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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연재 - 4
게시물ID : history_122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3
조회수 : 1493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10/22 16:55:21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요새 참 짬이 잘 안 나네요.



프랑스 혁명사 연재 목록

0. 비단신이 층계를 내려오고 나막신이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를 들어라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579&s_no=6255067&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1. 혁명전야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596&s_no=6266912&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2. 일어나는 프랑스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646&s_no=6290745&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3. 삼부회, 국민의회, 그리고 봉기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853&s_no=6397606&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4. 계속되는 혼란과 도당의 성립



"다중의 잔인함은 모든 다중의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고 염려되는 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잔인함은 군주가 자신의 개인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 염려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로마사 논고> 中, 니콜로 마키아벨리



─대공포(Grand Peur), 그리고 불완전한 봉건제 철폐

파리의 봉기를 통해 국민의회의 권위는 반석 위에 올랐습니다. 왕의 권력은 제한되게 되었고, 그 누구도 이전처럼 이 제 3신분의 무리들을 없는 것마냥 치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정념의 소용돌이가 대중들 사이에 불고 있는 한, 언제 그랬냐는 듯 혼란이 수습될 일은 없었습니다.

1789년의 봉기는 파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의원을 선출해 파견한 각 지방은 2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미 나름의 자치기구를 운영하고 있었고, 자기 지방 의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서신을 받아 중앙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다가 들려온 국민의회와 파리의 영웅적인 승리 소식에 각 지방은 열광했습니다. 지방의 제 3신분들은 중앙의 승리에 발맞추어 귀족들이 장악한 기존 통령부를 해체하고 제 3신분으로 이루어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무엇보다도 귀족들의 용병 군대를 대체할 국민군을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주로 제 3신분의 젊은이들이나 부르주아의 하인들로 이루어진 국민군은 각 지방에 바스티유처럼 건설되어 있던 성과 요새를 접수하였고, 기존 군 사령관들은 대체로 저항 없이 이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이런 상대적으로 평온한 반응과 달리, 프랑스 국토의 대부분을 점하던 농촌 지역은 극히 격렬하게 반응했습니다. 농민들은 삼부회에 자신들의 대표로 부르주아 대의원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해 달라는 진정서를 들려 보냈었습니다. 베르사유에 간 대의원들은 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요구사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달래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평생을 고개숙이고 참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으나, 파리의 봉기 소식을 그들의 옛 주인들이 이제 더 이상 주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단순화된 이해로 받아들이고 나서 폭발했습니다. 각 지방도시의 질서 재편은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손에 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고, 엽총이나 쇠스랑 혹은 도리깨 따위를 꼬나쥔 사람들은 이제 똑같은 사람이 된 옛 주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삶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들의 사고 속에서 옛 지배관계의 철폐는 곧 더 나은 삶을 의미했고, 전자가 확보된 이상 후자의 성취는 누구 손으로 하건 어쨌든 빨리 하는 게 제일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주관을 포위하여 각종 봉건조세의 구실이 되는 고문서들을 불태우고, 영주의 창고를 열어 곡물을 강탈했으며, 저항하는 영주 식솔들을 폭행하고 그 집을 불태웠습니다.

이 반란은 7월 20일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 파리가 있는 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확산되는 과정에서 유언비어에 의해 과장되었습니다. 도둑떼가 농작물을 불태우고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죽이며 온갖 재산을 빼앗으면서 도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은 각 지방도시의 국민군 결성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이 대규모 반란과 이에 따른 유언비어의 확산을 일컬어 대공포라고 합니다. 폭도들은 딱히 영주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참한 삶을 착취하는 모든 무위도식자들─매점매석 상인, 세금징수인, 악질 판사, 유태인들 역시 공격했습니다. 각 지방의 부르주아들은 유순한 아랫것에서 잔혹한 폭도로 갑자기 돌변한 이 '제 4신분'들을 보며 공포에 떨었고, 이내 신속하고 강력한 탄압을 수행했습니다. 무장한 국민군은 농민들을 수십 명씩 사살했으며, 리옹과 같은 초기 공업 발전지대에선 노동자들이 국민군에 대항해 농민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특권계급에 맞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자부하던 국민의회의 제 3신분 의원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이 봉기에 대해 가장 가혹한 공격 계획을 제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빈민들이 사유재산을 강탈한다는 이미지는 근대 부르주아에 속한 사람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근원적 공포였습니다. 의원들은 앞다투어 군대를 파견해 봉기자들을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 순간 역시 프랑스 혁명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었는데, 왜냐면 이 의견이 통과되었더라면 왕은 이 탄압의 도구들을 다시 손에 쥐고 나서야 했을 것이고, 봉기의 안정화 이후 이를 혁명 그 자체를 죽이는 데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탄압은 부르주아와 농민이라는 계급연합을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분열시켰을 것입니다.

