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워프의 불안정한 에너지로부터, 불현듯 기분 나쁜 직감이 근방의 대지를 철저히 뒤덮었다. 찰나의 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겸언쩍은 듯 고요했던 대지가 벌써 거대하고도 이질적인 굉음을 울리며 온 갈래로 요동치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곧, 사악한 에너지가 하늘을 가득 배회하며, 이 세계를 완벽히 압도하고도 충분할 만큼 어떤 거대한 실체의 일부가 비로소 이 세계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과연,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이 세계의 타락을 더 이상 불허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정화를 결심하려는 창조주(The God)의 필연적 심판이 도래하게 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단지 불순한 교리에 심취하여 인류를 배척하고 멸시하는 사악한 마법사들의 소행인가? 명백히 단언하건대, 이 불안정하고 소름끼치는 대지의 뒤틀림과, 그 실체조차 불명확한 이계로부터 방출되는 이 이질적인 에너지는, 여지껏 인류가 경험했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가히 공포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눈 앞에 펼쳐진 이 지옥과 같은 참상은, 그저 일부 사악한 마법사들이 벌이곤 하는 고리타분한 의식 따위와 비견하였을 때, 아무래도 그 규모와 성질을 달리하는 마법 이상의 광대한 것이란 사실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곧, 이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악한 워프 에너지가 불안정한 대류의 흐름을 조정했고, 뒤이어 몇 번의 거대한 화염 폭풍이 혹독하게 내리쳤다. 무질서하게 대지를 유랑하는 이 불순한 에너지는, 인류가 현세까지 발견해낸 그 어떠한 원소들보다 강력하고 위압적인 활동성을 발산해냈다. 또한, 이계로부터 흘러나온 불안정한 에너지의 흐름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대지의 근방을, 한 줌의 잿더미 조차 남지 않도록, 자비심 없이 불태워버렸다. 화염 폭풍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좀처럼 누그러질 줄 모르고, 오히려 더욱 더 그 기세가 폭발적으로 변모하였으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번에는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무리가, 거센 폭풍의 심연 속에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었다.
이계로부터 온 존재들, 처음에 그들이 심연속에서 드러냈던 자태는 단지, 그 실체를 눈으로 아주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한 윤곽이 전부였다. 오직, 그 뿐이었다. 어쩌면 그 것이, 그들의 본래 모습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지만, 어찌됐든 그들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 저주로 가득 찬 세계에 불러냈던 것인가? 고통과 좌절의 번복속에서, 모든 명예와 권위를 상실한 불운의 인류들에게, 이 공포스러운 존재들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심오하고도 원초적인 물음이 필멸자들의 뇌리 속에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그들의 위압적인 자태가 무질서한 혼돈의 심연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뜻 살펴보기에도, 이들은 인류와는 무언가 다른 부류의 존재들임을 단번에 추론해 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필멸자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영혼을 파먹히고 종래는 미쳐버리기까지 하였으니까 말이다. 금방이라도 천계를 향하여 승천할 것만 같은 거대한 검붉은 날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악한 사념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흉악스러운 자태며, 영혼을 세뇌시키고 마침내는, 자아의 전부를 그들의 휘하에 귀속시키는 파멸의 전율까지.. 이 꺼림칙하고도 저주스런 위압감들은, 본능적으로 필멸자들을 단 하나의 생각만이 뇌리에 박히게끔 하도록 이끌어내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고통 속에 격렬히 몸부림치며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현 세기의 인류가.. 이 저주받은 피조물들과 대항하기엔, 결국 모든 면에서 압도당할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광경을 지켜본 필멸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종국에, 부패한 성직자들이 창조주(The God)의 구원이며 심판이며 떠들어댔던 헛된 믿음들과, 그들이 진정으로 갈망했던 창조주의 숭고한 부름 따윈,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창조주가 보낸 대리인도, 인류의 세계를 환멸하는 마법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옥의 거대한 심연으로부터 강림한 악마들이었다..!
