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북방의 패자 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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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사 [2]
전 편에서는 흉노의 대두와 묵특 선우의 지휘 아래에 흉노족이 얼마나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했는지를 소개했다.
이제는 한나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자.
(1) 토사구팽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대립한지 어연 수 년.
이제 중국에서 통일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파초대원수 한신을 필두로 한 한나라군은 초나라를 제외한 모든 제후국을 복속시킴으로써 초나라를 고립시킨다.
이런 실정에서 항우는 장량의 이간계에 빠져 범증을 좌천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책사를 잃은 초나라는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한나라 군에 대응하기 벅찼고,
결국 한신의 백만대군은 항우를 구리산으로 유인시켜 고립, 항우의 자결로 초한대전의 막을 내린다.
패왕을 격파하고 서초를 평정한 한왕 유방은 한신의 군영에 달려가 그의 병권을 빼앗으며 말한다.
“ 장군은 많은 공훈을 세웠소. 난 장군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제후들을 평정한 오늘날에도 장군이 계속 군권을 가지고 있으면 장군에게 도리어 해가 될 것이오.
난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장군을 초나라 왕에 봉할 생각이오. ”
본디본래 제나라의 왕이였던 한신은 제나라보다 면적이 적은 초나라로 가니 기분이 언짢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초나라를 물리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여서, 자신이 물리친 나라의 민심을 돌보라는 명분이 있기에 두 말 없이 따라야만 했다.
기원전 202년, 한왕 유방은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곧 한 고조이다.
한 고조에게는 근심거리가 있었는데, 제나라 왕 전횡이 아직 은둔중이였고 항우의 명장이였던 종리매가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였다.
한 고조의 협박에 전횡은 자결했다 쳐도, 종리매는 하비에 있는 한신의 집에 숨어있다는 첩보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행여나 한신과 종리매가 합하여 초나라의 병사들을 일으킨다면 항우보다 더 무서운 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한신을 체포한다.
종리매는 자결했고, 한 고조는 한신을 파면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한왕 신이 대의 땅을 거느리고 흉노에 투항하자, 묵특은 기병 40만을 일으켜 한나라 북방을 침변한다.
그러자 황제가 직접 30만을 거느리고 흉노와 대적하는데, 이 해에는 날씨가 유난히 춥고 많은 눈이 내렸다.
흉노군은 패한 체하며 뒤로 물러나 한나라군 일부를 평성까지 유인하여 고립시켰다.
한나라 대군은 미처 뒤따라오지 못했고, 황제는 손발이 얼어붙어 제대로 싸움도 못한 채 백등산에 갇혀 7일 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 사실을 안 진평은 흉노족 내부의 사람을 매수하여 묵특 선우의 애첩과 연통, 백등산의 포위를 풀어주게끔 한다.
평성의 치욕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대나라 상국 진희가 반란을 일으켜 대왕을 자칭하고 상산의 20여개 성시를 차지한다.
황제는 회음후 한신과 양왕 팽월에게 진희의 토벌을 명하지만, 이들은 병을 핑계로 명을 받들지 않았다.
별 수 없이 황제는 자신이 직접 반란을 진압했고, 이후에 한신을 체포한다.
황제는 여태후의 설득에 넘어가 한신을 숙청하고야 만다.
한신이 죽은 지 석달 후에 양왕 팽월의 부하가 한 고조에게 밀사를 보내오는데, 팽월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이였다.
대나라를 평정하고 귀환한 황제는 팽월을 붙잡아다 여후의 조언대로 그를 숙청한다.
회남왕 영포는 한신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불안해하던 차에 팽월마저 숙청당했단 말을 듣고는 분개한다.
“ 이젠 나마저 죽이려 들겠구나! ”
영포는 팽월, 한신이 죽은 마당에 한나라에서 자신을 대적할 명장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
영포는 병사를 움직여 형왕을 죽이고 초왕을 쫓아내 형나라와 초나라의 수많은 성시를 함락시켰다.
당황한 황제가 급히 출병하여 영포와 대적하는데, 영포의 진법이 초패왕과 비슷함을 보고는 겁을 먹었다.
황제가 영포에게 말하기를,
“ 내 너를 왕으로 봉해 주었건만 어찌 반역하는가? ”
그러자 영포가 대꾸했다.
“ 항우도 당신을 왕으로 봉해 주었지 않소? 되묻겠소. 왜 항우에게 반역했소?
당신이 반역을 도모해 황제 노릇을 하는데 나라고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
영포의 이러한 엄포에 크게 노한 황제는 대군을 지휘하여 영포의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전투 중에 적이 쏜 화살에 가슴팍을 맞은 황제였지만, 대군으로 계속 압박하며 공격한 결과 영포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황제는 회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살에 맞은 상처가 도졌다.
장락궁까지 다행히 돌아온 황제는 몇 달간 앓아누웠다. 자신이 위중함을 알자 대신들을 불러놓아 말한다.
“ 유 씨네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황제로 봉하지 말지니와, 공훈이 없는이를 제후로 봉하지 말라. ”
그리고 황제도 서거한다.
이윽고 한 혜제가 즉위했는데, 기원전 188년 한 혜제는 23살의 나이로 승하한다.
