심한 편이었어요. 저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집에서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서 친구와 자연스럽게 나눠 먹기도 했던 기억이 나요. 햄과 계란말이, 땅콩 잼 등 반찬을 자주 싸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거 싸가면 반에서 난리가 났었죠.


위로 오빠, 아래로 나이 차이가 많은 여동생과 함께 꽤 행복하게 살았고, 부족함을 느끼진 못했어요.


물 : 친구들의 가난을 겪어 보지는 못했는가?


은 : 어려서 기억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장난으로 밀쳐서 넘어지며 벽에 부딪혔는데, 벽이 무너지더라구요. 무지하게 놀랐죠. 판자집이었던 거에요. 저는 사실 그런 생활 수준의 격차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중학 시절에는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집을 방문 했더니 흙벽이 있는 집에 세를 살고 있더군요. 매우 충격을 받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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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제가 정치적인 인식을 하게 된 첫번째 이유가 바로 가난한 친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격차가 큰가? 똑같은 사람들인데... 하는 질문이었죠.


공부도 잘하고 나와 똑같은 친구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시절의 저에게는 풀길 없는 숙제였어요. 어려서 저는 구두를 신고 살았어요. 그 당시 이런 아이가 구두를 신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죠. 친구들은 모두 고무신이나 얇은 운동화였는데요.


이런 문제를 부모님께 여쭤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그런 생각을 깊게 하는 것도 원치 않으셨죠.


물 : 그런 것은 부모님께 배우기 힘들다. 책을 읽으면 되지 않는가?


은 :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정도. 금서도 있었는데 보봐리 부인, 데카메론 등이었어요. 어머님은 절대로 읽으면 안되는 책이라고 표시를 해 놓으셨고 당연하지만 저는 몰래,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웃음)


하지만 머리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았던 문제는 바로 빈부의 격차 문제였었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물 : 종교는?


은 : 3대째 성공회 집안이에요. 지금도 성공회 신자고,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등 종교 생활을 많이 했었어요. 피아노도 치고 하니 귀엽다고 당시 오빠들이 이런 저런 모임에 데리고 다녀줬는데, 그 때 이미 그 오빠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독재는 안된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던 같아요.


이런 것들이 나를 정치로 이끈 두번째 경험이었던 것 같네요.


물 : 세번째 이유도 있는가?


은 : 세번째 이유는 아버님.


아버님은 해병 장교였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랑했던 분이셨어요. 71년의 그 유명한 백만이 모였다는 연설 현장에 아버님이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무척 화를 내셨죠. 당시 일곱살 정도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가신 것이니 화를 내실만도 하지만 사실 제 기억에는 사람이 무지 많아서 힘들어 죽을 뻔했던 기억밖에 안 나요.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아버님은 불이익을 당했고, 결국 별을 달지 못하고 예편을 하시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지역 사무소 개소식 하며 아버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살짝 보였는데, 이런 거에요. 부모의 입장에서는 제가 얼마나 귀여운 딸이었겠어요. 공부도 잘하고 말썽도 전혀 안 부리던 예쁘고 얌전한 딸이 대학 들어가자 마자 집을 나가고, 제적 당하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더니, 구속되고, 고문 당하고, 대수술을 해서 죽네 사네 하더니, 그리고 나서 이혼까지 하고.. 아버님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이혼을 했어요.


스무살 이후 부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셈이죠. 대학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스스로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인생이 바뀌었던 거에요.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께 여쭤 본 적이 있어요. 아버님도 DJ를 사랑하셨고, 그만큼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신데, 후회하지 않으시냐고.


그랬더니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살아간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라고 답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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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DJ가 대통령이 될 때를 기억하는데요. 아버님은 당시 몸도 아프셨는데 97년도 대선 때 그 아프신 몸을 이끌고 아예 고향에 내려가서 차로 산골 산골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셨었어요. 그 정도로 정말로 DJ를 사랑하시던 분이셨던 거죠.


노무현은 싫어하셨어요. 그 때문에 나중에 이명박을 찍으셨을 정도. 실망하신 거겠죠. 반대로 어머님은 DJ 보다는 노무현을 사랑하셨던 분. 그렇게 저희 가족이 좀 복잡합니다.


물 : 집안에서 정치적으로 그렇게 갈라지면 싸움이 날 텐데..


