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주 학설은 일제시대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조선의 노동구조는 임노동의 미분화, 고용관행의 봉건적 요소 조선인의 미숙련 단순 육체노동이나 일제에 의해 반농 반로적 성격을 강요 받아 노동자 의식 성장을 방해하고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이 어우러져 조선 노동자의 생활은 매우 열악 했다는게 주된 교과서적 내용입니다 이 연구는 일본 자본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억압 착취 의 실태와 노동구조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동적 성장의 모습을 소홀리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주로 제국주의 국가였던 서구 서양인의 연구 결과(노동구조의 식민지적 왜곡성을 아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주체적 대응과 질적 성장을 강조하는 연구 계열로 글을 쓰겠습니다)
이 관점은 조선인 노동자가 민족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기술과 숙련을 축적하여 성장의 길을 걸어갔음을 중시하는 연구와 어느정도 일치합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인 관리직 기술자 수가 큰폭으로 증가것은 조선인들은 전시공업화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 일본도 조선인 노동자의 성장을 억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민족적 차별을 받지 않고 기술 기능 숙련을 축적하여 상급의 지위로 승진해 갔는데 한예로 1940년 10월 현재의
조선인 관리직 기술자 수는 1만 4500여명 이었는데, 1944년 5월 에는 3만 5700여명이었다.
이런 현상은 기업 금융 관직 군대 등에서도 동등하게 나타났습니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조선인 자본이 총 자본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 였으나 여기에 조일 합자회사나 일본인 기업에 투자한
조선인 자본을 합하면 이 비중은 30~40%에 이르며 이것은 조선인이 사장 중역 혹은 주주로서 기업의 경영에 활발하게 참가했음을 의미한다 조선 최대의 금융기관이었던 조선 식산 은행에서는 조선인 종사원이 평시에는 총원의 32~43% 전쟁말기에는 상급직에서조차 40~45%를 차지합니다. 이곳의 조선인들은 부서배치와 직무수행에서 약간의 차별을 받았지만, 임금 등의 복지후생 면에서는 일본인과 동등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중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칙임관 18~25% 판임관 30~36% 등이었고
지방관청에는 조선인이 더욱 많이 배치되었습니다. 이것이 행정과 관리 능력을 몸에 익힌 조선인들이 그만큼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군인과 경찰에서도 조선인은 자기개발을 경험합니다. 해방 당시 22만여명의 조선인이 일본의 육군과 해군에 가담하고 있었고(당시 독립군 300여명 안팎ㅠㅠ) 일본 육사를 졸업한 조선인 장교만도 140여명에 달했습니다.
위의 연구에서는 1930년대 이후 지식 기술 경영 관리 행정의 노하우를 축적한 사람들이 해방 후 한국의 발전을 주도한 인력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현대 한국과 일제시대는 사람과 제도 및 의식의 면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적 지배 하에서 적극적으로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거나,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개발해간 조선인들의 노력과 결단을 무척 높게 평가합니다.
반면에 한국인의 연구에서는 조선인의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평가에 대해서는 무척 신중합니다
193-년대 이후 조선의 노동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933년에는 21만 4000여명 , 1943년에는 무려 175만여명으로 증가하고 그중 에서
93%가 조선인이었습니다. 노동력 구성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고 즉 노동자가 공업지대 경기 함남 함북의 대도시로 이동하고,
공장 직공이 대규모 공장에 집중되었으며 노동자의 교육정도와 경험축적이 높아지고, 노동자의 조직과 계급 의식이 강화되었습니다.
전시공업화기에조선인 노동자의 양적 질적 숙련과 역량이 강화된것입니다
한 사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 질소의 노동자수는 1930년에 3000여명 1944년에는 5만 5000여명 이었는데, 그중에서
80%이상이 조선이이었습니다. 다만 고도의 기술 기능 숙련이 요구되는 전기 화학 부문에서는 일본인 종업원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조선인 노동자의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고 지식과 의식의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 중에서 하급의 기술자 기능공 숙련공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가운데 1937년 이후 급속히 전개된 공업교육이나 직업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성장은 식민지적 차별제도(교육에서 직업훈련 등에서 불공평한 기회부여와 불균등한 대우 실업교육 강요)
아래에서 비정상즉으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러한 차별제도가 철폐되지 않는 한, 조선인 노동자가 질적 향상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지 체제를 강화시킬 뿐 조선인이 사회의 주인공으로 되는 정상적인 발전이라고 볼순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최대의 관업기관 이었던 철도국은 해방 당시 10만여 명의 종사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조선인 비중은 1930년대 중반 이전에는 40% 전후였으나, 1944년에는 70%를 상회하였고 직책면에서도 조선인은 1930년대 이전에는 용인 고원등 하급 신분이 대부분이었으나
1940년경에는 장 주임 급에서도 1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본인이 징병으로 빠져 나간 자리에 조선인이 메울수밖에 없던 특수상황과도 연관 됩니다.
철도운영을 종합적으로 기획하고 감독하는 중추부서와 중 상위의 기술직은 여전히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위의 연구 사례를 보면
1930년 이후 조선의 노동 구조 변화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도기에 놓여있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