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학생 글 >
(1) 엄마,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계엄군들이 공격을 해오면 저항하다가 죽게 되겠지 죽더라도… 이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을 폭도라고 진실을 왜곡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깨달아 알거에요 정말…
진정한 폭도가 누구였던지, 우리들의 죽음을 통해 이 땅,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으면… 정말 더 바랄게 없겠어요…
낳으시고, 이제껏 사랑으로 길러주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이렇게 …
엄마, 꼭 건강히 지내세요… 그리고 저를 대신하여 이땅에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폭군이 물러나는 세상을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그 때 꼭 “내 땅 장하다”라고 저를 기억해 주세요
이제껏… 부모님께 불효하여 살았던 거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고통과 불행이 없는 천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는 슬픔도 고통도 없으니 혹여 끔찍하게 죽은 제 시신을 보셔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겁니다 엄마도 조금만 슬퍼하시고, 힘차게 지내시다 천국에 오셨을 때 만나요…
항상 엄마, 아빠, 동생을 위해 …기도할께요 건강하세요
(2) 하느님, 저는 몇 시간 뒤면 당신을 보게 되거나 저 무서운 고통의 고문장으로 끌려 갈 지도 모릅니다.
제게 부디 그 고통을 잊게 해 줄 힘을 주소서.
또한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인사도 하지 못한게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나 없이도 남은 가족이 행복하게 살 길 바랍니다.
아… 하느님, 저는 지금 앞으로 다가올 공포가 매우 두렵습니다.
그 공포를 견딜 힘을 주소서…
(3) 어머니, 이제 집에 갈려면 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공수부대가 빼라고 하는데도 안빼, 나도 남을려고. 그래도 죽기야 하겠어
. 너무 걱정말고. 조금 떨어져 있다고만 생각하셔. 밥도 잘 챙겨 드시고.
분위기가 참 어수선해. 우리가 대치해야 하는게 정예 공수부대, 탱크고 하니깐 말이야.
그래도 괜찮을 거야. 사람들이 똘똘 뭉쳐 있으니까. 민주주의가 이 땅에 바로 잡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혹시나 혹시나 나를 다시 못 보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마.
다 잘될꺼야, 걱정마!
<여고생의 일기>
1980년 5월 22일 목요일, 우리는 민주화를 하자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민주인사들을 구속시키다니 이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소위 민주주의란 나라가 민주인사를 죽이다니, 이 같은 일이 세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갖은 만행을 벌여 사망자는 밝혀진 사람만 해도 200명을 능가하고 실종자는 거의 한 동에 몇 사람 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매스컴은 일절 이러한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정부 편에 서서 우리 민주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있었다.
1980년 5월 23일, 공수부대에서는 처음에는 몽둥이로, 다음은 대검으로, 다음에는 총으로 우리 시민을 무차별 살해했으며, 또한 도망간 사람까지 모두 잡아 그 즉시 살해했고 구경만 하던 어린이, 할머니까지 무차별 살해해서 우리 시민들은 좋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공수부대에 맞서기 위해 무기고를 털어 총으로 대전해 물리쳤다.
1980년 5월 24일, 우리 광주에서 계속 민주시위를 하는 동안 우리나라 매스컴에서는 한 번도 진실 보도를 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25일, 공수부대가 투입되지 않았으면 우리 광주사태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평화적인 군중시위, 즉 민주화 운동으로 끝났을 것이다.
1980년 5월 28일, 27일 상황실에서는 총기를 회수하고 이것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우리는 부지사실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오빠들이 와서 깨웠다. 지금 계엄군이 공단 입구에 오고 있으니 사태를 알아서 깨어있으라는 것이었다"면서 "그 때가 2시쯤 이었을까? 약 30분 후에 계엄군이 광고 앞, 돌고개를 넘어섰고 지원동 쪽에서도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살고 싶은 사람은 피하라 하여 우리는 도청 밖으로 나와 피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