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이라는대요
게시물ID : history_65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칠마루
추천 : 1
조회수 : 102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1/28 12:40:25

 

독도의 명물? 위협하는 고사포

한국에 의한 실효지배의 상징이라고도 말해야 할 독도의 군사시설, 고사포가 향한 방향에는 일본이 있다. 독도에는 1954년부터 경비대가 상주하여 지금까지 일본을 향하여 겨냥하고 있다.

 

독도는 1905년에 일본의 영토에 편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방적인 선언과 무력행사에 의한 실효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독도는 일본과 한국의 경계에 있는 단애절벽의 섬이다.

일본 해에 뜨고, 시네마현에서 약 211km, 오키제섬에서 약 157km의 바다 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니시지마와 히가시지마, 그리고 수십개의 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변은 난류의 쓰시마 난류에 의해 풍요로운 어업자원을 자랑하고 있는 어장으로 되어 있으며 근처에는 광물자원이나 차세기 에너지로 기대되고 있는 가스 하이드레이트도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독도 자체는 음료수나 식생에 결핍하여 사람이 살기에는 부 적합한 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인에 의하여 섬 정상에는 군사시설이 건설, 포대까지 설치되어 있다. 시설에는 한국 해양 경찰서가 상주하고 있으며 경비를 엄중히 하고 있다. 한국인은 이 섬을 견학할 수는 있지만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경계선상의 치열한 줄다리기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분쟁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당시 독도는 송도로 불려왔다. 그 때 분쟁은 독도가 한국의 울릉도를 둘러싸고 있어 그 당시의 일본은 동도 주변에서 어업을 왕성하게 하고 있어 실효지배도 확립되었다.

한국의 어민이 밀어를 하게 되면 막부(옛날 일본의 정권)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하여 어민을 강제 송환 시킨 정도다.

당시 이씨 조선은 막부의 이런 대응에 반발하여 결론적으로는 일본인은 이후 울릉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로 일단 결착되었다. 이때 독도(그 당시 송도)에 관한 기술은 없었으며 도항금지도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1905년에 독도는 정식으로 일본영토에 편입되었고 시마네현 소속으로 되었다. 곧 이어 독도의 어업권을 오키의 한 사업가가 취득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강치와 전복 어업이 잘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어민들의 난획으로 한동안 강치가 사라질 정도라고 한다.

5년 후인 1910 8월 한국은 일본에 병합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40년에 독도는 해군기지로 해군성에 이관되었으나 일본의 패잔으로 독도의 일본권리는 무효로 되었다. 게다가 GHQ(연합국군최고사령총사령부) 1945 9월 독도를 일본 어선의 창업구역에서 제외시켜 맥아더 라인을 설정, 1946년에는 울릉도, 제주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기한 훈령을 공포해버렸다.

일본이 이것에 항의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과 1951년 에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제국과의 사이에서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로 맥아더 라인은 폐지되었다. 여기서 독도는 또다시 일본영토로 되었다.

하지만 이번은 한국이 이 결정에 의견을 내세워왔다. 어떻게 해서라도 라인을 존속시키고 싶은 한국은 조약이 발효된 1952 4월부터 전 동년의 1월에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여 독도를 이 라인에 짜 넣어서 독도라는 한국독자의 이름을 달았다. (이승만은 당시의 한국 초대 대통령의 이름).

이름을 바꿔가면서까지 라인의 지속을 원하는 한국의 목표는 어업권 획득이다. 그리고 국제법에 어긋나는 이 주장과 거기에 기초를 두는 강경한 실효지배가 심각한 영토문제로 오늘날까지 일본을 무겁게 덮치고 있다.

무력점거! 폭주하는 한국

이승만 라인이 선언된 이듬해인 1953, 단속을 강화한 한국이 라인 내에 출어한 일본 어선을 나포, 물고기 어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때마침 일한 국교정상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의 사건이었지만 이것에 의해 회의는 분규만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일본어선의 나포나 선원의 압류가 잇달아 일한국간의 긴장은 높아져만 갔다.

올해는 해상보안청과 시네현이 독도의 조사를 실시하여 한국어민을 퇴거시킬 뿐, 한국의 수비대가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포한다 라고 말했다. 심한 움직임이 양국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발포사건은 그 후에도 잠시 계속, 1954년이 되어 한국이 독도에 무인등대를 설치, 결국 무력점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독도는 히비야공원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섬으로 주변은 단애절벽, 음료수의 조달도 어려운 섬으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안테나, 군사시설 등을 차례로 설치하고 일본에 대한 위협과 실효지배를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은 진행되어 1965년에 일한 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이것에 의해 이승만 라인이 소멸되었지만 독도문제는 여전히 미결문제로 남아 한국은 그 후에도 불법점거를 한 상태로 있다.

