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경제학에서는 시장의 가격원리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면, 직종에 대한 매력이 소실돼 노동공급이 감소해야만 한다. 노동력을 사기 위한 노동시장에서 기업의 구인 욕구와 노동자의 취업 욕구가 최적의 조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소비자가 제품 가격에 따라 구매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헌데 실제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되곤 한다. 노동자의 임금이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떨어지면 노동공급이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곤 했다. 작금의 비정규직과 임시직 및 일요직 노동자들이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에도 자신의 노동력을 기업과 자영업자에게 제공하는 것도 이런 역설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경제학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런 역설은 “임금이 생계비 이하로 낮으면 근로자들은 부족한 생계비를 벌기 위하여 잔업을 하거나 부녀자와 아동들도 일하게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최신판인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한 지금, 하루에 투잡 이상을 띠는 노동자와 아르바이트에 나선 부녀자와 아동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시장의 가격원리에 내재하는 근본적 문제이다.
1940~5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원형인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의 주창자 중 한 명인 오이켄은 자본주의 역사에 만연한 이런 역설을 예방하려면 국가가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경쟁질서를 확립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독점기업들을 해체한 공정한 경쟁질서가 확립되면 노동시장에서 수요독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임금이 하락할수록 노동공급이 과잉되는 역설(마르크스는 사업자가 자본 축적을 위해 생계비에 미달하는 저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초과착취라고 했다)이 계속되면, 이를 막기 위한 최종 해결책으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임금에 관한 시장의 가격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계를 위해 국가가 최저임금을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이켄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면 노동시장의 수요독점에 따른 임금 하락이 사라진다고 봤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에서 금융이나 아이디어 및 서비스 산업처럼 가벼운 경제로 이행할수록 이런 역설이 강화됐다. 특히 영미식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확대되면 될수록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속출했다.
문제는 이런 역설의 강화가 일반화되자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최저생계비가 노동자의 임금이 생존비용에 턱걸이 하는 수준에서 책정되도록 악용되는데 있다. 오이켄 등에 의해 최저생계비라는 제도가 도입됐을 때만 해도 평균적인 남성노동자의 임금만으로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축과 교육, 보험을 들 수 있었다.
헌데 1973~75년 이래 전 지구적 차원의 경제 성장과 규모가 줄어들고, 국가에 의한 독점기업이 아니라 시장경제에 의해 민간독점기업들이 부를 독식함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은 추락을 거듭했는데, 그 근거로 이용된 것이 최저임금제였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조에 따라 부의 불평등이 극대화되자 최저임금이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이에 따라 부녀자와 청년 및 아이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드는 신자유주의적 퇴행이 발생했다.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최저임금제가 노동자는 물론 가족의 해체나 파괴, 가난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근거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생존임금으로의 변질,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최저임금에 숨어 있는 두 번째 진실이다.
최저임금이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면 노동시간 단축도 불가능해지고, 연예와 결혼 및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양산되며, 각종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 이처럼 노동의 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경제적 기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이것이 선장과 승무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었던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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