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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혁] 그때그여중생 (21)
게시물ID : humorstory_645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밉상이
추천 : 13
조회수 : 58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4/05/31 13:45:01
-21- 


요즘 그 애는 엄마와 전쟁 중이다. 


"말도 마세요.. 어제는 일요일 내내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계속 졸졸 쫓아다니면서 강아지 사달라고 졸라 대는데.."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시며.. 



"어휴.. 철 들려면 멀었어요. 선생님도 저런 철부지 데리고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뭘.. 애가 좀 장난기가 있어서 그렇지 심성은 워낙 착해서요." 


"애가 저래 뵈도 정이 많아서요... 많이 아쉬워 할거예요" 



그 애는 과외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렇게 살살 열어서 대문이 부숴 지겠니? 

그리구 너 오늘 과외인거 알아 몰라. 

선생님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시는데 지금이 몇 시야 도대체?" 


"엄마! 그게 중요한게 아냐!! 빨랑 강아지 사줘!" 


"또 시작이니.. 선생님 보기 부끄럽다 정말.." 



그 애는 엄마 주변을 맴맴 돌면서..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 노래를 부른다. 

아주머니는 내 앞이라 그런지 끓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으셨지만. 

분노 게이지는 거의 MAX.. 위태위태 해 보였다. 



"엄! 마! 강! 아! 지!" 



드디어 폭팔하신 아주머니. 

벌떡 일어나 빗자루를 거꾸로 잡으시더니. 




"엄마가 안된다고 몇 번 말했어. 응? 강아지 니가 밥 먹이고 똥치우고 할래? 응?" 


"내가 다 할거야!" 


"이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나 같은건 이미 안중에도 없는 두 모녀는.. 

거실을 뺑뺑 돌며 한바탕 실갱이를 벌인다. 

결국 엄마 손에 잡혀서 엉덩이에 빗자루 두방을 맞은 그 애.. 



"엄마 잘못했어.. 사달라고 안할게.." 


"너 한 번만 더 그래봐. 얼른 과외하러 들어가!" 




씩씩 거리며 돌아서는 아주머니... 

그 애는 치맛 자락을 잡으며.. 



"사달라고 안하는 대신 부탁이 있어 엄마." 


"뭔데" 


"꼭 들어 줘야돼" 


"뭔데 말해봐" 


"십만원만 꿔줘"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히죽.. 비웃으며... 



"꿔줘? 언제 갚을 건데?" 


"아 갚을게! 엄마 나중에 늙으면 환갑 잔치라도 할 거 아냐!" 



아주머니.. 

그 애를 쓰윽 내려다 보시며.. 



"십 만원은 어디다 쓰게? 말이나 해봐라" 



그 애.. 슬금 슬금 뒤로 피해.. 

안전 거리를 확보한 후.. 

당차게 말한다. 




"강아지 사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활화산이 폭팔. 




"이 기집애가 근데 엄마말을 뭘로 듣고!" 


"꺄악.. 때리지 좀 마! 나도 다컸단 말야" 


"다 큰게, 다 큰게 응 이 모양이야?" 



아주머니.. 

거의 홍두깨로 보리 타작을 하시듯... 풀스윙으로.. 

딸내미를 옹헤야~ 

결국 과외는 정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졌다. 



"씨... 난 친 딸이 아닌게 틀림 없어." 



그 애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투덜거린다. 

그래.. 설득력 있는 가설이구나. 

친 딸이 너 처럼 엄마 속을 썩이겠니? 



"선생님은 좋겠다.. 멍멍이 있어서.." 




우리집에서 멍멍이 당번은 나로 정해져있다. 

사실 강아지 사자고 조른 것은 작은 누나였지만, 

정작 사 놓고는 밥 한번 준 적 없고 산책 한번 시킨 적 없다. 

나중에 지 자식 굶겨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나저나.. 걱정은 걱정이다. 

다른 식구들은 애당초 강아지 사는 것을 반대했었고.. 

작은 누나는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니. 

나 가고 나면 멍멍이는 누가 돌보지?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 틀림 없다. 




"자.. 책 펴 공부하자." 


"네.." 




녀석은 또 숙제를 안해왔다. 

이제 뭐라고 하기도 귀찮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녀석은 슬금 슬금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해요.." 