거대한 무리의 악마 군단들은, 곧 구심점을 잃고 특정한 규칙성 없이 사뭇 뒤얽혀, 그 모양새가 복잡한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이나 무질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어쩐지 유난히 고상해보이는 듯 한 악마가, 다소 경직된 섬뜩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입을 열자,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놀랍도록 숙연해졌다.
“정말.. 오래간만의 바깥 세상이군. 이 곳은 언제 들려도 매 번 새롭게 느껴지는데 말야. 다들.. 그렇지 않나?”
그 악마는, 어떠한 반론의 틈도 주지 않은 채 재차 이야기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어쩌면 악마들을 통치하는 악마 군단의 수장이라도 되는 듯 한 모양이었다.
“류자크.”
그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면서도 선명한 목소리로 가르켰다.
“보고합니다. 에이든 집정관 님.”
류자크라고 불리우는 상위 악마가, 군단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에이든이라는 자의 호명을 받고는, 현 상황의 구체적인 정세를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신속하고 명료하게 보고했다.
“이 쯤에서 필요한 얘기는 다 한 것 같군. 더 들을 필요도 없겠어.”
“에이든 집정관 님. 이제 저희들과 약조하신 시간이 도래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영겁의 시간동안 설계했던, 거대한 계획의 개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때 입니다.”
에이든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가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괴상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흡사 넘쳐흐르는 여유를 과시하는 것 같았다.
“에이든 님..”
“나는 준비됐다.”
그의 내면 속, 끊임 없이 요동치는 광기와 숙연함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끊임 없이 교차하기라도 한 듯이, 특유의 심오한 표정을 내보이며 이어서 그는, 어쩐지 그윽한 회답을 건네었다.
“저희들 역시, 모두가 이 거대한 계획에 몸소 가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모자랄 것 없이 여기 있는 모두가.. 용맹함인지 교만함인지 모를 신념들에 의해 완벽히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힘을 한데 응집하면, 이 저주 받은 불모지에 우리들의 궁전을 축조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것 따위야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하다.”
“..그 전에, 열려있는 워프 관문을 닫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마들의 무리 중 유난히, 신중하고 지혜로운 면을 갖춘 메리버 하전트라는 자가, 조금은 위압감에 짓눌린 듯 하면서도, 어떻게든 가까스로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워프 에너지의 불안정한 흐름이, 근방을 불타오르게 만들고 그렇게 달구어진 대지를 잿더미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하찮은 인간들 따위는.. 지옥을 연상하는 열기에 도저히 접근 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군요.”
“어리석은 자여, 그건 차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에이든이, 그를 바라보며 마치, 막연한 신념에라도 찬 듯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메리버 하전트가 우려하고 있던 보잘것없는 걱정 따위야 이미 예상한 뒤, 심지어 그것을 대비할 준비까지 마친 후였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단 전체를 현실 세계로 워프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많은 양의 워프 에너지를 소진시켜야만 했다. 어찌됐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가.. 그 후폭풍으로 지금은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지만, 곧 기세를 잃고 점차 사그라들 것이다. 자, 보아라. 아까 전 까지만 해도 거세게 몰아쳤던 폭풍이 완전히 그쳤고, 에너지의 흐름도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의 궁전이 무사히 축조되고 나면, 워프 관문을 열고 닫는 것도 이제 한 결 더 용이해질테니, 지금은.. 아무래도 궁전을 축조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야.”
“...”
메리버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지혜롭기로 알려져 있는 그 조차도, 에이든의 완벽함에는 털 끝 만큼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악마들은, 그가 난처해하는 모습이 모처럼 즐겁기라도 한 듯, 멸시의 눈길을 보내며 비웃어대기 시작했다.
“자, 제군들에겐 조금 유감스러운 처사지만.. 모두들, 각자의 계획을 서두르는게 좋을 것이야.”
류자크가 무언가 쫒기기라도 하듯, 성급한 말투로 재촉했다. 분위기는 또 다시 숙연해졌다.