은 : 87년도에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버님께서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이번 한 번 정도는 같이 가면 안되겠냐며 DJ를 찍어 달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이런 이유들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아요.


물 : 그렇게 얌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정치인이 되다니, 주변에서 신기해 할 것 같다.


은 : “너는 왜 안 변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대학시절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주로 그 질문을 하죠.


어린 시절, 초중고 시절 친구들은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나면 놀라기는 해요. 그 얌전하고 공부 잘하던 착한 여자아이가 맨날 노동 문제 얘기하고 알바생 최저임금 얘기하고 무엇보다도 정치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죠.


이건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을 거에요.


제일 중요한 것은 어렸던 시절에 느꼈던 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또 운명은 성격이라고 생각해요. 아버님께 물려 받은 그 성격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낸 것이겠죠.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흔한 얘기들 뿐이다.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라다가 좋은 학교 들어 가서 학생 운동 하다가 정치를 하게 되는 것. 우리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게 전부라면 이 인터뷰는  재미없어질 것 같다.




2. 대학 시절


물 : 이제 시간 순으로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은 : 대학 들어가서는 무척 힘들었어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그냥 너무나 생소한 문화적 차이.


자라면서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매우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거든요. 오빠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여동생이기도 했지만 길을 갈 때 차가 다니는 쪽 반대로 걷게 하며 보호해 주는 등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고 그래야만 하는 걸로 알았어요.


하지만 막상 학교에 가니 맨 시커먼 남자들 뿐인데, 이건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어요. 한번은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는데 뒤를 돌아보니 맨 야수 같은 남학생들뿐. 막 도망가고 싶었죠.


물 : 원래 당시 서울대에서도 여학생 비율이 매우 적었으니 이해는 간다.


은 : 그 때 제가 날씨가 추워서 어머님께 물려 받은 긴 가죽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선배들이 음대 미대 갈 아이가 사회대 왔다고, 분위기 망친다고 욕을 하곤 했었죠. 음대 미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기생 남학생들이 하는 농담조차 이해를 못했으니 말 다했죠. 그들로서는 친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지만, 그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면 막 눈물이 나올 정도였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그 시절, 운동권이건 뭐건 남학생들은 여학생이 보이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 면 따귀를 때려도 아무도 안 말리던 시절이었다. 부자집 따님께서 최초로 온실을 벗어나 사회에 나가 겪게  되는 문화충격. 과보호의 폐해일 수도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님은 당시 반공연맹 같은 단체에 직위까지 가지셨었는데, 사실 그건 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죠. 그게 알려지면서 학교에선 아무도 저에게 함께 운동을 하기를 권하지도 않았어요. 다른 여학생들은 모두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아무도 접근하지도 않았었죠.


물 : 그러니까 학교의 동기생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지는 못한 것 같다.

 

은 : 그렇죠. 한번은 학교에서 5월에 데모를 하게 되는데, 나름대로 지식인이 되겠다고 마음 먹고 온 상태였으니 이것은 부당하고, 학교는 자유로워야 하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참여했었어요. 하지만, 최루탄 한 방이 터지니 백미터 달리기 하듯이 총알같이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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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어요. 정의, 자유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또 한번의 경험이 있는데 좀 슬픈 얘기에요. 도서관에서 선배가 투신을 한 적이 있었죠.



1983년 11월 8일 당시 도시공학과 4학년 황정하 학생은 도서관에서 투신을 한다. 이후 신림사거리에 있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8일 후 사망하게 된다.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어요.


물 : 그건 좀 무서운 얘기다.


은 : 그렇죠. 거기다가 사람이 떨어졌으면 응급조치라도 해야 했지만 저는 역시나 전경이 달려들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던 거에요. 그 때의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물 : 스스로가 상황을 회피한 걸로 생각한 건가?


은 : 내 자신이 너무나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물 : 보통 그렇게 시작하긴 하지만, 너무 충격적인 경험을 하신 것 같다.


은 : 바로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저항을 해야 한다는 고민. 아무도 제가 학생운동을 할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더해 또 다른 사건이 터지죠. 당시 여학생 강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마 인문대 학장으로 기억되는 분이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 운운하는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천박한 표현이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니 집에서는 유학을 권했어요. 부모님은 제 성격을 알았고, 한 번 꽂히면 끝까지 간다는 것도 알았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고민을 하고 있자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겠죠.


