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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조언 부탁드립니다.
게시물ID : military_336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류세아
추천 : 1
조회수 : 74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1/04 07:21:02
그간 제가 연재하던 게시물이 있었죠. 하지만 중간에 글 쓸 시간도 적어지고 글 내용 역시 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너무 주관적인 글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멋대로 중단해 버렸었습니다. 

정말 시리즈 이어갈 때마다 꾸준히 보아 주시던 분들 많이 계셨는데,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것이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제 글이 덤덤하게 흘러가기를 바랬어요. 그냥 이런 경험을 했었다는 듯이. 하지만 여기에 대고 글을 직접 쓰다가 보니 과도하게 감정이 들어간 글이 되어버리더군요. 글을 쓸 때 그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쓰고 재확인절차 없이 그냥 확인을 눌러버리니까요..

그래서, 근래..는 아니지만 여름학기가 끝나고 겨울에 접어드는 지금이 되어서야 다시 연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워드파일로 우선 글을 쓴 다음 충분한 재고를 거쳐서 제가 원하는 형태로 제 군생활을 표현해보고자 해요.
조금 더 디테일하게...말이죠.

혹시 시간이 있으시다면, 장문의 글이지만(심지어 도입부지만) 읽어 보시고 혹여나 부족하거나 메꿔야 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래요.
글 전체는 완성되지 않았는데, 완성이 되는 날부터 명확하게 분량 잘 재고 끊어서 막힘없이 연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제 글 글머리에 적었던 주의사항을 적어봐야겠네요.
모든 분들이 저와 같은 군생활을 겪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보다 훨씬 일찍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께서는 꽤 높은 확률로 저만큼의 군생활 이상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혹여나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군대라는 개념 자체가 제가 경험한 그것과 크게 다른 곳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겉핥기식 행정, 계급사회로 인한 갖가지 문제와 부조리들.

글에서 다루는 내용이 충격적이고 믿겨지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전부 실제로 제가 경험했던 일을 그대로 떠올려서 쓴 글입니다. 
그렇다고 제 글만 보시고 군대에 대해서 색안경을 쓰라는 건 아니에요. 군필 분들은, 아 저런 군생활도 있었구나, 혹은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는 계기가 되고고, 미필 분들께는 군필자가 느꼈을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그들이 힘듦을 호소할 때 귀찮아하기보다는 진심이 담긴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줄 수 있게 되는 글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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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대
지금부터 내가 적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들려주지 않을, 그런 이야기야. 201x년의 겨울 어느 날 시작된 이야기. 남자라면 한 번쯤 다 겪었고, 앞으로 겪을 것이라고들 하는 이야기. 전역하고, 예비군 훈련을 다녀와도,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쉬이 내 침대로 찾아와 밤을 고달프게 하는 이야기.

나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같은 하숙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녀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난 으레 두 그릇씩 밥을 먹곤 했지. 모 드라마에 나온 말을 인용하자면, 한 그릇은 너무 짧고, 세 그릇은 치사했으니까. 가을 쯤 만난 그 사람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나는 도무지 진심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마는, 입대가 눈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야. 5개월 뒤에 입대할 걸 뻔히 알면서도 괜한 연인관계로 발전하여 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싫어서, 사실은 남은 5개월 간이라도, 연인이 아니어도 좋으니 차인 후의 그 어색한 관계보다는 가까운 관계로 있는 것이 좋아서. 난 용기없는 선택을 했었지. 그냥 흔한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의 순수함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

마지막 인사로 밥 한 끼를 먹은 뒤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 꼭 다시 보자는 어투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던 기억이 나. 그녀에게는 아마도 내가 2년이라는 시간동안 굳이 신경써서 기억할 필요 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랬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그렇게 바보같은 첫사랑의 기억이 끝나고, 나는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 같았던 입대일을 맞았어.

입대는 모 보충대로 하였어. 보충대라 함은, 훈련소로 보내기 전에 입대자들의 신체상태 및 정신상태를 체크하고, 각종 필요한 보급품들을 나눠주는 곳이야. 이 곳에서 우리들은 '장정'이라 불리우는데, 보충대의 '장정' 2박 3일, 훈련소의 '훈련병' 4주일을 지내고 나서야 드디어 흔히들 말하는 군대의 최하위 계급인 '이등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지.

