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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책임을 뒤집어쓴 남자.
게시물ID : history_64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wangGaeTo
추천 : 6
조회수 : 17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1/22 22:14:20

학봉 김성일.

 

이름만 얼핏 들어서는 누구?

 

하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1590년 5월1일 부산을 출발해 일본 교토(京都)에 도착한 뒤 어렵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고 1591년 1월28일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100여년 만에 일본에 파견됐던 통신사 일행은 3월1일 선조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과 허성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한 반면, 김성일은 이를 부정했다.

 

이는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대목이다

 

당쟁을 위해서 전운의 기운을 덮어버린 사람..

 

지금까지 알려진 김성일의 이미지 이다.

 

하지만, 김성일의 이런 이미지는 철저하게 왜곡되고 잘못 알려져 있다.

 

왜냐면.

 

당시의 당파는

 

당론을 만들고 그 당론으로 몇몇의 당파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리고

 

이를 왕과 의정부의 재상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김성일이 아무리 당파의 이득만을 챙기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왕이 소위 콜을 하지 않는 이상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진짜 김성일은 어떤 사람일까?

김성일의 임진왜란 전후의 생애를 보면,.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김성일이 고작 당파에 눈이 멀어

 

나라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 쉽게 보인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뒤 곽재우, 김시민 등과 함꼐 상당한 전공을 세우고, 경상도지역에서 방비를 위해 노력하다

 

역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아들이 병중에 있었음에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 이외에도 김성일의 인품을 나타내는 일화로는 일본에 문제의 그 사신으로 갔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났을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答書)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界市)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再造蕃邦志)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殿下)'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출처] 임진왜란과 김성일|작성자 팔각산

 

즉, 김성일이란 인물은 매우 강직하고 담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임진왜란의 발발 가능성에 대해서 보고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에 있어서 그의 판단은

 

당시 권력에서 밀려난 서인이

 

전란의 분위기를 통해 민심을 흔들어 권력을 다시 쟁취하려는

 

일종의 정략으로 황윤길의 보고를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부풀려졌거나 허위라고 생각되는 전란의 기운이

 

혹여 공론화 되어 민심을 어지럽히고 나아가 서인이 이를 이용하려는 것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신배 김성일의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먼저는 선조와 당시 양반층을 들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보니 선조 입장에서는

 

자신이 "풍신수길이 미쳤다고 전쟁하겠어? 설마..." 하고

 

전쟁준비를 하지 않은 것에 굉장히 찔림을 받았을 거고,

 

강직한 사관들에 의해 역사에 어떤 평가가 날지 두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당시 유구국과 중국 등지에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나 정보는 엄청나게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전쟁의 기운이 없다고 한 김성일의 귀국보고를 부풀려서 책임을 김성일에게 전가시키려는 생각을 했을것이다.

 

다음으로는 일제의 식민사관이다.

 

일제의 식민사관 중 당파성론을 부각시키는데 있어서

 

당파에 이득에만 집중해서

 

나라를 멸망의 지경까지 몰아넣은 조선의 무능하고 덜떨어진 관리들.

 

의 전형적인 예로써

 

이용할 가치가 매우 높은 일이 아닐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마치 사실인것처럼 둔갑시켜버렸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영웅화와 문학작품 때문이다.

 

이순신이 구국의 영웅이 되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종의 내부의 적, 내부의 악역이 필요했고, 원균과 함께 김성일의 일화도 부풀려졋다는 것이다.

 

이것이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1966),

 

최인욱의 ‘성웅 이순신’(1971),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75)과 TV 드라마 등에서 경인통신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확대 고정되버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책임을

 

혼자서 뒤집어 쓴 남자. 김성일

 

하지만 임진왜란의 진정한 책임은

 

그의 보고가 아닌

 

무능한 선조에게 더욱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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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일대외관계사를 듣고 교수님이 학봉도 잘못알렸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자료를 찾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주 출처은 저희 교수님이 쓰신 논문 조금이랑 수업자료 조금 인터넷 자료입니다.

 

태클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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