“내 장담하건대,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세계를 우리가 단독으로 집어삼키기에는.. 파괴하고 도륙내야만 할 놈들이 너무나도 많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걸세. 그 때가 되면, 우리 또한 심판의 불길에 희생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단단히 각오하게.”
그렇게, 또 다른 창세기가 찾아왔다. 이 세계가 창조된 지도, 어연 수 백 세기가 지난 것이었다.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는,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깊은 탄식의 잠에 빠져든 지 오래이다. 예컨데, 어쩌면.. 이들이 진정, 생명력이 다해가는 폭풍 앞의 등잔 처럼.. 몰락과 통탄의 바다에 빠져 목적지를 잃어버린 가엾은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희망이자, 절망의 늪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도자가 아닌가, 하는 막연한 조바심도 든다. 한 치의 빛줄기도 닿지 못하는 이 암담하고 잔혹한 세계를.. 그저 죽지 못하여 살아가는게 전부인 이 가련한 운명의 인류가, 이들에게 어떻게든 의지할 방법만 찾아낸다면, 여지껏 그 누구도 감히 경험하지 못한 영생을 초월하고도 남는 크나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인데..
잠시 동안의 원망 섞인 사색이 뇌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어쨌든, 그들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면 되었다. 불안정안 워프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호화롭고도 탐욕스런 궁전이 그 위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우직하게 솟아올랐다. 과연,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광경이 그들의 눈 앞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이제, 다 되었다.”
에이든과 그의 하수인들이, 핏기 서린 눈빛으로 축조된 궁전과 요새들을 굽어보았다. 비록 불순한 것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의 휘황찬란한 자태가 본능적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이 궁전과 요새들은, 지옥석(Nether Stone)이라고 불리우는, 불가사의한 암석으로 축조된 것들이다. 지옥석은, 그 존재에 관하여 말하자면, 고리타분한 구 시대 성서에나 그 기록이 적혀 있는, 지극히 신화적이고 허황된 존재임에 불과했었다. 이들이, 여기 이 곳에 강림하여 믿기 어려운 거대한 이변을 일으키기 전 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거짓된 낭설 따위가 아님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무지한 필멸자들이, 이 형세를 목격하고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심히 의문스러워졌다. 행여나, 이 장엄한 축조물과 그 창조자들의 불변성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어리석게도 눈 앞에 놓여진 운명과도 같은 것을 무조건 부정하려고 들거나, 스스로의 무지함을 애써 감춰보려고, 그럴 듯한 변명거리들을 입 밖으로 꺼냄으로서 진실한 회답을 끝끝내 꺼려할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성소는, 우리 공화국의 성스러운 심장부가 될 것이며, 그 누구도 감히 이 신성한 영토에 범접할 수 없을 것임을 선포한다. 그 증표로, 이 궁전과 요새들은 내가 마침내 운명을 다 하지 않는 한, 대대로 끊임 없이 폭풍과 같은 화염에 불타오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하찮기로 짝이 없는 모든 필멸자들은, 섣불리 발을 들이는 것 조차 맹세코 불허할 것이니라.”
모두들, 분위기가 한 층 엄숙해지면서, 뒤이어 농후한 박수 갈채가 불현듯 묵직한 환호성과 함꼐 궁전 밖을 가득 채웠다.
“이 대지를, 창조주에 반(反)하는 불순한 에너지로 가득 채우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류를 무지함으로부터 계몽시켜 주옵소서.”
류자크가 고결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든을 향해, 진실로 그의 결백함이 가득 담긴 숭고한 경배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사이몬 로드(Thymon Lord)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를 집어삼킬 위대한 도약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각자의 숭고한 책무가 본연 깊이 뿌리박게 되었음을 결코 잊지 말지어다.”
“사이몬 로드를 위하여...!!!”
“사이몬 로드의 이름에 명예와 축복이 깃들기를...”
과연, 그들이 갈망하고자 하는 의지는 놀라웠다. 악마들은, 일제히 분투적인 함성을 내지르며 무언가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자긍심 같은 것 따위에 깊이 도취되어 버린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이 인류들에게 대체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이 세계의 판도를 또, 어떤 식으로 뒤바꾸어 놓게 될지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 두고봐야 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위대한 집정관, 에이든이시여.”