입대 당일은 보충대 앞이 인파로 득시글거렸어. 보통 매주 정해진 요일에 입대자들을 받아들이는데, 그 날은 특별히 소화가 안 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근처에는 국밥집이 많아. 주변의 국밥집이 꽉 차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늦게 도착한 나는 근처의 분식 식당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마지막 식사를 하였고, 그 때 먹었던 라면은 그렇게 목에 메여 군생활 내내 내려가지 않을 것만 같았지.

시간이 되었고, 입대자들은 보충대의 연병장- 사회에서의 운동장과 같은 개념이야-으로 들어와 달라는 말을 들은 나는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홀려 가듯 다른 빡빡이 입대자들과 함께 보충대 안으로 빨려들어갔어. 입대하는 사촌을 배웅하러 갔을 때, 입대자를 사열한 뒤 부모님들과 인사시키는 것을 봤던 나는 여기도 으레 그렇겠지 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어. 빨려들어온 뒤로 '이제 배웅오신 분들께서는 돌아가 주십시오'라는 방송이 아련히 들려왔고, 울고 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 했지. 아직 입고 온 사회의 옷조차 그대로인데, 상황이 전혀 실감이 되지 않았어.

곧이어, 우리는 자신이 온 지역별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매우 복잡한 작업이라서, 우선 자신이 입대신청을 한 지역별로 나누어 서도록 지시받았는데, 으레 많은 인파에 이런 지시를 내리면 우왕좌왕하게 된다는 것을 고등학교 정도만 나왔어도 모두들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우리도 별다를 바 없는 갓 스물한 살 아이들이었으니, 역시 별다르지 않게 우왕좌왕했어. 아마도 그곳의 행정잡무를 맡는 행정병들이 우리들을 분류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척 보기에도 입대자 인원에 비해서 행정병의 인원이 매우 부족했기에, 상황은 정말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지. 

그 때, 누구였는지 모를 한 입대자가 행정병 상병즈음 되어보이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어. 대단히 사회스러운 질문이었지. 자신의 이름이 이 지역에 속해있는 것이 맞냐는 것이었어. 하지만 대답은 비 사회적이었지. '넌 니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 이 미친새끼야?'

나 역시 입대신청을 경기에서 하고 직후에 경남권으로 이사했었기에 내가 경남 쪽으로 가야하는지 경기 쪽으로 가야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행정병의 대답을 듣자 그들에게는 질문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결국 나는 주변에 간부로 보이는 사람에게 질문했고, 친절하게 답변을 들을 수 있었지. 내 모든 군생활에서의 판단이 이러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난 항상 좋지 못한 결과가 예정된 방향으로 움직이게 돼.

여튼, 그렇게 지역별로 분류된 우리는 각기 번호를 부여받고 '구대'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사회에서의 '반'과 같은 개념이었어. 그렇게 구대 별 호실로 안내받은 입대 첫 날의 밤을 맞았지. 나는 첫 날의 첫 불침번이 되었는데, 불침번이라 함은 수면 중 도망치는 입대자가 없는지, 혹은 이상징후를 보이지는 않는지 관찰하는 사람을 칭해. 번호대로 3~4명씩 돌아가며 약 2시간씩 근무했었는데, 가장 깊게 잘 시간인 1시~3시경에 갑자기 일어나서 2시간동안 불침번을 서는 것은 진정 곤욕이었지.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입대 첫 날 잠을 이루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어스름한 내무실의 불빛 아래에서 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고이 적어 온 수첩을 꺼내 이름과 번호를 2시간동안 읽었어. 눈을 감으면 얼굴이 생각나는. 바로 며칠 전까지 입대주를 먹자며 술집에서 밤을 같이 새웠던 친구들. 2년 동안 꼭 건강해야 한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던 어머니. 애써 태연한 척 하시면서 돌아보지 않으시고 훌쩍 낚시를 간다며 현관문을 나서버리시던 아버지. 다시 보지 못할, 아니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보자며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그 사람.

핸드폰 광고에서나 들어본,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리고 다음날 아침이 왔어. 보충대에서는 식후 흡연만이 가능했는데, 나는 흡연자가 아니었지만, 흡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굉장한 곤욕이었던 것 같아. 06시에 기상하여 어제 입고 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식당으로 출발한 우리는 그렇게 인생 최악의 아침 식사를 하였어. 식판은 잘 닦여지지 않아 전날의 반찬이 묻어있었고, 식기와 배식대의 위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 그리고 식후 흡연 시간 화재 방지를 위한 드럼통 재털이 주위에 원형으로 모여서 담배를 태우는 흡연자들. 

