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헛된 바람 / 구영주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처럼.
절벽 / 이 상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향기롭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 속에 나는 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잊어 버리고 재차 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 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보이지도 않는 꽃이 - 보이지도 않는 꽃이
로프노르湖를 찾아서 / 조유리
죽은 호수가 사막을 쏘다녀요, 바짝 탄 숨구멍에서 조곡 같은 모래바람이 태어나요 짜고 슬픈, 유적인 나의 호숫가
흐르고 있는 것들은 이승에 잠시 풀어놓은, 계절풍이지.
당신이 훅, 앞가슴을 들춰보였을 때 까닭없이 매운 고독에 마음을 눌러놓지 말아야했어요 갈라터진 기억들을 뱉어내는 일기장 한 번도 따스한 피를 수혈 받지 못한 손가락들이 수북하게 찢겨져 새벽녘마다 길 없는 곳으로 쏟아져요
생의 한 복판으로 흘러가지 못한 것들이 광막한 지평 끝에서 늙어갈 때
검은 砂丘에 매몰된 당신, 밤이면 잠속으로 흘러와 밤새 모래알들을 컥컥 뱉어내요 스무 살 통증이 몰려와 등을 쓸어주려 하면 검은 모래폭풍이 바닥 채 쓸어가 버려요 얕아진 바닥이 바닥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 된 꿈에서 필사적으로 깨어나면 타고 온 막배가 엎지른 호수
당신이, 내 몸 속에 흥건해요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 류시화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 내리고 마음은 왜 나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