다행히 부르주아들과 달리, 자유주의적 귀족들은 좀 더 아량이 있었습니다. 라파예트를 필두로 한 이 집단은 빈민들을 회유하고 안정화시킬 방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그에 따라 8월 4일에 봉건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1. 일체의 면세특권은 폐지된다. 2. 모든 봉건적 조세는 적합하게 배상된 후 사라진다. 3. 모든 봉건적 노역과 예속은 조건 없이 철폐된다." 부르주아들은 재산이 보상된다는 것에 매우 만족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당시 부르주아들이 무작정 상공업에만 매달리는 계층이 아니었고, 오히려 수입원이 없는 귀족들로부터 토지나 지세징수권을 사들인 케이스도 많았음을 함께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대단한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였죠. 이를 감지한 의원들은 앞다투어 구체제에서의 농민들의 아픔과 설움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연단 위에서 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8월 4일의 결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봉건제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감동적인 연설과 별개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8월 4일의 결의를 듣고 영주관을 불태우는 일을 중단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집에 돌아가고 나서야 각 봉건조세가 적절하게 배상되기 전까지는 징수를 계속한다는 규정을 알게 됩니다. 부르주아들은 부르주아대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제 자신들은 이렇다 할 세원을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거액의 빚을 진 국가의 채권자가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국민의회는 이후 8월 4일의 결의를 최대한 완화시킨 형태로 적용하려 애쓰는데, 그 일환 중 하나가 봉건조세의 존재를 '영주와 농민 사이에 먼 과거 있었음직한 거래의 결과'로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농민이 자신에게 어떠한 빚도 없으며 그저 일방적으로 수탈당했음을 주장하기 위해선 스스로 그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영주가 진 빚에 대해 농민은 연대책임이 있었고, 배상절차는 너무 복잡해서 배상할 능력이 있어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정적으로 배상이 끝나기 전까지 봉건조세는 계속 징수되는데, 영주는 배상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 불완전한 봉건제 철폐에 따른 문제는 국민의회의 회기가 끝나는 그날까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달은 농민들은 다시 무리지어 격렬한 청원서를 제출하거나, 납세를 거부하곤 했습니다. 농촌의 혼란은 프랑스 혁명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명멸하는 과정에도 배경음처럼 계속 깔려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위해선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의 안정적 수행을 위한 입법의회의 결정, 그리고 이후 급진파가 장악한 국민공회의 추진이 있기까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인권선언의 발표와 헌법 논쟁, 그리고 10월 천도

아마 프랑스 혁명을 정치적 근대의 출발점으로 승인해 주는 문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권선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프랑스 전역을 휩쓸던 혼란과 투쟁 속에서 태어난 인권선언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정치 원리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인 공권(公權, droit public, public right)을 형성한 최초의 문서입니다. 다시 말해 집합적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어떠한 권리를 가지는가를 규정한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죠.

이러한 인권선언의 발표도 부드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에서의 봉기와 무질서에 놀란 부르주아들 중 일부는 이러한 선언이 위험하거나 혹은 쓸모없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혁명적 이상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국민의회의 다수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특히 8월 이후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원탑 대세로 올라선 라파예트의 추진 의지가 확고했기에 인권선언은 새로운 프랑스 헌법의 전문(前文)으로서 발표될 수 있었습니다.