물론 유학 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이제 급기야 선배들을 따라 다니면서 저 좀 끼워 달라고 하소연을 할 정도가 되었죠.


물 : 그러나 문화적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았나.


은 : 그래서 노력을 했죠. 적응을 하려고 열심히 따라 다녔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도 했고 스스로 어울리려고 노력을 했는데 벽에 부딪힌 것은 오히려 유물론 그 자체였어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저런 공부를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했는데 받아 들여지지가 않았죠.


물 : 원래 그 동네에서는 질문이 잘 안 받아들여지는데.. (웃음)


은 : 그래서 어느 순간 질문을 포기하게 된 것 같아요.


어느 해인가 4.19 때 행사에 참여하려고 가다가 선배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어요. 심하게 싸우다가 막 토하고 그럴 정도였는데 그 때 이후로 질문을 잠시 묻어 둬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에 선배들이 백태웅을 소개해 준 것 같아요. 그 이후 백태웅씨와 친구가 되는데 84년도에요. 백태웅이 4학년이고 제가 3학년일 때 백태웅을 학도호국단 단장, 저를 학도호국단 여학생부장으로 올리게 되고, 학자추라고 총학생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죠.

 


당시는 정부가 만들어 놓은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하고 있었고, 이에 각 학교별로 총학생회를 재건하 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군사문화의 잔재인 학도호국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각 학교에는  총학생회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운동권을 학도호국단에 투입시켰고, 저는 여학생회를 만들라는 임무를 띠게 된 것이에요.


그 결과 당시 학교에 상주하던 안기부 직원들이 제 뒷조사를 시작하는데 뜻밖에 제가 성적도 무지하게 좋고 아무런 과거 이력이 없었던 것이죠.


물 : 안기부 직원들이 당황했을 것 같다.


은 : 제가 데모를 나가면 꼭 여고 뱃지를 달고 나갔었거든요. 대학생이 아닌 걸로 위장을 한거죠.


물 : 지금 어리게 보이는 외모를 자랑 하시는 건가? (웃음)


은 : 뭐 그럴 수도. 그러고 나가면 전경들이 여고생들이 왜 여길 오냐고 야단치며 빨리 집에 가라고만 하니 얼마나 편했겠냐는 거죠. 저는 그렇게 빨리 가라는 얘기만 듣고, 얌전하게 “네~” 이러면서 다시 돌아오곤 했었어요.


그런 정도였으니 안기부 직원들도 저를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요. 무지하게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어떻게 잘 설득해서 이용하려던 생각이었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어떤 시점에 예상에 없던 시위를 앞에서 선동하고 지휘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안기부 쪽에서 출신고교에도 연락을 하고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하고 공작을 시도한 거에요.


제가 열 받아서 그 얘기를 학생들에게 터트리자,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흥분해서 꽤 규모가 있는 시위가 벌어진 적도 있어요.


안기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속았다고 느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쪽에서 보기에는 당연히 그렇게 보였지 만 사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 : 안기부 직원들을 속이신 건가?


은 : 저는 속인 적이 없어요. 내가 언제 스스로 얌전하다고 그랬나?


물 : 그 때 자신의 내부에 있던 선동가적인 기질을 발견하셨나 보다.


은 : 사실 내가 이렇게 소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도 의원 생활 하면서 마이크를 많이 잡는데 어느 정도냐면 365일 중에 현장을 320번을 가는 정도에요. 만 명 앞에서, 이 만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하는데, 겁은 안 나죠.


아마 학생시절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목소리도 작고 체구도 작아서 남들처럼 당당하거나 우렁찬 연설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에 겁은 안나요. 물론 더 좋아하는 것은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 것이죠.


이렇게 자기 안의 소질을 발견한 여학생은 당시 대다수 운동권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노동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전형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3.노동 운동 시기


물 : 노동 운동은 어디서 시작하셨는가?


은 : 구로공단 봉제공장. 당시 사용했던 이름은 봉희에요. 그 때 유행한 봉봉 오렌지 쥬스의 이름을 따서 봉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죠. 젓살도 아직 안 빠진 정도로 어리게 보여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아요.


