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경찰 역시 반민특위(반민족행위처벌 특별위원회)를 아예 붕괴 시켜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49년 1월 8일 서울시경의 사찰과장실에서는 한 테러리스트에게 총과 돈이 건네진다. 반민법에 적극적인 국회위원과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특위 위원을 38선으로 끌고가 북한으로 월북하려는 것으로 꾸며 살해하라는 지시였다.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덫을 씌워 반민특위를 무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상해 임시정부 문화부장 역임)
하지만 이 사건은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친일경찰 노덕술이 기획하고 최난수 등 경찰 간부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자금의 출처는 반민특위 체포 1호 친일기업가 박흥식이었다.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의 조직적인 반발과 친일 경찰의 테러 음모, 반민특위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노덕술: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경찰 서열 3위),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유명함, 일제하 훈 7등, 종 7위의 훈장을 받아 일제하 경시까지 오른 8인 중 1명. 반민특위에 체포되나 특위 해체 후 무죄판결로 풀려남. 아들 노재봉은 노태우 정권에서 국무총리 역임.
<주미대사관 반민특위 보고서>
<"해방죠선" 중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948년 간행>
1949년 5월 18일 친일청산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의원 3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회의원이 남로당과 연결되었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시작이었다.
국회는 5월 24일 구속된 3명의 의원 석방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부결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석방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에게 빨갱이라는 색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는 의원들이었다. 의원들의 체포가 계속되었다. 3차례에 걸쳐 13명의 의원들이 체포되었다. 소장파를 대표하던 김약수 국회부의장과 반민특위의 검찰이던 노일환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6월 3일 탑골공원에서는 반공 대회가 열렸다. 일제시대 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한 친일파인 손홍원과 김정한이 대모를 주동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집회에서는 반민특위 내의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가 외쳐졌고 대모대는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 집회는 친일경찰이 배후에 참여한 관제대모였다.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가 배후였다.
중부 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반민특위의 사무실을 습격했다. 경찰은 반민특위의 수사서류를 압수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조사관, 특경대원들의 무기를 압수했다. 경찰이 헌법기관을 습격하는 탈법적 사건, 이 습격 사건은 권력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