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사사카와라는 인물을 먼저 살펴보자
사사카와 료이치 (1899-1995 )笹川良一 .
○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정치를 표방하되 권력을 등에 업고 사업을 크게 한 일본 국수주의 정치가이다
○ 1931년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의 총재가 되는데 이 단체는 일본 국수주의를 표방하며
무솔리니의 숭배자를 표방하며 당원들에게 흑색복을 착용시키는 등 한마디로 나치주의와 같은
골수 일본 극우정치 세력의 표본적인 인물이다.
○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국수 광산’, ‘일본 광업’ 등의 주식을 매점하여 엄청난 부를 모으고
‘국수의용항공대’를 창설하여 ‘1인 1기 1함 격멸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차후에
이 구호가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창설로 이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1945년 12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사사카와는
미 통합 참모본부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내린 전범 용의자 체포 명령 중에서
‘초국가주의적, 폭력적 결사 및 애국적 비밀 결사의 주요 인물’로 체포・투옥되었다.
즉 이 사람은 한마디로 일본국수주의를 위해서라면 폭력과 테러도 불사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 1948년 석방된 사사카와는 감옥에서 <라이프>를 보고 모터 보트 경주가 엄청난 돈이 될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약,무기 거래의 자금과 예전 국수대중당의 국수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1951년 ‘모터 보트 경주법’을 국회에 제출, 그에게 돈으로 매수된 자민당 의원들의 지지로 통과시킨 뒤
‘전국 모터 보트 경주회 연합회’(약칭 ‘전모련’)를 설립해서 회장에 취임한다.
전모련은 경정 사업의 엄청난 자금을 획득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사카와가 엄청난 부를 다시금
얻게 되는 기초이자 근간이 되었고 현재 일본 재단 회장인 아들또한 전모련의 족벌체재속에 있었다.
○ 막대한 돈을 가지고 ‘전일본 애국자 단체회의’(약칭 ‘전애회의’)의 고문에 취임한다. ‘전애회의’는
‘국체호지(國體護持)’와 ‘반공 협동 전선’을 2대 강령으로 일본의 재군비,천황제 옹호 주장에
일본 교원노조 탄압 미일반보 조약 강행 개정에 항의하는 학생과 일반시민 테러등의
정치깡패적인 면모와 폭력으로 모든것을 해결할려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 표면적으로 각종 단체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 ‘일본 선박 진흥회’를 중심으로 ‘B&G 재단’ 등 ‘사사카와 그룹’을 구축하여 도박 산업을 기반으로 조성한 방대한 자금에 의해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시켜 나갔는데 설립 당시 1억 3천만 엔이었던 ‘일본 선박 진흥회’의 자산액은 1980년이 되면 무려 1,244억 6천만 엔에 달했는데 한국돈으로 따지면 1조 6천억원이 넘는 자금이었다.
○위에서 보듯 그의 행적은 한마디로 일본 국수주의 사상을 깔고 여우같은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정치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부를 창출한 일본 극우중의 극우파인것이다.
그가 세운 일본 재단은 원래 일본선박진흥회에서 비롯되어서 명칭을 바꾸었는데 사사카와는 이 재단을 비롯한 각종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재단의 임원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중에는
'새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일본 교과서 왜곡의 주범 그룹들이 대거 자리를 맡고 있다.
특히 이 재단들은 하버드나 예일등 유명 대학에 연구 기금을 제공하고 일본의 위상을 높이거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서 친일적인 인사로 만들거나 일본의 역사를 왜곡시키거나 국제사회에서 일본을지지하는 세력으로 삼을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하버드나 예일은 이 재단 자금 거부)
■ 연세대 '아시아 연구기금'
1995년 연세대는 '한일협력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재단으로 자금을 받을려고 하는데 이 자금이
사사카와의 자금이라는 것을 알고 박영재 역사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엄청난 반대를 했다.그런데 이 반대는 그 당시 송자 총장등의 친일 세력등의 말도 안되는 논리에 묻혀서 결국 연세대는 '아시아연구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이 자금을 각종 연구 기금으로 학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연구 및 학술행사를 펼쳤다.
2005년 MBC PD수첩이 아시아 연구 기금의 불순한 의도를 보도했고 1995년에 이어서 2005년에도
연세대 교수협의회에서 반대를 했지만 그 후에도 이 기금은 장소를 바꾸어 운영되었다.
(2008년까지 기금사업운영/홈페이지참조)
연세대 내 아시아연구기금사무실 | 자료출처:오마이뉴스 |
아시아연구기금임원명단(확대하여 보고자 하시는 분들은 링크된 원본글을 확인하여주세요.)
뉴라이트 안병직서울대교수
일제 시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는 친일적인 사고 방식인것이다.
날짜 1907년 05월 15일
제목 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
내용
일제육군, 친일단체 일진회에 10만원의 정치 자금을 줌.
독립신보 1948년 08월 26일
일제의 앞잡이로 조선민족을 못살게 굴던 친일파들이 해방후 미군정에 잠입하여 갖은 못된 짓을 하여 인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하고 통일자주독립을 방해하여 3년이란 세월을 혼란으로 보냈는 바, 또 다시 대한민국정부의 고관에 취임함을 보고 인민의 원성은 고조에 달하자 국회에서 친일파 급 민족반역자처단법령을 토의중임을 안 친일파들은 갖은 수단으로 방해공작을 하고 있다는데, 친일파집단이라고 세간에서 말하는 모 당에 매월 20만 원 정도를 제공하던 친일재벌 金모씨는 요즈음 친일파·민족반역자숙청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됨을 보고, 돌연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모 당에 제공하여 동 법안을 완화 또는 무능화하도록 공작하는 자금으로 제공하였다고 하여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국회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모모 의원들을 전기 모 당의 당수가 회견을 23일에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다.
권력과 부를 위해서는 친일파나 검은 범죄의 돈이나 상관치 않는 당신을
우리 시대의 지식인라 불리우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 자료 참고 및 인용
일본 극우세력과 연합한 연세
전후 일본의 일제 잔재의 문제 박영재 교수
한겨례신문/오마이뉴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가학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