1994년 국연해양법조약이 발효되어 일한국은 새로 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거기서 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정해져 중간 선을 설정하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한국은 자국의 중간 선을 보다 넓히기 위해 독도의 실효지배를 확실하게 하고자 有人등대를 설치, 접안시설의 건설 등을 실행하고 있다. 결과는 새 일한 어업협정으로 독도의 주변을 일한의 공동관리 수역으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회색 재정이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 어선은 독도에서 12해리 이내에서는 작업을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쓰시마까지가 한국의 영토?

2005년 독도가 속해있는 시마네현은 2 22일을 독도의 날로 정했다. 이것은 같은 날 시마네현에 소속한다는 통보가 있었던 날이며, 앞 문장에서 기재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한 1905년부터 1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자 한국은 이것에 대항할 것처럼 독도의 한국 영유를 어필하는 월간 이벤트로 독도의 달을 정했다. 계다가 지금까지 영토문제가 없었던 쓰시마를 한국영토로 하는 쓰시마의 날로 정했다.

쓰시마도 확실하게 국경의 섬이지만 틀림없는 일본영토다. 이것은 분명히 지나친 행동이며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지 않다.

계다가 한국은 2012 8 10일 오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방문 계획을 돌연 발표, 당일 오후에 상륙하였다.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처음으로 前日 정보를 접수한 일본정부는 독도 방문을 중지 할 것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일한관계에 악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국제사령재판소의 재판에 가져와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한국측은 재삼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 때문에 공평한 제3자 기관에 의한 재판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이 독도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왜 한국이 이 정도로 독도를 고집하며 강경한 태도를 취할까? 어업권이나 바다 밑 자원 확보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자원과 관련해서는 60년 전에는 없었던 이야기로 이것은 최근의 일이다.

비밀의 열쇠는 1950년에 시작된 조선남북전쟁에 있다. 북한이 돌연 남한을 공격해온 동란으로 한국정부는 서울에서 대전을 지나 부산까지 궁지에 몰렸었다. 부산의 배후는 바다이므로 한국은 문자 그대로 고빗사위에까지 궁지에 몰렸었다. 만일 적군이 육지와 바다로 협격을 해 온다면 한국은 소멸된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미리 감지하기 위하여 감시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독도를 절호의 목적지로 겨냥하고 있다.

독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바르틱크 함대를 격파하였을 때 마이즈루 진수소가 감시소를 마련했던 장소였다. 함대가 어느 방향으로 올지 모르는 일본 해군은 일본해를 멀리까지 내다 볼 수 있는 독도에 감시소를 만들었고 그 덕에 적군의 공격을 신속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한국이 상기하여 독도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일본의 영토이기 때문에 정규군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민간의용병을 이송하고 의용병은 포대도 가져왔지만 일본은 민간이라면 문제 없으면 작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52년에 휴전협정이 나누어지고 바다로부터의 위기가 우선 회피되자, 부산을 향해있던 포대를 180° 돌려 일본으로 향했다. 동시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는 독자의 이승만 라인을 선언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섬을 빼앗긴 셈이지만 독도는 한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주적으로 획득한 유일한 영토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중국, 러시아, 일본에 정복되어 있던 한국에게 독도는 비원인 독립의 상징이다. 때문에 그들은 독도를 獨島라고 부르며 그만큼 강경하게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고집하는 이유다.

 

2012

2005

1996~

1998

1965

1954

1952

1951

1945

1910

1905

17~19세기

 

 

독도의

 

옛날

과지금

이명박이 한국대통령으로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

시네마현이 222일을 독도의날로 결정. 이것을 따라 한국은 10월을 독도의달로 결정.

외무성 한국의 독도접안시설건설에 항의. 한국은 시설건설의 이듬해에 유인등대를 설치.

일한국교정상화. 일한어업협정, 일한기본조약 체결, 이승만라인 소멸.

한국이 독도의 무장수비를 결정. 실효지배에 본격적으로 실시.

독도를 자국의영토라고 하는 한국이 독자의 이승만라인을 선언, 獨島라 부름.

센프란시스코평화조약, 맥아더라인이 소멸, 독도는 재차 일본영토로.

종전후 일본의 독도라는 정권이 정지, 맥아더 라인에의하여 일본어업구역에서 제외

일한병합.한국이 일본영토로 됨.

정부의 각의결정에 의해 시마네현에 편입되었다.

일본*한국 사이에서 독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 에도막부는 여러시대에 일본인이 독도에의 도항을 금지.

 

이런 주장에 대해 반박할수 있는 자료나 주장이 있을까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