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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의 탄생 (2) : 군선제조와 거함주의 소함주의간 논쟁
게시물ID : history_65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14
조회수 : 139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2/02 19:08:18


1부 :  http://todayhumor.com/?history_6590




3. 군선 제조와 거함주의 소함주의간 논쟁


(1) 시대적 배경


1510(중종 5)년, 부산포·내이포·염포에서 일어난 왜란(흔히 말하는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에는 다시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다. 이때 중종은 삼포왜란을 진압한 뒤 왜구들의 노략질을 예방하고자 대마도주와 세견선(歲遣船) 및 세견미수(歲遣米數)를 반감하는 임신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조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임신조약 이후에도 왜구는 끊임없이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을 노략질하며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후 왜구가 활동하던 경로를 나타낸 지도.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도

왜구의 약탈대상이었다. 사진출처 : http://goliath_777.blog.me/110025921557 )

 

 

1522(중종 17)년 4월과 9월에는 각각 추자도와 동래에서 왜변이 일어났고, 1523(중종 18)년 4월에는 안면도와 풍천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1525(중종 20)년에는 전라도에, 1544(중종 39)년에는 고성에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조선 조정은 마침내 대마도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왜인들의 조선 입국을 일체 불허하게 된다.

 

중종의 뒤를 이은 명종의 치세에도 상황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특히 1555(명종 10)년에는 을묘왜변이 발발하여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70여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전라도 해안을 습격했는데 먼저 영암의 달량성·어란포, 진도의 금갑·남도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어 장흥과 강진에도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이를 막던 조선군은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사로잡히는 치욕을 겪게 된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해지자 조선 조정은 왜구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책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논의를 거듭했고 결국 해답은 그동안 정체에 빠졌던 해군력을 다시금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해군력 강화의 바탕이 되는 군선의 제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관련하여 중종과 명종 연간에 걸쳐 일대 논쟁이 발발하게 된다.

 

 

(2) 군선의 소형화 논쟁


1510년 안골포에 나타난 왜구의 약탈선은 선체가 높고 속도가 빨랐으며 200명을 태울 수 있을 만큼 선박의 크기가 커진 상태였다. 이런 왜선을 방어하기 위해 경상우도의 맹선들도 기존의 약점들을 보완하여 재차 정비했으나 선박 자체가 크고 둔하다보니 전투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새로운 군선을 건조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발의되었고 마침내 1523(중종 18)년, 중종은 의정부와 병조 및 비변사의 여러 관료들을 모아놓고 군선제도에 관한 여러 의견을 나누게 된다. 중종실록 18년 6월 26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1

 

먼저 영의정 남곤이 새로운 군선을 제작할 당위성에 대해 설명한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수시로 왜적의 침입을 받고 있으니 하루빨리 병선을 개조해야 합니다. 특히 충정도와 경기도, 황해도의 경우 병선들의 대다수가 부실하여 새롭게 건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황해도 장산곶과 전라도 변산 등지에는 배를 만들 수 있는 재목이 많으니 관리들을 파견하여 군선 제작을 시작하되, 맹선은 만들지 말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하여 쓸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곤의 말은 타당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의 해군력은 오랜 기간 정체기를 겪으면서 상당수의 배들이 썩거나 해체된 상황이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맹선들은 조운용으로 활용되는 실정이었다. 또한 맹선 자체가 이미 왜구를 상대하는 데 있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남곤은 새롭게 건조하는 군선은 맹선이 아닌 다른 종류의 배를 만들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형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선은 경쾌하지 못하여 쓸 수가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맹선이 있으나 모두 방치하고 사용하지 않아 육지에 매여진 채 썩고 있습니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것은 비거도선입니다. 지난번 왜적이 침입했을 때 만일 경쾌한 배가 있었다면 그들을 포획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따라서 맹선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맹선이 4척이라면 그 가운데 2척은 경쾌한 병선으로 개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사스페셜에 나온 비거도선에 관한 자료,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neall/70103139275 )

 

 

고형산이 주장한 것은 군선을 소형화하자는 것이었다. 기존 조선 해군의 주력함이었던 맹선은 기동력이 낮았기 때문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해도 이미 왜구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형산은 기동력이 좋은 비거도선을 활용하여 왜구가 도망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의견에 홍숙 등이 찬동한다.

 

반면에 안윤덕은 군선의 소형화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친다.

 

“제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비변사에서 맹선의 혁폐(革廢)에 대한 편부를 묻기에, 비거도선이 비록 매우 빠르고 경쾌하긴 하지만 적병이 바다를 뒤덮어 침구하여 올 때는 마땅히 맹선이라야 군인을 많이 인솔할 수 있으므로 일체 혁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더니, 비변사에서 옳다고 여겨서 입계(入啓)하였었습니다.”


