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대처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첨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국에서는 '마녀가 죽었다'라고 축배를 들기도 하고, '장례식도 민영화로 하자'라는 등 대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대처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좀 의아스럽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예의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런 논리는 틀렸다. 진정으로 대처를 존경하고 대처를 따른다면 그녀가 말했듯, "사회란 없다. 오로지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제를 꼿꼿히 지켜야 옳다. 도덕이란 것은 엄연히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반 쯤 조크고...ㅋ
엄밀히 말해 대처가 했던 소위 "대처리즘"이라 불리우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강행은, 당시 영국 보수주의의 주류를 이루던 공화주의적 패러다임 - 다시 말하면 사회의 유지와 존속에 관심을 기울이던 당시 보수적 원로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혁이었다. - 쉽게 말해 대처리즘으로 표상되는 개혁의 대부분이 사실상 사회의 유지보다는 사회의 파괴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대처 스스로가 말했듯 "오로지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인"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대처의 정책들은 많은 부분 사회를 파괴하고 원자화시켰으며, 이것은 영국 보수당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내가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에 있어서 내가 좌파라는 이념적 요인도 한 가지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엄밀히 말하면 '대처리즘'이 지향하는 그 위험한 파괴적 발상들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와 공동체의 붕괴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의 실천적 지침에 의하면 -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로 치르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주장에 더욱 합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리 대처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가 행했던 대처리즘이 유효한 평가를 받는 측면에는 - 우파들의 온갖 포장과 미사여구는 무시하고 - 당대 영국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극복해냈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말하면 당시 영국이 부딪힌 자본주의적 한계 - 타협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국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생존을 도모했던 대처리즘은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대처리즘이 적용되는 배경에는 그만한 사회경제적 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우파들이 보이는 대처 숭상 - 심지어 박근혜에게 '대처'가 되라는 주문들은 정말이지 '위험한' 발상이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이미 10여년, 아니 15년여간 급속도로 진행된 신자유주의화와 더불어 유교적 공화주의의 붕괴가 가속화되는 시기에, 대처를 '대안'으로 여기는 우파들의 뇌 속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대처리즘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표상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적 토대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지향했던 공화주의의 붕괴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의 우파들이 읽어야 할 것은 대처와 같이 '끔찍한' 대수술이 아니라, 마이클 샌델처럼 온건한 약물주사를 더욱 선호해야 옳다.
한국의 우파들은 지금 한국의 상황에 대한 대처리즘적 해법을 통해 모종의 낭만적 대개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그러한 대개혁은 오히려 사회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고, 그들의 멍청한 낭만적 환상은 파시즘을 잉태하기에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사회에 맞은 올바른 대처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파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다.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두말하면 입아프고...ㅋ 망각하기 쉬운 사실, 대처는 영국에서 '가장 극우적인' 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