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7. 목요일
kuru
새벽에 윤군과 같이 동포 김해산의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 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일곱시 치는 종소리가 들리자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에게 주면서 내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저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어 주었다. 윤군은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내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 있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 백범 일지 中 -
1932년 4월 29일
천황의 생일 축하와 상하이 점령 승전 기념식이 열리던 상하이 홍구공원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그리하여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과 카와바다 일본인 거류민 단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일본 해군 제3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 사단장 우에다 중장 그리고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중상을 당했다.
미주리함에서의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연미복에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함에 오른 시게미쓰 일본 외상
저 동영상에서 일본을 대표해서 나온 일본 외상 시게미쓰가 중국 상해에서 한국의 애국자에 의해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의거는 당시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 라고 극찬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적극 지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군관 학교에 조선인 특별반이 만들어져 인재 양성이 이뤄지면서 대한민국 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장개석 총통은 카이로와 포츠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해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적절한 절차를 밟아 자유 독립 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 라고 선언한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그리고 장개석 총통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독립은커녕 승전국의 영토가 되거나 일본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국내 일부 세력들은 대한민국 독립을 명시한 카이로 선언은 이승만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공허하게만 들린다.
1932년 일본은 10만 병력으로 중국 상하이를 공격했다. 30만 중국군은 결사 항전했으나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으며 패배해 상하이를 점령당했다. 중국이 수모를 겪던 그 때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의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의 수뇌부를 사살한 것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못한 복수를 대신 해준 윤의사를 순국 열사로 추앙했고, 대한민국의 임정과 독립 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장개석 총통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버마를 중국이 공격해 일본군의 화력을 분산시키면 맥아더의 태평양 군단이 반격을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카이로 회담의 3국 중에 특히 영국의 처칠은 식민지 독립 문제에 강경했다.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면 인도와 같은 전 세계 영국 식민지의 독립 요구로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에 중국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과 영국은 결국 한국 독립의 보장을 공포할 수 밖에 없었다.
윤의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쓴 장개석 총통의 친필 <장렬천추>
우리는 6.25전쟁 당시 우리를 도왔던 미국을 위시한 참전 16개국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먼저 참전 의사를 밝힌 나라가 바로 자유중국 지금의 대만 장개석 총통이었다. 그 당시 모택동에 패해 대륙을 넘겨주고 대만으로 철수했던 직후로 그들도 대단히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미국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끼 줄이기 운동을 하여 한국에 식량 지원을 한다. 게다가 3개 전투사단 과 20대의 수송기, 해상 수송선을 제공하겠다는 파병 제의를 했지만 당시 이승만은 거절한다.
"내가 중공 빨갱이들을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
맥아더와 미국 정부도 중공의 참전 가능성과 대만이 3개 사단을 파병하면 중공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 또한 우려했기 때문에 자유중국과 화교는 개인 자격으로 소수의 인원이 참전했다. 1966년 동남아 순방중 자유중국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은 윤봉길 의사를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했고, 그해 자유중국 쌍십절 행사에 윤의사의 동생 윤남의 선생과 아들 윤중선 생을 국빈 초청 예우했다.
장개석 총통 생전에 공식 국호는 자유중국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그러다가 장총통 사후 어느샌가 슬그머니 대만으로 격하하고, 단교하였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철수했고, 명동 한복판의 자유중국 대사관은 중국이 차지했다.
김구 선생과 상해 임시 정부는 당시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어머님은 우리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걸 보고 매일 밤이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나는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같이 살며 어머님께서 담가주신 우거지김치를 오래두고 먹었다."
- 백범 일지 中 -
말이 우거지김치지 중국 채소 상인이 버린 쓰레기를 몰래 주워다가 겨우 소금으로 염장해서 먹고 굶기를 밥 먹듯 하던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그런 궁핍한 생활 중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하와이 교민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군자금과 기부금이 들어오자 굶주리던 어느 젊은 임시 정부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돼지고기라도 좀 사서 구워 먹었으면..."
저 소리를 들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호통을 쳤다.