봉봉 오렌지 쥬스. 이거 정말 히트작이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린 추억의 상품이다.


현장에서 1년 6개월 정도 있었는데..


물 : 성과는 있었는가?


은 : 성과는 무슨, 결국 구속이나 되고..


이 대목에서 살짝 놀랐다. 보통 정치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그 때 무슨 조직을 결 성하고 무슨 사건을 일으키고 이런 저런 성과를 올렸다고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성과는 무슨~ 하는 부분에서의 목소리 톤은 바로 지금 당신이 상상하는 그 톤. 특이했다.


제가 언제나 적응에 좀 문제가 있어요. 가리봉에 가서 자취를 하면서, 영등포 산선에서 미싱을 하러 간 사람들에게 미싱 교육을 시켜줘요.


영등포 산선은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준말. 당시 노동운동사를 논하기 위해서는 산업선교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는 너무 길기에 별도의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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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조금 배워서 가긴 하는데 미싱의 ‘ㅁ’자도 모르는 상태였던 거죠. 그 동네가 원래 공장에 시다로 들어가면 절대 미싱사를 안 시켜 줍니다. 그래서 메뚜기를 하게 되는데, 어떤 공장에서 시다 하던 아이들이 다른 공장에서는 미싱사로 바로 들어가는 거죠. 저도 나이 속이고 미싱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 미싱을 한 번 시켜 보더니 바로 하는 욕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개씨부랄년..”


공장에서는 바로 알아 본거죠. 나이도 어리고 생긴 것도 어리고 미싱도 시원 찮으니까 다른 공장에서 시다 조금 하다가 미싱사입네 하고 들어온 걸로 알아본 거에요.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오거나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평생 그런 욕을 들어온 처지이지만 저는 평생 처음 그런 욕을 들어봤어요.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물 : 원래 처음 들어본 욕은 기억에 남기 마련.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심한 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신 것 같다.


은 : 그러면서 하루 종일 내가 여기에서 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즈음에 우리 집이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삼층집이었어요. 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부모님께 미안하니까 두어달에 한 번은 집에 가거든요. 그게 너무 생소한 거에요. 그 동네에서 다녀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거죠.


왜 이 동네는 이렇게 다를까 하는 겁니다. 그런 생소함에 적응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어요.


거기다가 학교에서는 항상 노동자는 정의롭고 항상 옳고 그런 것처럼 얘기들을 해요. 너무 모르는 얘기죠. 정의는 개뿔..



이 부분,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를 접하게 되면서 겪는 중요한 충격이다. 특히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노동 자는 정의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그걸 듣고 배운 사람들이 겪는 충격은 상상외로 크다. 노동자는  결코 정의의 화신 따위는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생활인들일 뿐이다. 그들의 생활환경과 그 들의 용어는 거칠고 투박하다. 노동의 정의는 그들의 말투나 습관, 외모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장에서는 항상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불량을 내면 머리채 잡고 싸우고, 불량을 니가 냈냐, 내가 냈냐 하면서 싸웁니다. 그걸 또 회사가 이용을 해요. 누구는 급여를 더 주고, 누구는 급여를 덜 주고 하죠.


하루에 열두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도 급여를 서로 모르게 합니다. 그렇게 차별을 해요. 제 시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무단 결근을 했어요. 그러고 다음날 나오게 되면 그냥 마구 밟아 버립니다.


물 : 때린다는 얘기인가?


은 : 그냥 때리는 정도가 아니에요. 실제로 구두발로 마구 밟아 버립니다. 그걸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온 저도 그냥 옆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어요. 말릴 힘이 없죠. 그러고 나서 또 일을 해야 해요. 저도 해야 되고 맞은 아이도 퉁퉁 부어서 또 일을 해야 됩니다. 그저 빨간약이나 좀 발라주는 거죠. 그 장시간 노동을 그렇게 맞아가며 해야 되는 거죠.


물 : 드디어 민중들 삶의 현장을 목격하시는 건가?


은 : 미싱사 선배들은 얘길 합니다. A급 미싱사가 되려면 손톱이 세 번 빠져야 된다고. 저도 한 번 겪어 봤는데 기계식 미싱에 드르륵 하면서 바늘이 손톱을 관통한거죠. 그 때 반장이 뛰어 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게 당연한 거죠.