모두들 전투 의지에 한창 도취되어 있을 즈음,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집정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엔 또 무엇이지?”
“이 근처에, 오래 전 부터 왕국을 세웠던 또 다른 세력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챘을 것 입니다.”
루나텐이라는, 기이하고도 신비스런 이름을 가진 악마였다. 그는, 예로부터 지옥과 현실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걸 좋아했다. 오래 전, 그가 섬기던 상관의 지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드나들어야 했던 적도 적잖아 있었으나, 그는 태생적으로, 현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의 세계를 어지럽히고, 나약한 필멸자들을 살육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그가 언제부터인가 피에 관해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여 종국에는 흡혈귀라는 오명까지 붙게 되었다는 점이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적어도 그건 에이든이 알고자 할 바는 아닐 것이다. 지금 에이든이 유일하게 그에 대해 관심있어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따분하고 하잘것없는 행적보다는, 그가 현실 세계에 자주 넘나들어 인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들에 관해서 집요하리만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저들이 아무리 저항해봤자, 그저 한낱 나약한 인류 따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대체 뭐가 어떻다는 것이지?”
“그들은 아주 오래 전 부터, 악마들을 숭배하고 섬기는 사악한 왕국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저들을 그냥 섬멸하기엔..”
“그래, 맞아. 저들을 우리의 휘하에 두고 ‘대리인’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루나텐.. 네가 보고한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말이야. 어찌 보면, 그게 우리가 태초부터 협의한 계획이었기도 했고. 내가 비록 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을 경멸하는건 사실이나, 오히려 그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해서 무지한 채로, 그저 막연한 절대자를 향한 신념 하나만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존재들이, 바로 저 인류라는 족속들이라, 벌써 수 백 세기 동안 저들끼리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 스스로 깨우칠 여지조차 없는 무지한 것들 같으니. 그렇기에 항상 명예롭고 정의로운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법.”
“조력자라면.. 마치, 우리와 같은 존재들 말이군요.”
그는 에이든을 바라보며,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허영심에 차기라도 한듯, 그를 향해 조금은 간사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인류는, 우리의 숙적입니다. 나약하고 쓸모없죠.”
칼슨 T 데스메이커. 그는 인간의 목숨을 거두는 사신이었다. 지난 영겁의 세월 동안, 죽음의 문턱에 인접한 수 많은 필멸자들을 심판해오고, 또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너무나도 경험한 바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필멸자들이 겪게 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필연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죽음 앞에 다다른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비겁한 존재들로 변모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최후의 순간이 도래할 적에, 그 모두가 어떠한 예외도 없이 죽음이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귀결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들이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결국은 모두가 그런 운명을 걸을 수 밖에 없는 무능력함을 데스메이커는 진작에 깨닫게 됨으로서, 피할 수 없는 깊은 환멸감이 그의 내면 속에 뿌리박혔던 것이었다.
“서둘러 저들을 살육하고 토막내지 않으면.. 정말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든은, 애써 입 밖으로 내보낸 대답과는 다르게 어쩌면.. 데스메이커의 생각에 전적으로 완전히 동의하는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의 매섭고도 냉혹한 눈길이, 무언가 겸언쩍은 듯한 기미를 암묵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망설이고 계신 것입니까? 대체 무엇이, 위대하신 집정관 님의 결정을 굳게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까? 행여나,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지 말아야 할 정당한 이유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 숭고한 이유가 과연, 저희들이 항상 인내해오던 전쟁에 대한 목마름까지도 차마 그럴 듯하게 대변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입 조심하라, 죽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나는 분명히 같은 목적을 띄고 이 곳에 강림했을 지어다. 비록, 이 하찮은 인간들이 너무도 나약하여, 지금 당장은 어떠한 이득도 줄 수 없을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단언컨대 그런 인간들의 나약한 면모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들은.. 불순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신념이란 것은 진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용해먹을수만 있다면.. 우리를 충분히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 만한 가치는 지니고 있다. 내 비록 예상한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먼저 우리를 갈구했으니, 우리 또한 그에 상응하는 작은 보답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야.”