그날 우리는 군복을 배급받았어. 군화, 상의, 하의. 원래같으면 야상과 일명 깔깔이라고 불리우는 내부 피복을 같이 받았어야 하는데, 위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해. 그렇게 사회에서의 옷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이제 문제가 생겼어. 당시 한겨울이었는데, 우리는 야상과 깔깔이를 보급받지 못했잖아? 전날 입고 온 겉옷이라도 입게 해주면 좋으련만 끝끝내 우리는 얇은 군복 상하의를 입고 영하 십오도를 남짓거리는 보충대를 돌아다녀야 했지. 

전날 입었던 옷가지는 벗어서 가지런히 정리하여 집으로 소포를 보내. 이 때 한동안 연락하지 못할 집에 부칠 편지를 같이 동봉할 수 있는데, 딱히 어색하고 슬퍼서 별 말 적지 못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아. 그렇게 구대에서의 2일차 역시 지나갔어. 

3일째 되는 날. 아무래도 남자들끼리 3일 같이 붙어있으면 친해지기 마련이지. 이제 슬슬 생활관 근처 자리에 있던 사람들끼리 말도 트고 통성명도 했는데, 헤어지는 날이 된 거야. 보충대의 시간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지만, 3일째쯤 되면 지나간 2일이 그리 길지만은 않았었던 것 같은 느낌에 젖기도 해. 우연찮게도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사람, 어쩌면 길에서 몇 번 봤을수도 있을만큼 가까이에 살았던 사람들. 혹은 아무 관계 없어도 이제 슬슬 친해지기 시작한 사람들.

3일차 아침에는 훈련소를 추첨해. 남자들은 흔히 들었듯이, 백골, 백마, 오뚜기 등등 이른바 군기강이 빡세기로 소문난 사단 훈련소가 있고, 남쪽 사단일수록 좀 널널하다는 이야기도 있어. 흔히들 꿀이라고 말하는 사단으로 다들 가고 싶어했고, 그렇게 훈련소가 추첨이 된 후에는 같은 훈련소로 추첨된 사람들끼리 버스에 탑승하여 뿔뿔이 흩어져.

전날의 적응되지 않은 불침번으로 피곤했는지 버스 안에서 한 숨 잤다가 버스가 멈춤에 일어났더니 문이 열리면서 우렁찬 기합이 들렸어. 
'빨리빨리 안 뛰어 이 개새끼들아'
훈련소였어. 사자울음을 들은 토끼마냥 화들짝 놀란 우리들은 버스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렸고 갖은 쌍욕과 함께 사열되어 훈련소에 관한 몇 가지 안내사항을 들은 뒤 교관과 조교를 소개받고 훈련소 내무반으로 들어갔어. 내가 배정받은 내무반은 깨나 넓은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내무반에 같이 배정받은 사람이 90명이었거든. 일명 컨테이너 박스. 아니 사실 아무리 봐도 컨테이너 박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곳에서 우리는 4주일동안 살아야 했어. 난방은 커녕 제대로 된 방한도 안되는 그곳. 

2. 훈련소에서 자대로

90명은 1개 소대. 그 중 대충 4등분을 하여 4개 분대로 나누어 배정받은 우리는 그 곳에서 기본적인 군인 교육을 받았어. 총을 쏘는 법. 총기 제식. 방독면. 가스! 가스! 가스! 45km행군. 아침에는 녹고 저녁에는 얼어버리는 땅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뒹굴던 각개전투.
이상의 훈련들에 대해서 깊게 설명하지는 않으려고 해. 굳이 훈련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내 훈련소 생활만큼은 그냥저냥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 곳에는 나와 같은 날 입대한 동기들 뿐이었고, 교관들은 친절한 편이었으며, 조교들은 가끔 심술을 부리기는 했지만, 과도하게 문제를 일으키면 아직 상대적으로 사회인 취급이 되는 우리들보다 훨씬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심성이 완전히 꼬인 사람이 아닌 이상 크게 건드리지는 않았었거든. 나름대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매주 토요일 아침 저녁으로 성가대의 노래를 듣고 과자류를 얻어먹는 재미도 쏠쏠했고, 처음 해보는 훈련을 기다리며 그리 힘들지 않은 사전연습과정을 견디는 것도 훈련소 친구들이 있어서 나름 재미있게 했어.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결국 군생활을 가장 오래 하게 될, 배정된 자신의 부대, '자대'에서 발생하지.