"됐어. 빨리 풀어" 


"선생님 진짜 화났구나"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 그만 화 풀어요.. 담에 꼭 해올게요." 

"알았다. 수업하자" 



내가 계속 퉁명스럽게 굴자.. 

녀석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무슨 날 인데?" 


"계속 화내시면 말 안할래요" 


"응 하지마" 



녀석은... 드디어 발끈해서는.. 

내 등짝을 탁 때린다. 



"이 밴댕이 속알딱지!" 


"......너 적반 하장이란 말은 알겠지?"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 이란 말예요.." 



녀석은 빙긋 웃으며.. 

책상 서랍을 열더니.. 

선물 상자를 꺼낸다. 



"짜잔... 우리 과외 시작한지 1주년 기념일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 때 쯤 시작했군.. 

벌써 1년이나 했나... 



말했지만 난 애를 맡아서 성적 오른 적이 없기 때문에.. 

늘 두세달 만에 잘리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집.. 든든한 철밥통 이었군. 



"선생님, 선물 풀어보세요. 사실 이거 만드느라고 숙제 못했어요" 


"핑계는 좋다." 



피식 웃으며.. 

포장을 뜯어보니.. 

뜨개질로 만든 목도리. 



"이제 곧 여름이다." 


"놔뒀다가 겨울에 하세요... 

뜨개질은 정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죠 

여자애한테 받을 수 있는 선물 중 제일 좋은 거라구요" 



뭐.. 

그렇기는 한데.. 

집게 손가락으로 들어 찬찬히 살펴 본 결과..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뭐예요! 그 태도는!" 



녀석은 금방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안하고 다님 울거예요." 


"응.." 


"지금 해봐요." 


"지금? 덥다." 



녀석은 목도리를 빼앗아.. 

내 목에 칭칭 감아준다. 



"와~ 인물이 훠언 해요!" 


"윽 뭐하는 짓이냐?" 



목도리를 풀려고 하자.. 

녀석은 안되요 안되요 한다. 




"하긴..군데 군데 구멍이 숭숭 뚤려서 그런지 통풍은 좋은 편이네." 


"뭐예욧!" 



녀석의 억지에.. 

목도리를 하고 과외를 했더니.. 

땀띠가 날 지경이다. 




과외가 끝나자 마자.. 

얼른 집을 나와.. 

목도리를 풀었다. 



"선생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야 지금 이런거 하고 다니면 미친놈 소리 들어" 


"안돼요! 제가 얼마나 정성 들였는데요.." 


"곱게 놔뒀다가 겨울에 할게 알았지?" 




녀석은 그 대신.. 

놀러가자고 조른다. 



그 애의 집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작은 개천이 나온다. 

도시의 하천 치고는 맑은 편 이었다. 



"사람들 많네.." 

"그러게요" 



약간은 후덥지근한 초여름의 저녁 이었다. 



녀석이 하도 떠들어 대길래.. 

잠시라도 입을 막으려고.. 

조스바 하나를 사 물렸지만.. 실패였다. 



녀석은 입술이 시퍼래가지고는.. 

쉴새없이 재잘 거린다. 



"그러니까.. 그 기집애가 말이예요" 



귓구멍에서 땀이 날 지경이다. 



"야. 덥다.. 그만 걷구 여기 앉아서 좀 쉬자" 



둑방에 털푸덕 주저 앉으니.. 

그 애도 내 옆에 착 달라 붙어 앉는다. 



"야 더워 좀 떨어져.." 


"쳇"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이 시간이면 어둑어둑 했는데.. 




"너 많이 탔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냐?" 



민소매 티셔츠 밑으로.. 

하얀 어깨와 까만 팔뚝의 대조가 선명하다. 



"전 금방 까매졌다가 금방 하얘지는 체질 이예요..." 

"응.." 



그 애는 조스바를 쪽쪽 빨면서.. 



"선생님, 이번 방학 때 여행 가신다 그랬죠?" 

"응." 

"좋겠다.." 

"넌 어디 놀러 안가?" 



그 애는 입을 삐죽 거리며.. 



"말 꺼냈다가 고 2가 어딜 가냐구 맞아 죽을 뻔 했어요" 



그 애는 어깨의 사마귀를 만지작 거린다. 