"동지의 핏값으로 고기를 구워 먹자고? 너 이놈! 너는 독립군 자격이 없는 놈이다. 어서 종아리 걷어라!"
그날 그 젊은 임정 인사는 곽낙원 여사에게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미주리함상에서 미국을 위시한 중국, 영국, 소련, 호주, 캐나다 그리고 대전 초기 독일에 항복해서 전쟁에 크게 참여하지 못한 프랑스도 승전국 자격으로 서명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을 대표해서 항복하러 나온 인사의 다리를 날려버리는 독립 투쟁을 했던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김구 선생은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는 백주의 테러를 받고 해체된다. 그리고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했던 대한민국은 "김구 선생의 독립 운동은 오사마 빈 라덴 수준의 테러 행위일 뿐" 이라는 조롱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윤의사는 상해 거사를 앞두고 고향의 두 아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저런 단호한 유언을 남긴 윤봉길 의사의 후손 손녀가 지난 대선 박근혜 후보의 진영에 가담해 선거를 도왔고, 인수위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박근혜 후보를 친일파 후예라고 하는 건 연좌제다."
"참여정부에서 친일파 재산 환수를 통해 독립 운동가 후예들을 지원한 것은 치욕스러웠다."
분명 한국어인데 나는 아무리 읽어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누가 해석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설명 좀 해주기 바란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1960년 3월 참의원에서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 " 제2차전쟁 당시 그 전쟁을 침략 전쟁이라고 생각한 일본인은 없었을 것이다" 발언을 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그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다.
'한국의 일본 재식민지화'를 여러차례 미군정에 청원했던 A급 전범 고다마 요시오와 사사카와 료이치.
"한일합방은 일본과 대한제국 간의 완전한 자유 의사와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됐다" 라고 주장한 사토 전 총리.
'조선병합은 영광스러운 제국주의'라고 했던 시이나 전 외상.
생체 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 가토 가쓰야(우리나라 총리가 '항일독립군 아닌가요?'라고 답했던 부대다.)
저들은 독립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았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이다. 그 이후 전두환, 김영삼, 이명박정권에서도 훈장 수여는 계속되었다. 저런 인사들에게 훈장 수여한 사람이나 그 정권은 친일파라는 게 연좌제인가?
참여정부의 친일파 재산 환수 및 독립운동가 후손 지원을 참여정부 단독으로 날치기해서 한 게 아니다. 여야합의로 했다. 그것도 국회의원 세비 인상처럼 국민이 반대하는데 여야만 찰떡궁합 죽이 맞아 한 게 아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반면에 90년대 들어 이완용, 송병준 등의 후손들이 조상의 재산을 찾겠다면서 소송을 내 승소하자 국민이 분노하였다. 이로 인해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특별법을 제정해서 추진한 것이다. 그것이 치욕스러웠다고? 그래서 박근혜 후보 진영에 가담했다고?
해군 장병 46명이 사망한 천안함 사건 당시 울부짖는 유가족들을 보고 "소, 돼지처럼 운다" 고 조롱하던 인사를 경찰 총수에 임명했던 정권. 당시 많은 국민이 힘내라고 천안함의 모기지인 평택2함대에 위문금을 보냈다. 그런데 그중 상당액을 지휘관 회식과 기념품 구입에 썼단다.
굶기를 밥 먹듯 어려운 생활을 하던 상해 임시 정부의 젊은 독립군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전 세계의 교민들이 보내온 피땀어린 성금을 보고 "돼지고기라고 좀 사서 구워 먹었으면..." 한마디 했다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무서운 호통과 모진 종아리 매를 맞아야 했다. "동지의 핏값으로 고기를 구워 먹자고? 네 이놈! 너는 독립군자격이 없는 놈이다 어서 종아리 걷어라!"
독립했다는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전몰 장병에게 보내준 국민 성금으로 회식하는 지휘관들은 있지만 종아리 때릴 어머니는 없다.
그저 '원칙과 신뢰' 를 읊조리는 할머니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