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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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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소영
추천 : 18
조회수 : 2901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2/11/23 23:54:59

한나라와 흉노족의 전쟁사 [1]

 

 

 

 

(1) 말머리

 

 

서방엔 로마, 동방엔 한나라라는 말이 있다.

 

로마와 한나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다 제국帝國이라는 점.

 

에이미 추아의 저서인 『제국의 미래』에 의하면 제국(帝國)이란 황제를 칭한 나라가 제국이고 왕을 칭한 나라가 왕국인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은 물론 머나먼 타국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나라를 통칭한다.

 

그리고 에이미 추아는 제국으로 당나라, 로마, 미국, 유럽연합, 중국, 몽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막강한 나라들을 선정하였다.

바로 한나라와 로마가 이 부류인데, 로마는 서방의 1인자였고 한나라는 동방의 1인자였다.

 

하지만 로마와 한나라가 패권국가라고 해서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은 세력이 없던 것도 아닌데,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카르타고와 겨뤘고, 한나라는 단 하나의 북방의 패자를 결정짓기 위해 흉노와 싸운다.

 

 

(2) 흉노의 등장

 

 

흉노는 언제 중국사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까?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81년, 위·연·조·제·한의 5국이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한다.

 

결국 5국 연합군이 참패하는데, 흉노족이 기록 상으로 처음 두각을 드러낸 때는 바로 이 때이다.

흉노는 5개국 연합군에 가담하여 진나라를 공격했고, 패주하여 북쪽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이로 유명한 사마천은 흉노를 「이들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로, 이름이 순유.」 라고 말한다.

 

사마천은 사실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역사가 중 한 명인데,

그가 흉노의 조상을 하 왕조의 일족인 하후씨라 말하면서 흉노족이 중국 한족漢族의 후예라 말한 것이다.

 

하지만 흉노족의 뿌리에 대해 사마천의 이러한 해석 말고도,

『괄지보』에서 하의 걸왕의 아들 훈죽은 북방의 벌판으로 가 유목생활을 영위했다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3) 만리장성

 

 

오늘날의 감숙지구와 내몽골지구 및 동북지구에는 여러 유목민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부터 감숙은 의거족, 내몽골은 흉노족, 동북지구는 동호족에 의해 통합되어 있던 실정이였다.

그러니 이들과 접해있던 진, 조, 연 등 3국은 자연히 장성을 쌓아 이들의 침략에 방비할 수 밖에 없었다.

 

 

흉노의 출현은 동아시아상 획기적인 사건이였는데, 이들이 구사하는 기마전법은 보병 위주의 중국의 전법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여 기원전 307년 조나라의 무령왕은 유목민의 기마군단을 모방하여 조나라의 군대를 개혁하기도 한다.

 

당시 중국은 전차에 창병, 궁병, 마부 등 3명이 타고 그것을 보병으로 하여금 호위케 하는 방법이였다.

무령왕이 이것을 바꾸어 기마군단으로 새로이 편제를 하면서 많은 유목민들이 용병으로 쓰였다고 한다.

 

과연 조나라의 새로운 군사 편제는 성공적인 것이여서,

당시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구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진시황제 秦始皇帝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왕정은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키면서 중국대륙을 통일한다.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할 무렵, 북방에서도 하나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흉노에서 두만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여러 북방 부족을 통합하고야 만다.

 

이윽고 전 부족의 통치자인 선우單于의 호칭을 얻자마자 병사를 출병, 오르도스로 진출하여 남쪽의 진나라와 대립한다.

흉노와 진나라가 제각각의 영역을 막 통합시킨 최고의 화력의 상태에서 맞붙게 된 것이다.

 

이 때 진시황제는 망진자호亡秦子胡라는 예언을 입수한다.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은 호라는 이야기인데, 진시황제는 이 호를 오랑캐로 판단하고 몽염을 대장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 한다.

 

※그러나 망진자호亡秦子胡는 진시황제의 아들인 호해에 의해 진나라가 망한다는 예언이다.

 

이 때가 기원전 215년의 일이였다.

 

몽염의 흉노 원정은 성공적이여서 오르도스의 패권을 쥐고 있던 흉노는 크게 패주하여 막북으로 도망치고,

몽염은 오르도스 지역을 탈취한 후 황하에 연한 44개에 달하는 도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시황제는 흉노는 기마 군단이 주력이니 그들이 험난한 산을 쉽게 못 넘을거라 판단하고 그곳에 장성을 쌓는다.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라 불리우는 만리장성의 탄생의 순간인 것이다.

 

시황제는 황하 유역에 44개의 현성을 쌓아 둔전병을 설치했는데,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지만 중국 북방의 농민들이 도주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다고 현 학계는 해석하고 있다.

 

흉노와 중국 통일왕조의 1차 전쟁은 이렇게 진나라의 대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흉노는 약탈전쟁을 여러 번 일으켜 중국의 농민들을 대다수 납치한다.

노동력이 부족한 몽골리아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중국의 풍부한 노동력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였다.