"그거 자꾸 만지면 커진다." 

"뻥"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냐.. 내 친구 중에 사마귀가 난 놈 있는데 

너처럼 자꾸 만지다가 결국 주먹만해졌어" 


"에? 진짜" 



그 애는 어깨를 걱정스러운듯 내려보며.. 



"커졌으면 어쩌지?" 



뽈록 튀어나온 사마귀가 앙증 맞아 보인다. 



"아까보다 좀 커졌네..." 

"진짜요?" 


그 애는 사마귀를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선생님. 근데 이거 자세히 보면 되게 귀엽다?" 

"그렇네.." 


사마귀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보았다. 

쏙 들어가더니 다시 튀어 나온다. 



"어딜 만져요, 커지면 어떻하려구" 



그 애는 내 손등을 탁 치면서.. 

핀잔을 준다. 



"미안.. 어. 아까보다 좀 더 커졌네." 


"진짜? 뻥.. 그렇게 금방 커질라구" 



그렇게 시덥잖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해는 벌써 서쪽 지평선에 걸려 있다. 



"선생님 근데 있잖아요.." 


"응" 


"저 원래는 수학이 되게 싫었는데요... 요즘 들어 자신감이 좀 생겼어요" 


"음.. 내 교습법이 좋았나 보군" 


"그게 아니라요.." 



그 애는 빙긋 웃으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본다. 

노을에 물든 얼굴이 빨갛다. 



"이렇게 버벅대도 대학 가는구나.. 하면서 안심이 되거든요" 


"시끄럿. " 



나는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었다. 

미리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알게될 거 마음 먹은 김에 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야. 할 말이 있다." 


"뭔데요?" 


"과외 이번달 까지만 하구 그만 둘거야.." 



그 애는 놀란 표정. 



"왜요? 우리 엄마가 그만 두래요? 나 성적도 계속 올랐는데"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군대가. 가기 전에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이것 저것 정리할 것도 있고 해서.." 



녀석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구나..." 




무릎 위에 양팔을 포개어 

턱을 올려 놓고는 

"그렇구나..." 를 반복하면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섭섭하냐?" 


"아니요.." 


"훗.. 그렇다면 내가 섭섭한데"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애는 대답이 없다. 



그 애는 나를 흘끔 쳐다 보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이제 가요 선생님.." 


"응.." 



말 없이 뚝방길을 걸어 돌아오다가.. 

그 애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면서.. 



"선생님......" 


"왜?" 


"안가면 안되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 애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럼 나중에 가면 안되요? " 


"뭐.. 어디 한군데라도 부러지면 몰라.. 연기할 이유야 없지. 나이도 많은데" 




녀석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짱돌 하나를 집어 든다. 

뭐.. 뭘하려고 하는거냐. 



"선생님.. 잠깐 여기 앉아 보세요.." 



저녀석, 진지하다. 

등 줄기에 식은 땀이... 




"하..하.. 엄마 걱정 하신다 빨리 가자." 



집으로 돌아 오는 길.. 

녀석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문득 생각난 듯.. 




"선생님 근데 있잖아요..." 


"응." 


"저 많이 철 없었죠 옛날에" 


"지금도 그래.." 


"아녜요.. 제가 생각해도 전 정말 많이 컸어요. 

이제 교복 안입구 어디 나가면 아가씨 소리도 듣는 다구요.." 




그래? 

그렇다면 아가씨.. 

그 짱돌은 이제 그만 내려 놓는게 어때? 




"선생님 저 처음 만났을 때 기억 나세요?" 


"응.. 기억 하구 말구" 





녀석의 오른손에 들린 돌을 억지로 빼앗아 땅에다 버리며.. 



"하긴.. 그 때 생각하면 아가씨 다되었네.." 


"선생님 그쵸. 그 때 그 여중생이 이만큼이나 컸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그 애는 머뭇 머뭇 입을 떼지 못한다. 




나는 그 애의 어깨를 잡아 180도 회전 시킨 후.. 


등을 가볍게 밀었다. 



"야.. 들어가.. TV에서 인기가요 할 시간이다." 



그러고는.. 

담배를 한대 물며.. 

녀석이 힘 없이 걸어 들어가는 뒷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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