Declaration_of_the_Rights_of_Man_and_of_the_Citizen_in_1789.jpg


총 17조로 이루어진 인권선언의 전체 내용은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_%EC%9D%B8%EA%B6%8C%EC%84%A0%EC%96%B8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꼽자면 먼저 2조에서 압제에 대한 저항을 기본권으로 승인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티에는 이에 대해 "이 선언은 앞으로 나타날 다른 반란들까지 정당화시켜준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제 막 승리한 반란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켰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 선언은 사실 많은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소유권을 지고의 권리로 두어 부(富)의 세습과 타락을 방조했고, 형식적 평등만을 인정했습니다. 종교가 사회에 필수적이라고 보던 시대적 한계에 의해 이 선언은 여전히 '지고의 존재'(=神)의 비호 아래 있었고, 사상과 의견의 자유 역시 그 한계를 명확히 두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한계와 별개로 이 원칙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질서를 세운 시금석이었으며, 이후 일어날 수많은 정치적 진보와 변혁운동의 근원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헌법의 전문이 완성되고 나서 국민의회는 본격적인 헌법제정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회는 양원제와 왕의 헌법에 대한 거부권을 둘러싸고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7월에 프랑스를 불길에 휩싸이게 한 농민반란은 국민의회 내에서 뿌리깊은 사회적 보수주의가 고개를 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봉건적 재산의 폐지가 모든 재산의 폐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은 보수적 의원들로 하여금 무지렁이들을 제압하고 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권력을 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무니에로 대표되는 이 '왕당파'는 상원과 하원을 분리하고, 왕에게 절대거부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삼두정치가(라메트, 뒤포르, 바르나브)가 이끄는 브르타뉴 대표단과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후자의 일파, '삼두파'와 '입헌파'의 연합은 상원의 분리는 귀족정치가들의 피난처 겸 요새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의 절대거부권은 혁명을 왕의 자비에 맡기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라파예트는 두 일파를 자신의 집에 불러 화해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습니다.

국민의회에서의 표결 결과 양원제는 지방귀족들의 대귀족 견제로 인해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었으나, 왕의 일시적 거부권을 향후 4년 동안 허용한다는 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삼두정치가 중 한 명인 바르나브가 미라보와 함께 이끌어낸 타협책, 8월 4일의 결의를 왕이 신속히 승인하는 것과 맞바꾼 안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끝까지 왕의 거부권을 타협 않고 비판한 로베스피에르, 페숑(후일 입법의회 의장), 뷔조(후일 지롱드파), 프리외르(후일 공안위원) 등도 있었습니다만 표결에 결정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로베스피에르는 이미 그 특유의 열정적인 연설 스타일로 주목을 받는데, 자주 그의 확고한 입장에 불쾌해진 동료 의원들에게 방해를 받고 연단에서 쫓겨나곤 했다고 합니다. 아직 진정한 소수의 민주주의자들('민주파')은 의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아예 연설의 대상을 의원들이 아닌 대중들로 잡고 연설을 하여 그것을 인쇄, 배포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결과는 무니에의 왕당파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계속해서 공세를 취합니다. 32명의 지도위원회가 구성되어 반격을 시도했고, 이 위원회는 루이 16세에게 급진파의 음모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궁정을 베르사유에서 더 먼 곳으로 옮기도록 조언합니다. 그러나 왕은 베르사유를 떠나는 것을 일종의 도망처럼 생각하였고, 웬 자존심은 남았는지 이 조언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는 왕당파의 다른 조언, 9월 말 경에 국경 지대의 몇몇 연대를 소집하겠다는 안은 승인합니다. 반대파들은 이 군대의 소집을 본격적인 도전으로 생각했고, 당시 국민군 사령관의 직함을 달고 있던 라파예트 역시 격렬하게 이 비협조적인 제스처를 비난합니다. 이미 파리의 민중들은 빵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도망친 귀족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이발사, 제화공, 재단사들이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저 유명한 장 폴 마라(가장 철저했던 급진 공화파, 후일 암살당함)가 <인민의 벗>을 창간했던 때도 이 때이며, 파리 각 구의 의회와 코뮌들은 군대를 송환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당파들은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대중과 여론은 이미 무력한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이 자만은 대가를 치릅니다. 10월 1일, 근위대는 궁전의 오페라 극장에서 막 도착한 플랑드르 연대를 환영하기 위한 연회를 벌입니다. 음악과 술에 흥분한 손님들은 모자에 달고 있던 삼색 모장을 떼어 짓밟고, 백색(부르봉 왕가의 상징)과 흑색(마리 앙투아네트의 가문 상징) 모장을 달았습니다. 10월 3일에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이 파리에 보도되었고, 10월 4일 <인민의 벗>은 왕당파의 음모를 규탄했습니다. 마라의 격렬한 고발에 따르면 왕당파는 헌법이 완성되기 전에 그것을 뒤엎고자 하며, 왕이 8월 4일의 결의에 대한 재가를 계속 미루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각 구에 무장하라고 호소했고, 각 구는 코뮌에 대표를 보내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10월 5일, 여인들의 무리가 파리 시청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바스티유 공격에 참가했던 문지기 마이아르(이후 혁명가로 크게 활약)가 이들을 이끌고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오후에 도착합니다. 이어서 파리의 국민군 부대는 라파예트에게 군대를 이끌고 베르사유로 향하라고 요구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코뮌의 허가를 받은 라파예트는 혹여 자신이 없는 사이 봉기가 일어나 오를레앙 공작이 정세를 장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재빨리 베르사유로 향합니다. 당일 아침 루이 16세는 사냥을 하러 나갔고, 의회는 여전히 거부권에 대한 격론 중이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와 바르나브는 왕의 직위가 헌법에 의해 재규정되는 것이므로 그 직위로써 헌법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의회는 이 주장을 채택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왕에게 즉각 헌법을 수락하라는 요구를 전달하자고 결정하려는 무렵 마이아르가 이끄는 여인들의 무리가 의사당에 나타났고, 이들은 식품 가격과 국민의 모장에 가해진 모욕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들을 지지했고, 의회는 대표단으로 하여금 왕에게 파리 시민들의 불만을 함께 알리도록 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각료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왕당파의 대변인 생프리스트는 왕이 루앙으로 도망가 당장의 폭력을 피하고 다시 힘을 모아 반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네케르는 국고가 비어 군대에 대한 급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왕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의회와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정 때쯤 도착한 라파예트는 왕에게 유감을 표하고 궁정 안의 보초를 근위대로, 밖의 보초를 자신이 데려온 국민군으로 세웠습니다.