에이든은 데스메이커의 얼굴을 그저 말 없이 바라보았다. 곧, 아주 잠깐이었지만,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의 위압감이 감돌았다. 그러자, 데스메이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럼, 이어서 재차 질문하도록 하겠다, 루나텐.”
“아무렴, 무엇이든지요.”
“우리를 지금껏 숭배해왔던 그 왕국에 대해.. 조금 더 알고싶은 것이 있다. 뜻밖이지만, 아주 흥미로워서 말이야.”
“각각 ‘루이번’과 ‘크루이드’라는 왕국입니다. 두 왕국의 왕족들은 대대로 뼈대 깊은 악마교 출신의 신자들이었지요. 왕국의 종교가 악마교로 책정된 것은 꽤나 오래 전 부터 그랬을 겁니다. 유감이게도, 그들이 어쩌다가 우리들을 숭배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현존하는 인류의 왕조들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현명했던 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실과 거짓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두 왕국은, 지배 계층은 물론이거니와, 소속 시민 모두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악마교에 심취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덕분에, 곳곳에서 탄압받는 악마교 신자들 사이에선 두 왕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양대의 성지로 불리우곤 하지요. 저들의 수비 요새는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견고한 축에 속합니다만, 피에 굶주린 우리의 군단에 비할 바는 못 될 겁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약간의 기량만 따라준다면,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굴복하도록 이끄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스레 복종하는 방향을 선택하기 마련이죠. 그들이 숭배하던 대상은 결국 우리, 악마들이니 말입니다.”
루나텐은, 그와 급을 같이하는 수 많은 악마들 중에서도, 인류들의 세계에 유달리 익숙한 듯 보였다. 그의 해박한 지식이란, 그들의 장대한 계획을 어떠한 착오도 없이 착수하도록 하는데에 암묵적인 활력을 실어줄 만큼 유의미한 것이었다.
“어리숙한 인간 놈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내는건,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 보다 쉬운 일이지.”
데스메이커가 자만심에 차기라도 한 듯, 한 결 여유 넘치는 눈길을 보내며, 그의 대답에 응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모두들, 서둘러야 할 때야. 위대한 집정관, 에이든이시여. 저희는 모두 적의를 불태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할 일은 이미 확고히 결정되었으니, 다만 우리는 집정관 님의 지령을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류자크가 에이든을 다급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무엇이 그를 조급하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금방이라도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받아들일 준비라도 된 듯, 지극히 비장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에이든은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 편.. 같은 시각, 거대한 워프 에너지가 대지를 무참히 휩쓸고간 지옥같은 광경의 여파가 루이번 왕국 일대에, 마치 전염병처럼 널리 퍼져 있었다. 왕국의 책사들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든, 그 실체를 추론해내고, 무엇이든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분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과학자나 성직자, 마법사들도 이 괴악한 현상에 대해서 전혀 알아낸 바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연구에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본연의 해답에서 멀어져만 감으로서,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차라리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는 듯 했다. 또, 그래서 어쩌면 그들에게 평생의 시간을 부여한다고 할 지라도, 결단코 그들은 이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들이 우둔하고 무능력해서가 아닌, 그들이 자행한 위대한 계획의 일부가.. 하찮은 인류 따위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장대한 탓이었으리라.
그리고 여기, 루이번 왕국의 책사가 국왕의 안식처가 있는 궁전으로 다급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아마, 그의 발걸음은 이 상황의 심각함을 알아차리고, 이에 대해 숙연히 고뇌하고 있는 국왕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만들고 싶었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가까스로 얻어낸 소식들이란, 그저 지극히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한 겉치례 따위에 불과했다. 또, 설령 그 소식을 무사히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받드는 국왕이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는.. 과연 그를 괴롭히는 착잡한 번뇌들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을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합니다.”
