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 29조 제 2항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 훈련 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법 제 2조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관장한다고 명문 규정되어있습니다. 1.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 여부 심판 2.탄핵심판 3.정당의 해산심판 4.권한쟁의심판 5.헌법소원에 관한 심판
보시다시피 법률의 위헌 여부에 관한 심판은 존재하지만 헌법의 위헌 여부는 결정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역사와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매우 길어질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의 거센 도전을 따돌리고 어렵게 3선에 성공했습니다. 박정희의 3번째 임기 첫해는 1년 내내 빈민, 노동자 ,대학생은 물론이고 의사 판사 교수 기자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1971년 7월 1일, 박정희는 제 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 데모로, 6월 16일에는 수련의들이 파업했고, 사법부애서는 연달아 획기적인 판결을 내놓아 박정희의 속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6월 22일 대법원 전원 합의체(대법관 회의)는 "군인이 전투훈련 및 직무 수행중 전사, 순직, 공상으로 유족 연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 라는 국가배상법 제 2조의 단서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모든 국민은 법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의 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으로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손실을 막아야 한다 는 논리를 배척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위헌법률심판권이 헌재가 아닌 대법원에 있었는데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적극 행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 마지막 이었습니다.
정부여당은 1967년 3월 3일 국가배상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나치시대의 낡은 법이론인 특별권력관계를 원용하여 군인등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였습니다.
사법사를 다룬 대다수 연구에서는 이를 월남전 파병 이후 발생한 사상자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이 잘못된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에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희생된 경우를 논외로 하더라도 매년 평균 14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부여당은 이런 인명손실을 줄일 적극적조치를 취하는 대신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할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약 개정된 국가배상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면 국고손실이 엄청나니 반드시 합헌 판결이 나도록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대법원 판사에게 압력을 행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배영호 법무부 장관은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그런일은 할수 없다고 답해 박정희의 노여움을 샀고 사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막기 위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편법을 동원했습니다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은 대법원 판사 16명 전원합의체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부여당이 위헌결정 정족수를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과반수 찬성' 에서 '3분의2 이상의 출석과 출석 3분의 2 이상의 찬성' 으로 변경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법관회의에서 국가배상법 제2조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법원조직법 개정안 역시 위헌으로 판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위헌판결의 대가는 매우 컸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또다시 탱크를 앞세워 헌정질서를 짓밟은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대법원에게서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로 넘겼고,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 9명 모두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시켰습니다.
또,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군인 군속 경찰공무원 등은 국가에 대한 뱌상을 청구할수 없다고 못박아버렸습니다.
이 조항은 1987년 9차 개헌 때도 살아남아 현행헌법 가운데 유일한 유신의 잔재이자, 가장 부끄러운 조항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