반장이 오더니 하는 말이..



“야, 이 멍청아, 옷감에 피 묻잖아..”



매우 순화시킨 표현일 것이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러면서도 그냥 손가락을 싸매고 빨간약 바르고 또 일을 하는 거에요.


폭력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참는 게 아니라 그냥 저항할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거고, 적응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회사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사람들은 참 무력하구나..


하지만 또 다른 면은 숨겨져 있어요.


물 : 어떤 면인가?


은 :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안다는 거죠.


제가 왜 걸렸냐면, 유인물 뿌리다 걸린 거에요. 그렇게 몇몇이 모여서 얘길 하는데 이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합니다. 우리도 학출 하나면 있으면 좋겠다..



학출은 대학생 출신을 말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전태일 이후로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싸움에 운 동권 학생들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당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유인물을 뿌리면 바로 걷어 가고 다들 무관심 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누군가가 나섰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그러다가 작업복 입은 채로 바로 구속이 되었는데, 공장에는 소문이 돌았어요. 봉봉이는 특급 빨갱이라서 평생을 감옥에서 못 나올거라는 얘기죠. 이봉희는 가명이고 본명이 은수미고, 무슨 간첩 잡은 것처럼 회사에서 소문을 냈어요.


물 : 함께 어울렸던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경고장의 역할도..


은 : 그렇죠. 그런데 제가 6개월만에 덜렁 나와가지고 공장엘 갔어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죠. 인사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거에요. 그렇게 그냥 갔어요. 출근 투쟁 뭐 이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잡혀 갔으니까 그냥 인사하려고.


당연히 못 들어가게 하죠. 경비아저씨들은 기겁을 하고 난리가 나죠.


그 때가 바로 점심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그 광경을 사람들이 본거죠. 그 중에 한 명이 눈치 빠르게 살짝 나와서 얘길 해 주는 거죠. 너 평생 못 나온다며,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네, 이러는 거죠.


거기다가 놀라운 것은 그래도 “네 덕분에 우리가 좋아졌어.”라는 거에요. 공장은 전동 미싱이 돌아가고 무척 덥거든요. 그런데 여름에 선풍기도 없어요. 열두시간 작업하고 나와 작업복을 벗어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죠. 그런데 선풍기를 달아 줬다는 거에요.


거기다가 아홉 시에 작업 시작인데 여덟 시부터 일을 시켰거든요. 한 시간 일당을 떼어 먹는 거죠. 유인물의 요구사항 중에 그게 있었어요. 일당을 제대로 달라.


겨울에는 너무 추운데 난로가 없어서 다리미에 손을 덥히고 했었는데, 그것도 요구했죠. 난로 놔달라.


회사가 그걸 해 줬다는 거에요. 단 한 번 유인물 뿌린 걸로. 이런 게 성과라면 성과죠.


물 : 동료들이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은 : 그렇죠. 저는 그 때 이미 동료들을 사랑하게 된 거에요. 사람을 사랑하게 된거죠.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어려서 저 친구는 왜 저렇게 가난할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제가 그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들어가서도 그런 경험을 한 거에요. 사회보다 먼저 그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곤 해요.


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작은 이익을 위해 서로 머리채 잡고 싸우고, 저항할 줄 모르고 폭력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그걸 깨닫게 된 거에요.


물 : 확실히 새로운 경험인 것 같기는 하다. 잡혀 가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은 : 잡혀가서도 제가 참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검사가 저를 쉽게 본 것 같아요. 바로 반성문 쓰고 나갈 거라고 생각을 하더라구요. 그 때는 잡혀가면 일단 다 반성문이거든요. 반성문을 쓰면 풀어준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 반성문을 끝까지 안 썼어요. 그러다 보니 별 것도 아닌 일인데도 결국 집행유예까지 갔는데 그건 좀 희귀한 일이었거든요. 보통은 반성문 쓰고 바로 나오니까요.


물 : 반성문을 안 쓴 이유는?


