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때 환경부장관 맡으셨던 이치범님의 블로그에서 퍼온글입니다.
팩트로 요약이 잘되어있어서 퍼왔음
이거 보고 다시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출처주소는 밑에 써놓겠음.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등장할 당시만 해도 남북관계 전반은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아니 새로운 발전을 위해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시기였다. 2007년 대통령선거 직전인 10월에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선언’은 화해·협력단계에서 조금씩 발전하던 남북관계를 남북 공동체에 가까운 수준으로 발전시킬 중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먼저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해주공단,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성〜신의주 철도 연결 등 SOC 건설 투자, 백두산 관광, 광범위한 농업개발 협력 등 남북경협을 사실상 의 경제공동체 단계로 도약시킬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핵문제와 한반도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정상회담 합의 전날인 10월 3일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 핵시설의 완전 불능화와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 동북아 평화를 위한 6개국 외교장관회담 등을 합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진 정상회담에서는 서해상의 군사 분쟁을 끝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와 ‘한반도 종전선언’ 등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중대한 합의들을 담았다. ‘10·4선언’의 합의에 따라 그 이행을 위한 남북 총리회담이 2007년에 개최되었으며 2008년 상반기에는 2차 남북 총리급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앞서 임기 동안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미국 부시 대통령도 북미 관계정상화와 한반도 종전선언을 통해 외교적 성과를 내려는 긍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 봐도 흔치않은 우호적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정말 세상일은 알 수 없다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는 상당히 보수적인 대북정책을 취할 것이지만 이명박 후보는 이념적인 편향은 어찌되었든 북한과 경제적 관계를 강화해서 남북이 상호 윈-윈 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명박 대선후보의 선거 캠프에는 뒤에 통일부장관이 되었던 현인택 고려대 교수와 아직도 청와대에서 대북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등 남북관계 발전에 비판적인 교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개방·3000구상’처럼 상당히 천박한 표현이지만 참여정부 보다 더 쉽게 북한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관심을 끌었다. 사실 ‘비핵·개방·3000구상’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내에 국민소득 3,000달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으로 선거 때 슬로건으로나 쓸 수 있는 이야기지 제 정신이면 정부의 공식정책으로 내놓을 수준도 아니었다.
그런데 2008년 1월 16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통일부를 폐지하는 조직 개편안을 발표하여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통일부의 정보분석업무는 국정원으로 넘기고, 기타업무는 외교통상부로 통상적인 대북 협력 업무는 각 부처에서 알아서 관리하겠다는 주장으로 사회 각계의 반발과 국민들의 비난에 파묻혀 해프닝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때부터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혹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2월 1일 이명박 당시 당선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남북경협과 기존 남북간 합의는 ‘북핵 문제의 진전, 경제성, 재정부담 능력과 가치, 국민 합의’의 4가지 원칙을 기준으로 재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인수위원회 백서에서 발표한 외교통일 안보분야의 과제에서 6·15, 10·4선언의 이행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더니 정부 집권 한 달여가 지난 3월 11일 외교통상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핵 폐기 진전 시 비핵·개방·3000 구상의 이행준비에 착수 하겠다’고 밝히고 며칠 뒤 통일부는 10·4선언의 이행문제를 업무보고에서 삭제하고 대신 ‘비핵·개방·3000’과 나들섬 구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남북 정상이 국제적 관심 속에 서면으로 합의한 약속이 아예 다음 정부의 업무계획에서 삭제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 술 더 떠서 “가장 중요한 남북합의 정신은 1991년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민주정부 10년 동안 쌓아올린 남북 합의와 협력사항들을 무시하기 시작한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7일 미국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위한 세부방안을 준비하겠다는 갑작스러운 제안을 던졌다. 문제는 남북 연락사무소 문제가 논의되려면 먼저 기존 남북대화를 통해 합의된 사항들을 다루어야 하는데 당시 언론보도 등을 보면 통일부는 이러한 제안이 발표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그 주변 참모들의 즉흥적인 판단이 대북정책을 완전히 좌지우지하는 상태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이 북측의 즉각적인 거부로 유야무야된 이후 2차 남북총리급 회담이 무산되었으며 남북 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남북 간 사고와 북측의 무력도발행위가 기름을 끼얹었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출입금지구역에서 북측 초병의 총격에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사전에 준비된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한 대화 재개’를 포함한 대북 제안을 예정대로 발표했다.
정치는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 이 정부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는 정부였다. 2008년 7월 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논란으로 일어난 촛불집회가 3개월 여 동안 진행된 직후의 소강상태로 정국이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우리 국민이 북측 총탄에 희생된 날, 대통령이 그동안 이행을 회피했던 6·15선언과 10·4합의를 논의하겠다는 대북제안을 하는 모습은 북한의 군사위협에 우리가 마치 굴복한 것처럼 비춰졌고 수구·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 관광 중단을 선언하고 다시 북측의 반발이 이어지다가 결국, 11월 24일 북측은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경협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를 눈앞에 두었던 2008년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최소한의 위기관리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남북관계는 냉전기를 넘어서는 갈등과 대립, 직접적 군사적 충돌이 계속 발생했고 한반도는 동북아 긴장의 진원지로 돌아갔다.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은 동북아의 유일한 다자안보협의체인 6자회담 무용론을 불러 일으켰고 2010년의 천안함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남북 간 충돌을 넘어 미·중간 군사적 긴장상태까지 조성하는 등 한반도의 신냉전시대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이전 상태로 퇴보했다.
2011년 12월 현재 남북 간에는 상호 불신과 비방, 군사적 위협이 일상화되었다. 국내 보수단체와 정치인들은 북한 접경지역에서 북한을 비방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이에 대해 북측은 조준사격을 가하겠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생존권이 위협받는 접경지역 주민들의 불안이 겹쳐 지역주민과 보수단체 간 갈등까지 발생하고 있다. 대통령 한명을 잘 못 뽑은 대가치고는 우리 민족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다.
출처 : http://blog.naver.com/eco_agora?Redirect=Log&logNo=90137931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