유방이 한신을 제나라 왕에서 회음후로 좌천시키지 않고 중히 썼다면 평성에서 묵특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 상상하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2) 문경의 치세
한 혜제가 죽자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한다.
여태후가 죽자 여록과 여산이 황위를 찬탈하려 하지만서도 안으로는 주발과 유장이 무서웠다.
하물며 밖에서도 초나라, 제나라 군과 관영의 반란의 위협까지 있는데 오죽하겠는가.
태위 주발은 장군인검을 가지고 북군에 가서 병사들에게 호령한다.
“ 지금 유씨와 여씨가 권력 쟁탈을 벌이고 있는데, 너희들은 누굴 도울 것인가?
여씨를 돕고자 하는 이는 오른팔을, 유씨를 돕고자 하는 이는 왼팔을 보여라! ”
병사들은 주저없이 모두 유씨를 돕겠다는 표시로 왼팔을 내놓았다.
이렇게 주발은 북군을 장악하고, 유장은 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여산을 죽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관영도 군사를 물리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대신들이 만장일치로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가 바로 한 문제漢文帝이다.
한 문제는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온 집안이 연루되는 법령을 폐지하고, 전국 각지의 홀아비, 고아, 노인 등을 구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여든 살 이상 되는 노인들에게 매달 쌀, 고기, 피륙을 발급하고 지방의 관리들은 명절마다 노인들을 위문하라는 내용이였다.
당시만 해도 백성들은 정치에 대해 논의할 수 없었고 황제에게 의견을 내는 것 조차 허용치 않았으나, 한문제는 이것을 개혁하면서 조정에서도 상주서를 받았고 행차하다가도 상주서를 올리는 이가 있으면 마차를 세우고 받았다.
이리하여 누구도 상주서를 올릴 수 있었다.
한문제는 즉위한 이듬해에 그 해의 토지세 절반을 면제해주었고, 즉위 12년이 되는 해에도 그 해의 토지세 절반을 면제해주었으며, 그 다음 해가 될 때에는 토지세를 전부 면제해주었다. 하여 한 문제가 통치하는 기간에는 한나라의 국력이 절로 신장하고 태평성대를 맞이하였다.
흉노족들이 간혹 북방을 소란스럽게 했지만서도 그래도 큰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158년, 흉노족이 상군과 운중에 침입하여 많은 백성들을 살해하고 잡아갔다.
이때까지 아무런 싸움이 없었던 한나라에서 갑자기 흉노가 들이닥치니 경비병들은 황급히 봉화를 올렸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봉화는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성에서도 훤히 보였다.
한문제는 명장 주아부周亞夫로 하여금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흉노족을 타격하러 진군한다.
이 때 주아부를 비롯한 소년장군인 이광李廣 등이 출중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흉노를 격파시킨 2년 후 한 문제는 46살의 나이로 중병에 걸렸고, 태자를 곁에 불러다 말한다.
“ 앞으로 동란이 일어나면 주아부에게 군권을 맡겨라. 너의 근심이 덜어질 것이다. ”
한 문제가 승하하니, 그의 아들이 황위를 이었다.
그가 한 경제漢景帝이다.
한 경제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내사 조착을 어사대부로 등용하여 중히 썼다.
조착은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커짐을 보고 그들의 분봉지를 줄이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오왕 유비는 오, 초, 조, 교서, 교동, 치천, 제남 등 7여개의 제후국을 자신의 반란에 가담시킨다.
이것이 칠국동란이다.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는 제후들의 분봉지를 줄여 반란의 말미를 제공한 조착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오왕 유비에게 진정하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를 본 유비가 말하기를
“ 내가 이미 황제노릇을 하고 있건만 무슨 놈의 조서란 말이냐? ”
유비는 조서를 읽지도 않고 장안성으로 되돌려보냈다. 조정과 제후국 간의 대전은 이제 확전만이 남아있었다.
조착을 잃어버린 황제는 후회하고 상심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떠올리고는 주아부에게 병권을 넘겼다.
주아부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15개 제후국을 먼저 안정시키고,
나머지 반란에 가담한 7개 제후국은 계책으로 석 달 만에 모두 평정한다.
황제는 칠국동란 이후 제후들로 하여금 지방의 행정일을 간섭케 하지 못하게 하고, 그저 자신들의 분봉지 내에서만 세금을 받도록 하였다. 제후들의 세력은 대대적으로 약해졌고, 한조의 정권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황제가 세금을 감소하고 부역을 경감하자 한 왕조는 크게 부유해지기 시작한다.
한 문제와 한 경제가 통치하던 이 때를 문경의 치세文景之治라 한다.
한 경제가 승하하자 황태자 유철이 어린 나위로 즉위한다.
그가 곧 한 무제漢武帝이다.
(3) 다음 편에서 다룰 내용은...
1편에서는 묵특이 이끄는 흉노가 어떻게 북방의 패자가 되었는지를 소개했고,
이번 2편에서는 한나라가 문경의 치를 거치면서 어떻게 동방의 대국이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이제 다음 편은 북방의 패자와 동방의 대국간의 개전을 상세히 다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