은 : 제가 왜 반성문을 안 썼을까요? 공장의 친구들이 떠오른 거에요. 저는 뭐 공장에 가서 노동자를 조직하고 뭐 이러려고 한 것도 아니에요. 그들과 함께, 그들과 같이 뭔가를 좀 바꿔보자는 생각이 있었고, 그렇게 옳은 일을 하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했는데, 내가 반성문을 쓰면 그 약속을 깨는 것 아닌가, 그 친구들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 순 없었죠.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말을 한 것뿐인데 내가 왜 반성문을 써야 하는가? 결국 안 썼어요.


그렇게 6개월간 구속수감 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재판을 받고 결국 집행유예로 나온 거죠.


은수미 의원의 첫번째 옥살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저 더우니 선풍기 좀 놔달라, 일한 시간 만큼 시급을  달라, 추우니 난로를 놔달라 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이 날 때까지 장장 6개월을 감옥 에서 보내게 된다. 장발장이 프랑스에만 있을까?



4. 감옥살이의 추억


물 : 감옥에서는 어떻게 살만 하셨는가?


은 : 그 시절에 감옥생활이 또 기억이 많이 납니다


영등포 구치소에 있었는데, 85년도니까 시절이 참 흉흉했어요. 방이 없을 정도로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었죠. 그런데 거기서도 제가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독방에 안 넣고 신입방에 넣어주고 나서, 나갈 때까지 계속 신입방에만 있었습니다. 미결수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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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거기 있던 아줌마들이 저를 ‘신입방 이쁜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6개월 내내 있으면서 화장실 아니 변기 청소 같은 거 다 하고 그러면서 지냈죠. 그 때 제가 집시법 위반이었었는데 거기서는 우리나라에도 짚시가 있냐고 깜짝 놀라고 그러는 분위기였어요.



감옥 내에서도 썩개가 횡행한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당시 재소자들이 집시법이라는 말을 알았을 가능성은  실제로 별로 없다.



밤마다 한 두명씩 새로 들어오면, 우리는 몇 명이 들어올까, 무슨 죄목일까 뭐 이런 걸로 내기를 합니다. 내기를 하면 건빵이나 별 사탕을 걸고 하죠.


물 : 그건 군대와 상당히 비슷하다.


은 : 웃긴 일도 많습니다. 밤에 다 누워서 자고 있는데, 신입이 한 명 들어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일어나서 “통으로 들어왔어요?” 라고 물어보니까 신입이 “네” 하는 거에요. 우리는 다 건빵을 막 던지면서 “이겼다~”고 환호를 하고 그랬죠.


물 : 통은 뭔가?


은 : 통은 간통죄를 의미하죠. 당시에는 여성 죄수들 사이에 간통죄가 열이면 일곱 여덟명 될 정도로 많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확인을 해보니 간통이 아니었던 거에요. 사기죄로 들어왔는데..


물 : 그러면 거기서 또 사기를 친 건가?


은 : 그게 아니라, 신입이 들어오면 교도관이 교육을 시켜요. 방에 들어가면 무서운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인사도 잘하고 뭐 물어보면 바로 바로 답을 해야 되고,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 겁을 많이 주거든요.


그래서 이 아주머니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들어왔는데, 이 분이 원래 시장에서 새우젓 장사를 하시던 분인 거에요. 그러다가 죄목이 거창해서 사기지, 새우젓 장사가 망해서 어찌어찌 하다가 돈을 못 갚고 사기죄로 들어오게 된 건데, 사람들이 통으로 들어왔냐고 물어 보니까 새우젓 통 얘기를 하는 줄 알고 그냥 얼결에 “네”라고 답을 한거죠.


그러면서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가 새우젓 통으로 먹고 살다가 들어왔는지를 바로 아는지, 진짜 점쟁이가 따로 없구나 싶어서 놀랐다는 거에요. 통이 그 통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 해프닝도 겪으면서 신입방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다양한 아주머니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된거죠. 집시법이 뭔지도 알려 드리고, 아줌마들이 뿔난 도깨비인 줄 알았던 운동권 학생들이 알고 보니 신입방 이쁜이처럼 그냥 착한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이들 저에게 동조를 해 주기도 하시고..


물 : 거기서도 뭔가 과업을 수행하셨는가?


은 : 제가 한 건 아니고..


감옥 내에서도 시위가 많이 벌어지거든요. 그런데 누구나 신입방은 겪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방에 계시는 분들도 저를 아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뭘 벌이면, 그 신입방 이쁜이가 뭘 한다고? 걔 예쁘고 착하던데? 도와줘야지~ 뭐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거에요.