안윤덕은 문제의 핵심을 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짚고 있었다. 만일 왜구가 소규모 수십 명 단위로 노략질을 할 때는 기동성이 좋은 비거도선이 효율적이나, 이전에 있었던 삼포왜란이나 장래에 있을 을묘왜변처럼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쳐들어올 때는 많은 병사를 투입할 수 있는 대선(大船)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에 윤손이 다시 반론을 가한다.

 

“신이 경상좌우도병수사(慶尙左右道兵水使)를 연임할 적에 제포의 대맹선·소맹선을 보니 과연 군인을 많이 실을 수 있었으나 그 선체가 경쾌하지 못하여 바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대로 운용할 수가 없어 패몰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거도선은 경쾌하여 비록 사나운 바람을 만나도 쉽게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논쟁이 격화되자 남곤은 다음과 같은 절충안을 제기한다.

 

“맹선을 뜯어버릴 것이 아니라 특별히 비거도선을 제조하여 맹선의 군인을 나누어 태워서 상황에 따라 돌려가면서 사용하게 하는 방안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제(船制)의 모양이 두 가지가 되면 그것을 관리하기가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균 역시 남곤의 의견에 찬동하여 자신의 의견을 아래와 같이 피력한다.

 

“왜변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로 3등급의 맹선을 설치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적의 배는 작고 우리 배가 클 경우 왜적들은 감히 배 위로 뛰어오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일체 왜적을 추포(追捕)하는 일을 위주로 한다면 마땅히 작은 배를 써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맹선을 일체 폐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대대적으로 군사를 움직일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맹선이 아니고서는 많은 군인을 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중종은 이 논쟁에서 남곤과 이사균의 절충안을 받아들이되 기존의 주력함이었던 맹선보다는 비거도선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방안으로 의견을 결정하게 된다. 그 결과 맹선은 그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대신 왜선을 추격, 나포하는 것에 중점을 둔 비거도선을 많이 확보하도록 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곧 조선의 군선이 소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거함주의의 반격


비거도선 중심의 소선체계로 흘러가던 군선건조계획에 제동을 건 인물은 바로 참찬관 서후였다. 서후는 오전 경연자리에서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2

 

“남방의 전함(戰艦)은 옛날부터 두어 오는 것인데 지금은 대맹선(大猛船)을 쓸데없다 하여 모두 버리고 소선(小船)만 쓰고 있습니다. 소선은 다른 배를 쫓기에는 빠르지만 육박하여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군사를 많이 태우지 못할 뿐더러 적군이 기어오르기에도 쉽습니다. 만일 한 명의 왜적이 칼을 빼어들고 우리 배 안으로 돌입하면 군사가 많더라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함(大艦)은 높고 가팔라서 기어오르기는 어렵게 되어있고 적을 내려다보며 상대하기에는 편리합니다. 이것이 모두 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서후의 진언에는 많은 핵심적인 사안들이 담겨있었다. 전통적으로 왜구는 검술에 능해서 육탄전에 강했기 때문에 소선을 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반면에 조선은 활과 화포를 활용한 장거리 공격에 능했기 때문에 크기와 높이에서 앞선 화포전술로 적을 내려다보며 제압하자는 것이었다. 서후가 제시한 방책은 그 후 판중추부사 송흠에 의해 구체화된다. 당시 송흠이 중종에게 올렸던 상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3

 

“중국의 배는 다른 배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중국의 배는 사면에 다 널빤지로 집을 만들고 또 가운데가 넓어서 100명 이상을 수용할 만하며 화포를 많이 갖추었기 때문에 가는 길마다 대적할 자가 없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와 달라서 연안 요해지(要害地)에 전함(戰艦)을 갖춘 곳이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배들도 모두가 작고 허술하여 적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화포는 허술하고 화약의 힘이 약하여 중국배들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 수준에 불과합니다. 해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함인데 탈만한 전함이 없다면 병사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무슨 수로 적을 막아내겠습니까? 하루빨리 바닷가 여러 고을에 전함의 수를 나누어 정하여 만들게 하되, 반드시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중국배와 같이 해야 합니다.”



(4) 소결


서후와 송흠의 진언을 계기로 조선의 군선건조는 다시금 방향을 틀어 소형군선에서 대형군선의 건조로 바뀌게 된다. 중종 사후 을묘왜변과 같이 왜구의 침략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사실 역시 거함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조정은 새로운 군선을 제작함에 있어 대선을 기본으로 하되, 그 단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목표를 최종결정한 뒤 군선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적인 1555(명종 10)년 9월 16일, 명종은 몸소 서강 망원정으로 나가 새롭게 만들어진 군선의 진수식을 행하게 된다. 그 군선이 바로 훗날의 판옥선이었다.

 


  1. 이하 내용들은 필자가 실록의 내용 중 중요부분을 간추려 서술했다는 점과 읽기 쉽게 현대적인 문장으로 바꿨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2. 중종실록 16년, 5월 7일.
  3. 중종실록 39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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