6일 새벽, 파리에서 온 사람들 중 일부가 허술하게 경비하는 문을 통해 궁전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한 근위병이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총을 쏘았고, 한 남자가 쓰러졌습니다. 이것을 본 군중은 근위대를 향해 돌진했고, 순식간에 궁전 안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근위대는 힘에 밀려 초소로 후퇴했으며 왕비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대피했습니다. 근위병 수 명이 살해되어 그 목은 창 끝에 효수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학살을 막기 위해 왕이 왕비와 왕세자를 동반하고 발코니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왕을 파리로!"를 외쳤습니다. 결국 왕은 무력하게 구체제 궁정정치의 심장에서 새롭게 약동하는 혁명의 심장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회 역시 파리로 이동하여 새로 의사당을 정했습니다.

이 천도는 혁명에 있어선 바스티유 점령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왕과 의회는 프랑스에서 가장 혁명적인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게 된 것입니다. 혁명은 이제서야 확고하게 그 자리를 잡았으며, 헌법은 '재가'된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여'졌습니다. 왕당파의 수장이었던 무니에는 의회 의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반란을 선동하려고 애썼으나, 얼마 안 있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왕당파의 다른 인물들 역시 7월 봉기 때 망명했던 대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중앙정치의 혼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라파예트는 이 기회를 활용해 스스로를 왕의 유일한 보호자로 내세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합니다. 그의 일파는 왕이 자발적으로 파리로 왔음을 강조하는 신문을 발행하고, 독립적인 정론가들을 단속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유력한 자유주의 대귀족인 오를레앙 공작을 영국에 외교사절로 보내어 중앙정치 무대에서 제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에게 혁명의 결과에 대한 승인 및 반혁명 망명귀족과의 관계 단절이 왕 자신에게 이득이 됨을 역설하며, 루이를 새로운 국민의 왕으로 만들어 줄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임을 요구합니다. 질투심에 찬 미라보는 라파예트의 우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작을 펼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가 오히려 라파예트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까지 합니다. 왕은 일단 표면적으로 라파예트의 요구에 따라 의회에 출석하여 새 질서를 받아들이는 선언을 하고, 망명귀족들과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망명귀족들의 산발적인 지방 반란 선동을 믿지 않고, 타국 군대를 끌어들일 시간을 벌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국민의회는 그 이름도 찬란한 제헌의회가 되어 새로운 프랑스의 재건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분열, 혼란, 투쟁, 배신으로 얼룩진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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