그 때 5.3 인천 사태가 벌어집니다. 후배 학생들이 엄청 들어와서 단식 농성하고 난리가 났었죠. 이걸 이 아주머니들이 동조를 해 준 겁니다. 그 때 최초로 구치소 내에 최루탄이 난사되고 난리가 났는데, 하필 바로 그 날 저는 재판 받고 나온 거에요.


일만 벌여놓고 저는 나와버린 셈이에요.


물 : 그 때 같이 계신 분들이 살짝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은 : 그러지는 않으셨을 거에요. 재판 절차를 너무 잘 아시니까, 갑작스레 재판 받고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래도 교도관에게 살짝 허락 받고 비둘기라도 띄우는데 저는 그것도 못했죠.


물 : 비둘기는 또 뭔가? 전문 용어가 너무 많이 나온다.


은 : 그건 메모 같은 걸 살짝 보내는, 연통을 하는 그런 걸 말하죠. 그런 것도 못하고 나와서 나중에 전해 듣고 말았어요.


그 때 나중에 전해 듣기로 바로 그 새우젓 통 아줌마가 주동자로 몰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랑 무척 친하게 지냈었는데, 너무 죄송했죠. 지금도 어딘가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래요.


물 :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얘기를 보실 수도 있는데..


은 : 그럴 수도 있겠죠.


사실 저는 노동환경에서 있었던 1년반과 구치소에 있었던 6개월의 경험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전혀 몰랐던 세계, 바닥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사람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배웠어요.


정말 열악한 상황이죠. 그런 밑바닥 상황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고 잔인하게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남자 교도소는 제가 안 가봤지만 거기서도 그렇다고 하죠. 성폭행 한 사람 들어오면 난리가 나죠. 싸움도 많이 나고.


거기다가 당시만 해도 교도소는 냉난방이 전혀 안되었잖아요. 요즘은 안 그렇겠지만. 강릉에 있을 때에는 언젠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던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 자신의 몸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다 얼어 있더라구요. 또 여름에는 변기에서 구더기가 기어 올라와 바닥에 막 기어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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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도 서로 드잡이하고 한 사람을 나쁜 사람 만들어서 괴롭히고. 당시에는 내의 같은 것을 배급해 주는데, 그 수량이 부족해요. 그걸 얻기 위해 폭력과 위계가 난무합니다. 그걸 제가 이십대 초반의 눈으로 보게 된 거에요. 사람들이 이 작은 이권을 위해 얼마나 추해지는가를 본 겁니다.


물 : 밑바닥 인생을 제대로 경험하신 듯하다.


은 : 이런 일도 있어요. 당시 감옥에서는 커피가 자유의 다른 이름이에요. 평생 커피 한 잔도 안 마시던 사람도 감옥에 들어오면 커피를 그렇게 마시고 싶어합니다.


어떤 오십대 아주머니 한 분이 평생 노래 한 번 안 해본 분인데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러다가 이십대 교도관이 어머니뻘 되는 이 아주머니에게 자기 앞에서 노래를 세 곡을 하면 커피를 한 잔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교도관도 장난이었죠. 그냥 노래 세곡 하면 커피를 준다고 한 것뿐인데, 이 아주머니가 진짜 똑바로 서서 노래를 하시더라구요. 천주교 신자였는지 성가를 두 곡 정도 하시고 나서 동요를 부르시더군요. 나비야, 나비야 하는 노래를 하는 겁니다.


옆에서 보는 제가 정말로 눈물이 나더라구요. 교도관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이게 너무 진지해지니까 놀란 거에요. 착한 교도관이었어요.


또, 감방에 이런 저런 물품 반입도 해 주고 청소도 해 주고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에게 뇌물을 줍니다. 뇌물이라고 해 봐야 별 사탕 같은 거죠. 자신에게 그 작은 이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져다 달라고 청탁하는 거에요.


헝거 게임이라는 영화 있는데, 그렇게 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아주 소수만이 살아남는 게임을 시키잖아요. 그런 헝거게임이 거기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 게임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 : 보통 정치범들이 그런 것을 거부하지 않는가?