“...그래, 국경 지대 근방에서 큰 폭발이 있었다지? 내가 들은 바로는, 몇 차례 크나큰 화염 폭풍이 인근을 휩쓸어 그 여파로, 근방이 맹렬한 불바다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 참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누군가는, 어렴풋이 악마의 재림을 보았다고도 하는군. 예컨대, 그 정도의 위력을 발산할 수 있는 존재들이면.. 우리가 적대하는 왕국 놈들의 소행은 분명 아닐 것이야. 책사, 진정 우리가 갈망하는 ‘그 분’들이 강림한 것이 맞는가..? 어서, 단서가 될만한.. 무슨 회답이라도 내게 말해보게.”
“현재, 의회에서는 명망 높은 과학자들과 마법사들을 대거 소집하여, 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책사여.. 그런 틀에 박힌 얘기 따윈, 집어치우게.”
어쩐지, 책사는 유난히도 자신감이 결여된 어조를 띄고 있었다. 국왕은, 책사의 그런 모호한 태도가 가히 가증스럽기까지 느껴졌다. 말하자면 국왕은, 이 사태에 관한 ‘진실’을 답해주길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의 짐작이.. 그의 고뇌가, 흐르는 성수(聖水)에 한 치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말끔히 씻겨나가기를.. 그리고 어쩌면,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존재들로부터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기를.. 그는 다만,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하군, 책사.”
“..무엇이 말입니까?”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는.. 우리가 그토록 숭배하는 악마들의 존재를 진정으로 믿는가?”
“물론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분’들의 충직한 순교자들이지요. 언제든지, ‘그 분’들을 영접하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위대하신 저의 국왕님꼐서, 지금 제게 던진 물음이, 행여나 소인이 지닌 신앙심에 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아. 내 생각을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난 자네의 그 가증스런 회답이 꽤나 의심스러워. ‘그 분’들과 비견하자면, 한낯 먼지에 비할 바 조차 못되는.. 자네의 가련한 목숨을 걸고서 감히 그분들을 향해 맹세할 수 있겠나?”
“단언컨대, 저는 결백합니다. 제 목숨을 바쳐 ‘그 분’들을 향해, 굳게 맹세합니다.”
“그래, 조금은 한 결 낫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책사의 대답은 한 치의 미동조차 없었다. 또한 그것은, 더 나아가 그의 곧은 신념을 충분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국왕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흡족해하는 표정을 보이며 웃음지었지만, 그러한들 아직 그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확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국왕과 책사 사이에는 그들이 가진 신념에 관한,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담론이 오갔다.
책사와의 비장한 담론을 마저 끝마치고, 국왕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비록, 그가 고심하고 있었던 ‘그 사건’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수 많은 상념과 회의감들이 그를 끝끝내 핍박하며 잠 못 들게 하였으나, 문득 쏟아지는 졸음은 그의 정신을 이내 굴복하도록 이끌었다.
“테메토스 국왕...”
누군가 돌연히 그를 부르는 소리에,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정신은, 흐릿하면서도 분명했다.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그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빠르게 그의 주변을 급습했다.
“테메토스.. 내가 두려운가?”
“...”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넌, 지금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않나?”
희미하게만 느껴졌던 막연한 두려움이, 점점 그의 뇌리 속에 분명해지며 공포심에 떨고 있는 그의 심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곧, 나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테메토스..”
“으..으윽...”
“나와 내 하수인들을 영접할 준비를 끝내고.. 우리의 장대한 계획을.. 기꺼히 받아들여라.. 그것이 네게 주어진 숭고한 운명이 될지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가 갈망했던 ‘그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그 순간, 찰나의 공포가 그를 엄습해오며 그는 정신을 잃었다. 오한이 서린 지독한 악몽이었다.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잠결에 그가 쏟아낸 땀이, 그의 침대를 흥건히 적시고도 남을 양만큼 차고 흘러넘쳤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두렵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꿈결에서 본 것은.. 적어도 그가 여지껏 마주했던 그 무엇과도 감히 비견할 수 없을 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음엔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