 

더군다나 이들 포로로부터 중국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석이조를 거둘 수도 있었다.

훗날 한무제漢武帝 때 한나라 황실이 주철기술의 유출을 두려워하여 북방에 철 수출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기도 하다.

 

 

(4) 탱리고도 선우 묵특의 출현

 

※묵특은 묵독墨毒, 묵돌墨突 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기원전 210년, 드디어 희대의 전제군주였던 시황제가 서거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그동안 그의 폭정에 시달렸던 백성들로 하여금 혁명의 불씨를 지피게 한다.

 

 

오광과 진승의 난이 대표적인데, 이 때 망했던 초, 연, 제, 한, 위 등의 여러 나라들이 다시 거병하게 된다.

이 때 그 유명한 항우와 유방도 등장하여 군웅으로써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시황제가 죽자 황태자인 부소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했는데,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는 호해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려 권모술수를 부린다.

 

시황제의 필체를 위조하여 부소로 하여금 자살하게 하고, 흉노를 궁지에 몰아넣은 명장 몽염을 자살하게끔 만든다.

북방 경비의 중추였던 몽염의 죽음은 이제 중국이 오르도스 영역을 다시 상실케 하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각지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한창이였고, 망한 국가들도 사방팔방에서 들고일어나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으로 진격하는 판국에 몽염을 잃은 진나라가 오르도스를 방위할 겨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흉노 탱리고도선우 묵특 匈奴 撑犂孤塗單于 冒頓

 

오르도스 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흉노의 선우인 두만에게는 묵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 자리에 장자인 묵특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총애하는 첩의 어린 아들에게 대를 잇게끔 한다.

 

당시 흉노의 동쪽에는 동호, 서쪽에는 월지라 하는 강력한 세력이 존속하고 있었는데, 특히 월지는 하서지구에서 알타이 산맥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고 동서교역로의 요충을 차지하여 매우 강대한 국가였다.

 

두만은 이러한 월지에게 묵특을 인질로 보내고 월지를 공격하여 월지의 손에 묵특이 죽게끔 하는 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두만의 이러한 계획과는 다르게 묵특은 월지의 명마를 빼앗아 흉노로 다시 도망쳐온다.

 

두만은 이를 장하게 여겨 묵특에게 1만 명의 기병을 주고 좌현왕左賢王에 봉하여 사실상의 후계자로 임명한다.

1만 명의 기병을 하사받은 묵특은 자신의 군단을 훈련시켜 최정예로 양성한다.

 

그는 자신의 최정예 병사들을 거느리고 아버지인 두만을 사냥터로 유인해 살해해버린다.

그리고 두만과 연계된 계모와 동생 및 두만의 가신 등을 숙청하고 스스로 선우에 오른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묵특에게 흉노의 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동호가 사절단을 보내온다.

 

“ 대국이 소국의 제후에게 안부를 여쭙노니 그대는 안녕하시오?

흉노에는 명마인 천리마가 있다던데, 내가 그것에 지극히 관심이 있소. ”

 

동호 왕의 무례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묵특은 개의치 않고 인접국가와의 우의를 중시하여 그 말을 선뜻 내준다.

이에 동호 왕은 묵특이 순순히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는 득의양양해져 다시 서한을 보내온다.

 

“ 흉노 왕의 선물을 고맙게 여기는 바요. 듣자하니 그대의 애첩이 예쁘다던데.

 

이 때 흉노의 모든 가신들이 동호의 처사에 분노해하며 침략할 것을 자신의 왕에게 상소해한다.

하지만 묵특은 개의치않고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 여자 하나로 어찌 국가간의 사이를 멀어지게끔 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묵특은 동호 왕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어 자신의 애첩을 주었다.

 

묵특이 노무현마냥 동호에 퍼주다보니 동호 왕은 묵특을 깔보면서 영토 구탈지의 할양을 요구하는데, 묵특은 분노한다.

 

“ 천리마와 애첩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 나는 동호와의 굳건한 동맹을 택하였다.

하지만 동호 왕은 흉노의 영역마저 내어달라 하니 이는 곧우리의 숨통을 조여듬이라, 도저히 그의 무례를 용납할 수 없다.

동호의 모든 산천에 흉노의 깃발을 세우고, 가축과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묵특은 흉노의 전군을 몰아 동호를 침략하여 궤멸시킨다.

 

묵특이 이끄는 흉노의 정병에 동호 왕은 살해되고, 백성들과 가축은 흉노의 노예가 되었다.

 

묵특이 동호를 궤멸시킨 여세를 몰아 서방의 월지를 격파하고 중국의 초한대전楚漢大戰의 혼란을 틈 타 오르도스를 침범한다.

이윽고 누란과 백양을 병탄, 나아가 한나라의 영토에 있는 연과 대의 땅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중국과 흉노의 두 번째 충돌이였다.

 

 

(5) 평성의 치욕

 

 

묵특이 북아시아 전토를 병합할 무렵, 중국에서도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한태조고황제 유방 漢太祖高皇帝 劉邦

 

의 풍읍豊邑에서 일어난 유방은 자신의 호적수인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켜 천하를 호령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한 고조인데, 바로 기원전 202년의 일이다.