은 : 보통은 정치범들이 그런 걸 거부하는데, 전혀 정치범이 아닌 분들 중에서도 그런 추한 게임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가진 분들은 그런 룰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인격적으로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이건 아니다, 나는 가축이 아니다 라는 자긍심을 가진 경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감옥에는 목욕실이나 세탁실이 별도로 없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조그만 세면대들이 있는 곳에 가서 3분 이내에 칫솔질, 세면, 머리감기까지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들 중에서 매일 팬티를 갈아입어야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팬티를 빨죠. 빨래 시간이라고 해야 일주일에 한 번 주는데 팬티를 일곱 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하니까 그 세면 시간에 팬티를 빠시는 겁니다.


그건 교도소 규칙상 불법이죠. 그러면 또 누군가 그걸 꼰지릅니다. 그런 곳이에요. 그렇게 되면 검방이 나오죠.


물 : 방을 검사하겠다?


은 : 네.


검방~ 하고 외치면서 교도관들이 방을 뒤집니다. 그러면 몰래 빨아서 널어둔 팬티가 나오죠. 그러면 그 주인을 찾아서 벌을 세웁니다. 오십대 육십대 되는 아주머니들을 그 팬티를 앞에 들고 복도에 서서 벌을 서게 합니다. 그나마 이삼십대라면 좀 나은데 오육십대 아주머니들을 그렇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다가 누군가 사십대 아주머니가 대신 나선 겁니다.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거죠. 차라리 내가 그 벌을 서겠다면서 나서는 거에요. 그 사회에서는 그 진짜 별 거 아닌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생깁니다.


90%는 나쁜 꼴이에요. 거의 대부분이 추한 모습이죠. 그러나 10%의 감동적인 모습이 있다는 거에요. 사람이 사람을 보호하고 서로 아껴주고 위로하는 모습.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거죠. 어떤 조건을 만나면 그 10%가 확대되고 사회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어요.


인간 사회가 정글이 되어 간다는 것, 인간의 본성이 나빠서일 수도 있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속에 10% 밖에 없는 그 아름다운 내면이 발휘될 거라는 믿음이 생기죠. 누군가 손을 잡고 누군가가 나서서 그걸 확대시키자고 얘기하면, 인간 사회가 얼마든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 거에요. 그런 일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모이는 교도소, 구치소에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희망을 찾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지 나치게 낙관적인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은 조만간 이런 곳을 나가 사회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 만도 아닌 것이, 대부분은 그런 광경을 보 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쪽일까?



나중에 강릉에 가서는 꽤 오래 감옥생활을 했는데요. 그 때도 커피가 문제였어요. 다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저는 몸도 안 좋고 오래된 죄수고 하다 보니까, 교도관이 밖으로 불러 내서 커피도 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미안한 겁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어요.


교도소 내에서 필요한 김장을 우리가 모두 할 테니, 김장을 하고 나면 커피를 주고 하루에 한 번씩 더운 물로 목욕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였어요.


강릉도 원래 구치소와 교도소가 같이 있었는데 미결수가 많았어요. 미결수에게는 일을 시키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교도관들이 먹을 김장을 여자들에게 시키곤 했었죠. 그것도 문제긴 한데, 그래서 아예 본격적으로 그것 말고 재소자들이 먹을 김장까지 우리가 모두 해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그 제안이 관철될 때까지는 해오던 교도관들 먹을 김장조차 안 하겠다고 나선 거죠.


아주머니들은 그나마 교도관들 먹을 김장이라도 계속 하고 싶어했어요. 왜냐면 그 시간 동안은 그래도 콧바람이라도 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나마도 못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금만 참자, 이제 본격적으로 김장을 하게 되면 더 좋지 않냐고 설득을 한거죠. 커피도 먹을 수 있고..


이래 봬도 당시에는 복역 기간으로 따져봐도 최고 좌장급 이었으니까요.



결국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연대를 통한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성공한거죠. 그리고 전체 김장을 하게 되면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함께 웃고 보듬고 그럴 수 있게 되었어요.


물 : 멋진 성과인 것 같다.


은 :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교도소 내부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자신들이 복역중인 죄수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


물 : 마치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지붕 청소 후에 맥주 한 병 같은 순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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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링크로 http://www.ddanzi.com/ddanziNews/3861821


출처 http://www.ddanzi.com/ddanziNews/386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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