훈련소 4주차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질 시간이 되었어. 나는 차출로 인원을 뽑아가는 한 부대에 배치되게 되었고, 자대가 같은 사람들끼리 각기 나누어져 자대에서 오는 픽업버스에 실려갈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울며 인사했지. 훈련소에 조교로 배치되어 남는 친구들, 먼 사단으로 가는 친구들, 근처 부대라고 버스도 없이 걸어서 출발하는 친구들. 

내가 가는 자대의 버스는 가장 늦게 도착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다 보내고 멍하니 있다가 출발하게 되었어. 군번의 순서가 어떻게 되니 하며 시시덕거리던 것이 기억나. 버스는 계속 달렸고, 사회에서 달릴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몇몇 형태의 검문을 지나치더니 영화로만 보던 바리케이트 쳐진 도로를 지나 부대로 도착했어. 그 곳이 내가 지낼 부대였고, 2년의 썩은 기억들로 지금도 나를 괴롭히게 될 곳이었지. 

버스에서 내려 대대장실로 불려갔어. 군대의 최상위에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있고, 그 아래로 군단(장)-사단(장)...... 으로 분류되는데, 흔히들 군에 들어가서 몸으로 체험하는 분류계통은 대개 대대- 중대- 소대- 분대 정도야. 특히나 다른 대대를 만날 일 없이 외진 곳에 떨어져있던 우리는 거진 위의 4개 분류 이상을 경험할 일이 없었어. 대대장이면 즉, 우리가 경험할만한 분류계통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그렇게 그 대대장과 인사하고, 차출되어 온 만큼 자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며 덕담을 들었어. 나는 그의 두 얼굴을 증오해. 

훈련소 내내 금연당했던 흡연자들은 또 열광했는데, 대대 행정병들이 그들에게 담배를 준 거야.. 한동안 초코파이류 단 음식만 간식으로 지급받다가 뜬금없는 과일이 나온 것에도 나와 내 동기들은 매우 행복해했어. 하지만 그게 끝이었지. 

우리는 각자의 중대로 배치받고, 각자의 소대로 다시 세부배치를 받았어. 그리고 분대까지 나눠져, 분대 선임들에게 소개되게 되었지. 나름대로 얼 빠져 보이면 좋지못한 첫인상을 줄 것이라는 생각 하에 나는 선임들에게 깍듯하게 대하였는데, 의외로 선임들 반응은 시큰둥했어. 너무 군기있어 보이려는 것에 어색함을 느낀 것이 아니었어. 내 딴에 최대한 깍듯이 대한 것이 그들에게는 코웃음 쳐질 만큼 빠져 보였던 거야. 그 이유를 나는 내 부대 특유의 신병교육을 경험하며 깨달았지.

신병교육. 거북이처럼 기어다닌다고 하여 일명 '터틀'이라고 불리우던 일주일간의 교육은 가히 내가 사회에서 들어오던 일반적 상식을 벗어나 있었어. 우리는 행정반-사회에서의 행정실과 같은 업무를 하는 곳-에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약 3일간 대기했었는데, 그렇게 대기한 우리는 그 해의 4기 신병교육생으로 터틀에 임하게 되었지. 일명 터틀 교관과 터틀 조교로 불리우는 간부와 운동에 능한 소대선임 2명이 우리를 가르쳤는데, 훈련의 강도는 물론이요, 이미 없어졌다고 들었던 각종 부조리들이 널려 있었어. 

4박 5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터틀. 훈련 내내 무조건 주먹을 쥐고 눈빛을 세우며 목소리를 있는 힘껏 지르는 것을 강요받은 우리는 첫날 아침부터 얼차려를 받았어. 그 얼차려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게 3시간정도 기어다니고 뛰어다녀서 기진맥진한 우리에게 교관(간부)이 없는 틈을 타 조교들이 더욱 더 혹독한 체벌을 가했지. 10초 내에 군장을 싸라, 관물대 정리법을 나눠줬으니 20초 내로 관물대를 정리법에 나온 그림과 똑같이 만들어라..

관물대는 사물함과 같은 말이야. 옷을 거는 큼직한 공간과 개인 물품을 넣는 서랍이나 여닫이문이 있는데 그 곳에는 무조건 정해진 물품을 정해진 순서와 모양대로 넣어야 했어. 다만 20초 내에 어질러진 물품들을 정리해서 정리법대로 배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군대에 구타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지. 