 

중국 전토를 통일한 고조는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한왕 신을 대의 땅 마읍馬邑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평소 흉노 기마군단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던 한왕 신은 고조의 흉노 토벌 명령을 어기고 화평의 길을 택한다.

그러자 한나라 황실에서는 이것을 배신으로 간주한다.

 

“ 흉노에 빌붙으려는 반역자를 추포하라!

 

궁지에 몰린 한왕 신은 부장 왕항 등과 자신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흉노에 투항하였다. 기원전 200년의 일이다.

흉노에 대한 한왕 신의 투항은 중국 북변의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전부터 마읍과 태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묵특은 한앙 신의 군사 지원을 받아 그 땅에서 40만을 일으킨다.

한편 한 고조는 이에 대응하여 자신이 직접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평성平城에서 흉노의 묵특과 충돌한다.

 

묵특은 평성을 겹겹이 포위하여 고립시키는데, 한 고조와 그의 병력들은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간 굶주림으로 고생하게 된다.

결국 한 고조는 묵특의 애첩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포위한 한 쪽을 풀어주게 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 겨우 목숨을 구한다.

 

이 때 하나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한 고조의 사자가 묵특의 애첩에게 말하기를,

 

“ 중국에는 미인이 많기 때문에 만약 마님의 주인나리께서 중국을 정복하신다면 마님께선 반드시 폐비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묵특의 애첩은 질투심이 나서 묵특으로 하여금 평성의 포위망을 풀어주게 하고, 중국 정복을 못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싸움을 세간에서는 평성의 치平城之恥라 한다.

 

평성의 치로 인해 한과 흉노는 하나의 조약을 체결하는데, 한 황실은 매년 흉노에 솜, 비단, 술, 쌀 등을 바치고 한 황제와 흉노 선우와의 사이에 형제의 맹약을 맺어 영구히 화친을 한다는 것이였다.

 

중국은 중화사상의 나라이다.

 

북쪽을 북적, 남쪽을 남만, 서쪽을 서융, 동쪽을 동이라 하여 사방팔방을 오랑캐라 규정하고 오직 중심에 있는 중국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이 중화사상에 크나큰 굴욕을 안겨준 것은 바로 흉노의 선우와 한나라의 황제가 형제가 된다는 조약문이였다.

 

여태까지 흉노를 융적이라 하여 업신여겼던 한나라 황실이지만, 이번 싸움으로 인해 업신여긴 상대를 황제와 동등한 위치로 격상시켰다는 점은 당시 중국 대륙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 고조가 세상을 뜨고 혜제가 즉위하는데, 이 때 묵특이 고조의 아내였던 여태후에게 서신을 보내온다.

 

“ 나도 독신이고, 고후高后께서도 독신입니다. 서로 잘 해 봅시다. ”

 

외교상 생각할 수 없는 무례한 서한이였고, 묵특의 이런 패기에 크게 노한 여태후는 당장 흉노를 치려 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만류했다.

 

“ 하물며 항우를 깨뜨렸던 고조같은 현명한 분도 평성에서 고전하셨습니다. ”

 

장수들의 만류에 결국 여태후는 분을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평성의 치가 어떻게 그 후의 한과 흉노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6)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는 흉노

 

 

동호를 멸하고 한을 물리친 흉노가 명실상부한 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최강의 적인 월지를 토벌한 후였다.

월지를 집요하게 공격했던 묵특은 기원전 176년, 드디어 월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그 사이 북방 정세는 묵특의 한 문제漢文帝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흉노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 지금 나는 신하가 맹약을 깨드렸기 때문에 우현왕을 벌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서방의 월지를 토멸시켰소.

하늘의 가호와 신하, 군졸들의 우수함과 마필의 강력함으로 인해 월지를 멸하고, 그들을 전부 참살함으로써 항복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근린의 이십육 국을 평정하여 그 땅을 모두 흉노에 존속시켰소.

이리하여 여러 활을 쏘는 민족은 마침내 합쳐져 일가가 되고, 북방의 고을들은 모두 안정되었소. ”

 

여기서 주목할 점은 흉노가 월지 토벌과 함께 누란과 오손 등을 병합했다고 하는 점이다.

당시의 월지는 서역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이였는데, 서역 남도의 옥의 교역을 월지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위의 편지에 따른다면 흉노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묵특에 의한 월지 토벌은 월지족을 남북으로 분산시킨 결과를 만들어주었다.

즉 월지의 주력은 천산산맥 북측에서 오늘날의 이리 방면으로 이주시키게끔 하였다.

 

흉노가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한 월지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여 궤멸시키는데,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흉노는 당시 최대의 동서교역로에 있던 서역지구를 월지에게서 뺏어냄으로써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날로 강성해지는 흉노에게 전란의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한다.

한나라에서 유철이 황제로 즉위한 것이다.

 

그가 바로 한무제漢武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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