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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했던 그 양반 1
게시물ID : soda_66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42
조회수 : 1333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8/02/20 21:11:39
며칠 전 이상한 중년 남자가 우리 고시원에 입주했다. 주방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 곁에 와 그 찌개를 가리키고는

“야 이거 핫핫이야. 이거 매워 핫핫. 영어 몰라? 핫핫. 허 참. 이건 영어도 못하네.”라는 말을 과장된 손짓 함께 건넸던 사람이었다.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외국인은 아닌지라

“한국인인데요.”라고 말하자 그 양반은 “어휴. 키가 커서 외국인인 줄 알았어.”랬다.

지난 4년간 이 고시원에서 각종 전과자, 수배자들부터, 복도에서 과일을 찾는다며 칼을 들고 돌아다녔던 노인, 자신이 미군 중령이라고 주장했던 허언증 환자에 이르기까지 범상치 않은 여러 사람들을 봐왔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온 경험은 내게 ‘이 양반은 되도록 가까이해서는 안 될, 아주 비범한 양반’이라 조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그 양반은 자신이 고려대 평생교육원에 초빙된 미술 강사라며 “앞으로 만두나 담배 좀 있으면 나도 좀 주고 그래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비범한 면모를 과시했다.

이후로 그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볼 때마다 영어?로 말을 걸어댔다. 행여나 무슨 사건이라도 날까 하여 그 대화를 유심히 들어봤으나 도통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거는 말이라는 게, 복도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베트남 친구를 뜬금없이 불러 세워선

“야! 유! 가이드! 미! 룸!”이라고 외치고는 그 친구가 벙 찐 표정을 지으면 “너는 영어도 못하고 한국어도 못해서 여기서 어떻게 사냐?”며 고개를 내젓는 식이었다. 참고로 그 베트남 친구는 영어할 줄 안다. 한국어도 잘 한다.

고시원 터줏대감들은 첫날부터 모두들 그 양반의 비범함을 느끼고 그에게서 거리를 뒀다. 그때까진 그는 조금 독특하지만 몇 주 뒤면 자연스레 고시원의 일부가 될 그럴 사람이었다. 일요일 아침, 1호실 아저씨의 방문이 열리기 전까진 그랬다.

우리 고시원에는 날 포함해 6명의 장기 거주자들이 있다. 고시원 장기 거주자들은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가량 이 고시원에서 지낸 이들로서, 이들 사이에는 생활을 공유한 만큼의 세월 동안 쌓인 감정적 앙금과 사건들이 자연스레 끼어 있었다.

예컨대 1호실 아저씨는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끓이던 라면을 술김에 훔쳐 먹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2호실 아저씨는 3호실 아저씨의 슬리퍼를 계속 훔쳐 신다가 무좀을 옮긴 일이 있었다. 3호실 아저씨는 4호실 아저씨에게 화장실 문을 안 닫고 볼 일을 본다며 면박을 주다가 주먹에 얻어맞은 적이 있고, 4호실 아저씨는 술에 무척 취해서는 복도에 벌거벗고 잠들어서 민폐를 끼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나 역시 이 고시원의 정글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다소간 민폐를 끼친 적이 없지는 않은지라, 그들 중 몇몇과는 퍽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양반이 사흘간 남긴 전설적인 행보는 세월의 앙금을 깨부수고 우리 고시원 장기 거주자들을 한 데 묶는 위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전술한 바처럼 그 양반이 자신의 비범함을 발휘한 첫 번째 행보는 1호실 아저씨의 방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됐다. 1호실 아저씨는 따뜻한 전기장판 위 이불 속에 드러누워, 아침의 찬 공기와 일요일의 게으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1호실의 방문을 갑자기 열었다. 그 비범한 양반이었다.

그 양반은 “어이쿠 미안 여기 사람이 있었네? 쏘리. 쏘리!”라고 말하고선 1호 아저씨의 방을 쭉 훑어봤다. “당신 뭐야!”라는 1호실 아저씨의 외침에 그 양반은 “미안. 쏘리! 야! 쏘리! 응? 나중에 올게”하고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1호실 아저씨는 그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왜 남의 방을 함부로 열어보느냐며 욕지거리를 끊임없이 뱉어냈고 그 비범한 양반은 “이 무식한 놈아! 너 영어는 아냐? 쏘리! 그거도 모르냐!”며 응수했다.

재작년, 한밤중에 어떤 노인이 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1호 아저씨의 방에 난입했던 사건 이래로 1호실 아저씨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술에 취한 노인이 1호실 아저씨의 방의 용도를 화장실로 바꿔놓았던 그 사건만큼은 아니었지만, 퍽 재밌는 사건이기도 하고, 잘하면 1호실 아저씨와 비범한 양반의 주먹다짐을 구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척하면서 내 방문을 나섰다.

실수였다.

굳게 닫혀 있는 1호실의 문과,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는 그 비범한 양반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스스로를 그 양반이 서성거리고 있는 복도에 내던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 어두운 복도, 그 맞은편에서 그 양반이 쓰고 있는 보랏빛 선글라스 너머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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