신병교육 내내 우리는 어떠한 의사소통도 금지당했고, 05시 50분에 어떠한 알람도 없이 일어나서 '기상'을 외쳐야 했어. 그런 적은 없지만 만일 알람이 울렸다면 우리는 그만큼 독한 체벌을 당했을 것야. 

관물대에 쳐박힌다는 말이 있어. 옷을 거는 큼직한 공간 앞에서 발길질을 당하면 몸이 뒤로 밀려 관물대에 박히는 형상이 되는 거야. 멱살을 잡힌 채 관물대로 던져지기도 했어. 실수로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가 단체기합을 얼마나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포복으로 연병장을 도는데, 팔꿈치가 다 까져서 피가 줄줄 나고 있었다는 것을 밤에 내복을 벗으면서 깨달았어. 빨래를 하고 샤워를 마치는데 5분을 주지만, 그 동안 깨끗한 빨래 혹은 샤워는 불가능에 가까워. 물론 따듯한 물은 나오지 않고. 

신병교육 수료식. 나를 포함해 같이 수료한 동기들의 목은 다 갈라졌고 팔꿈치와 무릎은 너덜너덜했으며, 과도한 얼차려로 경례할 때 손이 이마까지 올라가지 않는 동기도 있었어. 훈련이 끝나고 풀어진 조교가 말을 붙였어. 그나마 신병교육은 편한 것이다. 적어도 가시방석은 아니지 않았는가. 이제 각자의 분대로 돌아가면 이등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시절도 지나가니까 잘 버텨주길 바란다.

그날 밤 나는 분대에 배치되었어. 의식적으로 주먹은 꽉 쥐고 있었고 서 있는 자세는 군대의 차렷 자세 그것이었지. 눈은 위로 치켜뜨고 있었고 쉰 목소리지만 항시 온 힘을 다해 소리지르듯 대답했어. 분대원들은 그제사 신병다운 신병이 되었다고 재미있어했지. 좋아했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재미있어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아. 그리고, 오로지 '빡센 훈련' 만이 아닌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부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느꼈어. 

3. 분대원들.

분대는 군대에서의 분류체계 중 가장 세부적인 분류야. 소대장까지는 직업군인이 맡지만 분대는 오로지 병사들만의 세계지. 분대장 역시 병사, 즉 의무이행 중인 2년제 군인이야. 나는 내 분대원들을 다시 만났어. 

어디선가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병장이 분대에 많을수록 풀린 군번이라 했어. 아무래도 후임이 많아지면 몸이 편해지기 마련인데, 분대에 병장이 많으면 곧 전역할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고 전역자가 빨리 나갈수록 분대 인원수 보충을 위해서 후임들이 빠릿하게 들어오게 되는 식이지. 내 분대는 병장4명과 상병 3명, 일병들과 이등병 1명을 합쳐서 나를 제외하고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병장 4명 중 1명은 나로 대체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근 2개월 내에 3명의 후임을 받게 되는 거야. 상병 중 2명은 나와 정확히 1년 터울이었고, 남은 1명은 10개월 터울이었어. 

풀렸다면 풀린 군번이었어. 나는 이것만으로 만족했어. 물론 착각이었지. 

분대원을 만난 첫날 저녁. 분대원들은 날 위해서라며 야식을 준비했어. 흔히들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냉동 식품들이었는데, 특히하게도 군대에서는 이것을 따로 찌거나 굽는 조리 없이 오로지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만 덥혀 먹어. 그래도 이 때는 그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거하게 한 상 먹고 난 뒤 자기들 말로는 뒤끝이 없다고 하는 '진실 게임'을 하게 되는데 이게 진정 가관이야. 이를테면 분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이가 어느 정도로 보이는지 물어보던가 '이 중 여자친구 한 번 못 사귀어 보았을 것 같은 찌질이는 누구냐' 등의 질문을 해. 물론 이런 질문을 받으면 신병들은 으레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지만 당연히 그런 대답을 나올 것을 안 분대원들이 그 대답은 할 수 없도록 미리 막아버려. 고로 무조건 한 명을 선택하던가, 아니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서 만인의 눈총을 사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나는 '밖에 나가면 좆밥인데 군대라고 짬밥믿고 개기는 것 같은 새끼는 누구냐'는 질문에 A라는 선임을 지목했어. 이 선임은 상병이었고 나와 1년 터울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곧 나갈 선임을 지목했어야 했지. 빨리 안 볼 사람을 찍었어야 하는건데.

