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실록기록입니다.
굵은 글씨만 읽으셔도 됩니다.
왕세손이 수은묘(垂恩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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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조선 후기 최대 이슈 중 하나는 사도세자의 죽음일 것입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에 관한 떡밥은 그렇다쳐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왜 죽였는가에 대해선 추측에 의한 해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아무리 정확한 기록이 있다해도 영조의 마음을 후대의 우리가 완전히 알 순 없겠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그것도 왕이 왕세자를 대놓고 죽인 조선사 전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사건임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은 뭔가 너무 아쉬울 정도로 적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왕세손 시절,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를 하고 제실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울면서 애원하는데...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은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을만한 기록이 많이 실려있고,
이걸 그대로 둔다면 그게 어떻게 아들된 도리겠느냐는...
실록의 사초야 감히 건들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기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니 제발 지워달라고 울며 부탁합니다.
이런 세손의 뜻을 신하들은 영조에게 절절히 애원하며 고하고요.
영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듯...하였으나.
두 번째 기사에서 볼 수 있듯 결국 관련된 일기를 세초(물에 씻어 없애버림)해버립니다.
일기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럼 사도세자가 저승에서 슬퍼할 테니,
비록 옳지 않은 일이지만 비사(秘史)가 남이있으니 관련 기록을 다 지워버리는 걸 허락하지요.
여기서 포인트는 비사.. 즉 사관의 사초를 말하는 거 같은데,
사초에 기록되었다면 이정도로 중대한 기록은 조선실록에 반드시 실려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록엔 이에 의심되는 '사도세자에 관련된 자식으로서 차마 지우고 싶은 기록...'
이란 게 무엇인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영조 36년부터 사도세자가 죽은 영조 38년 사이의 실록 내용을 보면
세자에 관련된 8~90%의 기록이 '약방에서 왕세자를 진찰하다.'라는 한줄 뿐 입니다.
정조가 지우고 싶어했던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그 내용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기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대가 다르기에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허무할만큼 별 거 아닌 기록이라 눈치를 못 채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조가 세손시절 지우고자 했던 아버지에 관한 기록.
그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