여튼, 의외의 환대로 긴장이 풀렸는지, 일주일간의 신병교육에 힘들었는지, 그 날 밤 나는 코를 골며 깊이 잠들었다고 해. 그리고 06시 정각에 일어났어. 내 분대의 생활관은 2층 침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층을 선임이 차지하고 2층에서 후임층이 생활했지. 기상 나팔과 동시에 일어나 조심히 내려와서 환복-취침시의 복장에서 군복으로 갈아입는 행위-을 하는 나를 어슴프레 일어난 선임들이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았어. 그리고 저녁에 내 위 상병층까지 전체집합이 있었지. 

첫째는 내가 밤에 코를 골았다는 것. 둘째는 내가 06시에 기상했다는 것. 두 가지 이유로 병장층에서 상병층을 갈궜고 상병들은 일병을 때렸으며 일병층은 나를 잡아먹을듯이 덤볐어. 그 때 처음 알았어. 나는 05시 30분 경 먼저 일어나서 환복을 마친 뒤 빨래를 돌리고 소대원들의 서열 등을 외우다가 06시 기상나팔이 울리면 정갈한 상태로 자신의 관등성명- 이병! ㅇ! ㅇ! ㅇ!- 을 대며 선임을 깨워야 한다는 거야. 

4. 첫 훈련. 

첫 훈련은 연병장에 물건들을 세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어. 3개의 커다란 문 모양의 장애물과 상황시 초소를 의미하는 책상. 실제 초소에도 책상이나 창틀같은 엄폐물을 사용하여 몸을 가린 뒤 사격하게 되는데 그와 비슷한 훈련 느낌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었어. 다만 훈련용 책상이 따로 없었기에, 각 분대의 막내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분대의 생활관에 있는 책상을 들고와야 했지. 나는 가위바위보에서 졌고, 우리 분대의 책상을 들고가는 과정에서 한 병장과 마주쳤어. 

난 그때까지 아직 순수해서, 혹여나 병장이 도와주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총과 군장- 군대에서 쓰는 백 팩- 을 메고 철제 책상을 끙끙거리며 옮기고 있었거든. 그리고 곧 나는 병장의 발길질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어. 병장은 차렷이라고 말했고 나는 차렷이라고 복명복창하며 자세를 취했어. 그리고 다시 맞고 쓰러졌지. 두 번째 쓰러질 때부터 병장은 나를 마구 밟았어. 

'이 새끼가 선임하고 닿았는데 관등성명 안 대?'
'죄송합니다! 이병! ㅇ!ㅇ!ㅇ!'
'쓰러졌으면 바로바로 차렷으로 안 돌아와?'
'아닙니다! 이병! ㅇ!ㅇ!ㅇ! 차렷!'

맞을 때마다 관등성명을 내지르며 차렷자세로 돌아오는 것이 내가 있었던 부대의 '맞는 방법'이었었던 거야. 그렇게 체감상 한참을 맞고 난 뒤 병장은 드디어 나를 그렇게 때린 이유를 알려주었어. 
'이등병은 걸어다니는 거 아니다.'

그렇게 잔뜩 맞고 책상을 들고 총과 군장은 맨 채로 걷는 듯 뒤는 듯 헐떡거리면서 돌아오니까 한 일병 선임이 나에게 아까 전에는 왜 맞고 있었냐고 물었어. 나는 그 이유를 거짓 없이 설명했고 일병 선임은 분대장 급 병장들에게 그것을 전파했지. 어떤 조치를 취해주려고 이런 걸 묻고 전파하나 했는데, 물론 그건 아니었어. 우리 부대에는 대체적으로 상병장 층에서 먼저 구타를 시작하고 그렇게 구타당한 신병은 이제 일병-상병 중 아랫 계층들도 건드릴 수 있게 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었던 거야. 따라서 나는 이제 구타제한이 풀린 신병이 되는 것이었고 지나가다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제 누구든지 나를 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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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재물에서 썼던 상황 이전을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한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죠. 사실 좋아했던 그 사람은 훗날 군생활에서도 등장(?)을 하기 때문에 서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예전 게시물에서 아쉬웠던 점이기도 합니다.

무덤덤한 진행을 포인트로 잡고 나름대로 플롯이 잘 짜여진 군생활을 겪었기에 군 생활 중 사건들에 중점을 두고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뜬금없이 너무 긴 글을 들고 온 것 같아 죄송하네요. 월요일이지만 다들 힘차에 멋진 한 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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